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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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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앙코르의 깊은 사원에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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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앙코르의 깊은 사원에서>
1. 시엠립의 하늘 아래로
시엠립은 앙코르 유적군을 둘러싸고 있는 캄보디아의 도시다. 우리
는 사이공에서 시엠립으로 날아왔다. 공항 분위기는 베트남보다 더 삼
엄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베트남인들보다 피부가 검고 살집이 오동통
하며 더 순박한 인상을 준다. 베트남보다 더 미남미녀가 많은 듯하다.
기후는 훨씬 건조했다. 우리가 도착한 날 하늘은 푸르렀고 팜트리들이
쫙 벌린 다섯 손가락처럼 명랑하게 활개치고 있는, 시원한 열대의 풍
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이공의 잿빛 먼지와 소음, 고온다습한
공기 속에 절어있다가 이곳에 오니 기분이 상쾌했다.
우리를 안내한 분은 시엠립에 위치한 한국인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형제 가운데 형인 분이었다. 장동건과 신현준을 배합해 놓은 것 같(지
않냐고 옆에서들 그랬다)은, 이 지역 태양의 세례를 흠뻑 받은 듯 구
릿빛으로 그을린 열대형 미남이었다. 그렇다.. 그런 얼굴은 결코 북방
형이라 할 수 없는 얼굴이다..
우리는 안내인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초대되어 갔다. 안내하시
는 분의 제수씨, 즉 주인 형제 중 동생분의 아내는 캄보디아 여인이었
다. 작년에 결혼했다고 한다. 그 어린 아내가 만삭이 된 배를 끌어안고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뜰 안에 마련된 식탁에서 비빔밥
을 대접받은 그 점심 나절, 우리의 행복지수는 최고조에 달하였던 것
같다. 베트남에서 망고를 못 먹고 왔다고 내내 투덜거리던 우리들이
아직 제철은 아닐망정 설익은 망고를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곳에
서였다.
사이공의 호텔에서 두 명씩 짝을 지어 동침했던 우리는 이번 시엠립
에서도 짝짓기를 위해 제비를 뽑는, 남들 눈에야 한심하지만 우리로서
는 상당히 기대되는 작은 이벤트를 벌였다. 그 결과 흥부와 놀부가 짝
을 짓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짝을 짓고 견우와 직녀가 짝을 지었다. 또
나머지 하나는 뭐더라, 아담과 이브던가.. 우리는 처음 우리가 만났던
대학 시절보다 더 철이 없어진 것 같았다. 참고로 우리 나이는 올해
서른 일곱이다.
2. 호수 위의 도시
도착한 날 우리는 먼저 톤레삽이라는 호수로 배를 타고 나갔다. 이
호수는 메콩강이 캄보디아를 통과하는 지점에 형성된 거대한 내륙호수
였다. 우리 눈엔 강이나 바다로 보였다. 우리는 물 위에 늘어선 가옥들
을 보았다. 그들은 가난했다. 땅에 정착을 해도 시원찮은 것이 인간의
삶인데 왜 물 위에 저렇게 집을 짓고 사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범람하여 떠내려 간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그런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할 성싶지 않았다. 아니 어
찌 보면 그들 나름의 합리가 존재할 것도 같았다. 톤레삽은 물이고 호
수이기 이전에 오랜 세월 조상때부터 그들이 살아온, 그래서 익숙해진
주거 환경이다. 그곳은 일종의 도시였다. 다만 도시의 형태가 우리 눈
에 특이할 뿐이었다. 우리가 땅 위의 삶을 살 듯 그들은 물 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었다. 물 위에 집을 짓고 의식주 생활을 영위하며 텔레
비전도 보고 애도 낳고 애들 학교도 보내고 그러고 사는 것이다. 우기
가 다가오기 전엔 범람을 피해 이사도 간다,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산다는 건 투쟁도 아니고 개혁도 아니고, 뭐 고해도 아니고, 결국 습관
인 것 같다..
3. 깊은 사원에서
우리는 시시각각 앙코르의 시간대에 진입하고 있었다. 앙코르 유적
군은 동서길이 20킬로미터, 남북길이 10킬로미터의 대지에 산재한 거
대한 폐허이다. 저녁 무렵 우리는 앙코르톰에서 좀 떨어진 프놈바켕이
라 불리는 고지대 유적에 올라 일몰을 보았다. 날씨가 화창했으면 일
몰이 더 아름다웠을 거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날 하늘은 잿빛이었다.
