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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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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홍콩 여행기] 사건과 영화-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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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은 것들
1)
여행자가 여행지를 감각하는,
육체적이란 의미에서 가장 직접적이고도 강렬한
수단이라면, 언뜻 생각나는 것이 '음식'입니다.
여행지의 음식을 냄새 맡고 시식하면서
우리는 그 여행지에 비로소 스며들기 시작하죠.
그곳이 자연과 가까운 곳이라면, 과일을 깨물 때..
그곳이 도시의 중심이라면 소스와 향신료로부터..
우리는 그 고장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여행자가 여행지를 효과적으로 접촉하는 경험과 관련하여
한 마디 더 보태자면.. 여행철은 역시 여름이 아닐는지요.
태양의 파상공격에 몸이 말랑말랑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비로소 우리는 여행지의 뉘앙스에 젖어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타고장을 참되게 이해하기 위해선
기존의 자아를 어느 정도 버려야 하죠.. 고로..
무더위에 녹은 육신이 어느덧 대기의 일부가 되고
대뇌가 텅 비어버리는, 이 '여름'이야말로
근사한 여행의 계절이랄 수 있습니다.
비우지 않고서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상태에서 맛보는 음료와 빙과.
그대, 이것을 아는가..
몇 되지 않는 해외여행들에서 제게 남은 구체적 진실 하나는
언제나 여름, 그리고 여름의 여행지에서 먹은 음료와 빙과였습니다.
파리에서 마신 뻬리에라는 미네랄워터,
환타와 비슷하게 생긴 탄산음료 오랑지나,
하루에 두 번씩 사 먹었던 레먼맛 아이스크림인 시트롱 소르베,
그리고 라임향 소르베인 시트롱 베르,
남프랑스의 까페에서 마신 망뜨(민트)라는 이름의, 초록의 박하수,
사이공 어딘가에서 대롱으로 빨아먹은 야자열매의 즙.
여행의 잔상은 이렇게도 남는가 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여행의 전부라 해도 좋습니다..
홍콩에서 눈에 뜨인 빙과류 중에 비설빙(飛雪氷)이라는 게 있었어요.
오션파크에서 돌고래쇼 구경할 때
관람객들이 손에손에 들고 올라오는 것이 이거였는데..
팽이처럼 생긴 투명 용기에,
우리네 빙수나 스노우아이스같은 질감으로 얼음을 잘게 부서뜨리고
그 위에 초록의 색소를 뿌린 다음 과일 몇 조각을 얹어놓은
빙과류였다.. 라는 것은 눈썰미로 잡아낸 제 나름의 레서피일 뿐,
결국 먹어보지도 못하고 떠나왔습니다.
가게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어요.
아니, 쇼가 끝난 뒤 수족관 가는 길에
비설빙 이름이 적힌 가게가 하나 있긴 있었죠.
그런데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 미적미적하다 기회를 놓쳤습니다.
뭐, 불량식품같이 생긴 그 빙과를 반드시 먹고야 말겠다고
우기는 것도 한도가 있고.. 여간 주책스러워야 말이죠..
아,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 기회일 줄이야..
다음 날 구룡반도 침사추이 부근에선
그렇게 생긴 빙과는 눈 씻고 봐도 보이질 않았습니다.
아마도 유원지용 빙과였나 봐요..
지금껏 한이 되었는지..
요새도 저는 가끔 비설빙의 꿈을 꿉니다..
2)
여행지를 감각하는 또다른 멋진 수단은 교통기관입니다.
여행지가 도시일 경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죠..
교통 기관의 동력과 스피드에 몸을 맡기는 행위는
음식만큼이나 도시를 몸으로 이해하는 강력한 수단입니다.
그런 뜻에서.. 홍콩의 교통기관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일단 메뉴가 다채로워 골라먹는 재미가 있죠.
좁은 땅에 인구밀도는 높지..
일찌감치 국제적인 도시로 자리잡다 보니
빌딩은 기본이 수십층이고.. 또 원래 고지대인 모양인지
도대체 오르막길 아니면 내리막길인 거에요..
시민과 재화의 효율적 이동을 위해
각종 교통기관이 발달된 건 꽤 자연스러워 보였는데..
메뉴를 소개해 봅니다..
첫날 홍콩섬 오션파크로 날라다 준,
남지나해가 바라다 보이는 케이블카,
하염없이 추락하는 네 단계 하향 에스컬레이터,
빅토리아피크에서 야경을 본 후 타고 내려온
피크트램이라는 이름의 뒤로 가는 열차,
그때 그, 비탈진 철로를 따라 누워서 내려가던 내 이상한 자세와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던 위협적인 각도의 빌딩들..
구룡반도와 홍콩섬을 연결하는 스타페리 왕복선,
홍콩섬에만 남아있다는 낡은 이층전차,
그 맨 앞자리에서 바람을 맞으며 간판의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한낮..
전차와 병행하여 운행되는 이층버스, 그리고
우리와 달리, 분절되어 있지 않고 일자로 길게 뚫린 지하철.
3)
표범처럼 분노하던 유덕화의 눈초리, 유덕화의 몸짓이
거기 어딘가 얼룩져 있으리라.. 오늘날까지도 굳게 믿고 지내온 저는,
내 인생의 영화 [열혈남아]의 거리, 몽콕을
고집스럽게 염두에 두고 홍콩을 방문했더랬습니다.
다분히 영화에 사로잡혀 스스로 암시에 걸려든 결과이겠지만..
역시 좋았어요.. 그곳은.. 새까맣고 지저분했으나
동시에 뜨겁고.. 활기차고.. 약동하는 거리더군요.
[메이드인홍콩]에 나오던 양아치스타일의
비쩍 마른 젊은이들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그곳의 한 극장엔, 이제 더 이상 유덕화와 장학우가 아닌,
여명이 주연하는 멜로영화 한 편이 상영되고 있었구요.
이곳의 밤거리에서 상점들을 지나며
아무 생각 없이 빈둥빈둥 흘려보낸 시간들이 좋았습니다..
4)
10월초였는데도 대낮 기온은 35도에 육박하고 있었습니다.
고온일 뿐 아니라 다습한 기후였구요.
에어콘의 일상화, 또 수시로 에어콘이 가동되는 건물로
이동해 가게 되어 있는 도시 연결 시스템에서도 알 수 있듯
홍콩은 의심의 여지 없는 열대였습니다.
열대는 물론 매혹적입니다.
열대의 밤은 더욱 매혹적입니다.
하지만 이 고장에서 살고 싶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NO, 하겠습니다.
5)
이번 여행으로 좀더 확실히 알게 된 것 하나는
아이러니칼하지만 내가 여행 체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욕망만 굴뚝이지 체력도 약한 편이고..
원체 돌아다니길 싫어하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전 비행기가 무섭습니다. 너무 무서워요..
비행기를 타면.. 기내에 떠 있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
최악의 정서불안에 시달립니다. 늘 그랬던 것 같아요.
기내를 찢고 뛰쳐나갔던 [프렌치키스]의 멕 라이언..
남 얘기 아닙니다..
또 이것도 있어요..
여행지에서 한번도 먹고 싸는 일이 편치 않았다는 점.
집 떠나면 누구나 긴장한다지만, 좀 유난하다고 할까..
먹는 일은 밝히는 주제에, 내보내는 시스템은 거의 가동이 안 됩니다..
네, 딱 멈춰 버리더라구요..
그런 주제에 이런저런 일정에 대한 취향은 무지 까다로우며
사사로운 만족/불만족, 쾌/불쾌에 엄청 민감하죠.
여행을 하기보다 여행을 꿈꾸는 걸(dreaming) 좋아하고
여행을 경험하기보다 여행을 계획하는 걸(planning) 즐긴다,
제게 있어 이 점은 너무나 분명하군요.
그래서인지.. 고트프리드 벤의
다음과 같은 위트 넘치는 시가 와 닿습니다.
여행
벤
말하자면 취리히는
이적과 감격이란
내용을 지닌 더욱 심각한
도회지라 생각하십니까?
백양(白陽)에 맨드라미 붉게 타는
하바나는
당신의 사막 기갈을
영원한 만나로 메꿀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시나요?
역전 번화가 파리의 거리거리
불바르, 리도, 랑,
뉴욕의 오번가에서도
공허는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외다.
여행이란 속절 없고 헛된 것이어서
먼 훗날 사무쳐, 알게 되니,
집에 앉아 끝없는 자아를
고이 간직하고 되살리는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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