그럼에도 시야는 광대했다. 지평선 위에 사탕알같이 둥글고 바알간 햇
덩이가 걸려있다가 꼴깍 넘어갔다. 일몰 광경을 보러 올라와 있던 관
광객의 대부분은 서양인이었다. 아니, 앙코르 유적군 도처에 아시아인
들보다 유럽인들이 많았다. 나는 틈틈이 불어를 들었다. 나는 이곳이
국제적인 관광지임을 실감했다. 해가 지고 우리는 열대의 어스름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앙코르톰의 남문을 통과해 들어간 다음
날의 여정은 바욘 사원과 왕의 테라스, 앙코르와트, 타프롬 등으로 이
어졌다. 이 과정에서 내가 느낀 것은 일차적으로 이 광대한 유적군 자
체의 신비와 경이로움이었지만, 그와 함께 나란히 인식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은 약 한 세기에 걸쳐 진행된 고고
학의 눈부신 성과라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12세기 전후에 만들어졌다
는 이 사원의 유래라든가, 그와 관련된 왕조사 따위보다는 이쪽에 신
경이 쓰였다. 유적 앞에 선 나, 즉 유적과 내가 만난 사태의 배경을 거
슬러 올라가다 보면, 그 이면엔 19세기에 이 유적들을 '발견'한 이래
정글 청소와 유적 복원에 매달려 온 일군의 서양 탐험가들의, 집념 어
린 초상이 버티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이면엔 말하나마나 캄보디아
지역을 식민지로 갖고 있으면서 앙코르 유적군을 관광지화해 온 프랑
스의 무서운 제국주의가 존재했을 것이다.
사이공의 도시 설계 양식이 프랑스 경우와 유사하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했다. 캄보디아의 문화유산인 앙코르 유적을 파노라마처럼 즐길
수 있도록, 말 그대로 '관광(觀光)'이 가능한 지역으로 소생시킨 장본인
들 역시 프랑스인들이었다. 그래서 이 유적지는 아주아주 거대한 유럽
귀족의 정원처럼 꾸며져 있다. 투어버스나 승용차, 혹은 오토바이를 타
고 산재한 유적지로 향하는 길들은 커다란 수목이 양 옆에 즐비하게
늘어서서 호위하는 기나긴 산책로와 같다. 그것들은 프랑스 중서부에
펼쳐져 있던 중세의 고성들, 이를테면 불르와나 쉬농소 같은 성들로
들어가는 산책로와 똑같이 생겼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귀족
이다. 답답하면 잠시 내려 양산을 펴들고 이 길을 산책할 수 있다. 이
윽고 저 앞 넓디넓은 잔디 위에 돌덩이가 보인다. 그것이 자야바르만
7세의 유적이든 고성이든..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다.
실제로 20세기초 앙코르 유적군이 정비되는 시점과 함께 프랑스 정
부는 대규모 식민지 전시회를 열어 앙코르를 선전했고, 명망 있다 하
는 사람들치고 이곳을 보러오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이곳 입
구에 늘어서 있던 유럽 자동차의 행렬을 찍은 흑백 사진을 본 적 있
다. 이후 10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 역시 그들과 똑같은 코스로 이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앙코르를 여행하면서 택하게
되는 짧은 코스, 긴 코스, 그밖에 이를테면, 일몰은 프놈바켕에서 보는
게 좋다는 식의 소소한 여행 상식, 타프롬의 높은 인기도, 정형화되어
있는 순례 양식, 심지어는 사진이 잘 나오기로 소문난 위치 등등, 이곳
에 차려진 상품들의 목록은 흡사 다양하고 화려한 만찬 메뉴와도 같
다. 그렇다면.. 과연 '관광학'이라는 것이 성립할 법하지 않나, 하는 생
각에도 이르게 된다.
자, 요컨대 나는 오리엔탈리즘 비스무리한, 전도된 정서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그러면서 경미한 분열증을 겪었지만 곧 그러한 정서를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여행자로서의 나는 습관적으로 서구적인 정서
에 나를 의탁해 왔기 때문에 그러한 정서를 거역하는 것 자체가 스트
레스다. 우연히도 이번 여행지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프랑스 식민지였
고 덕분에 내 정서는 작년 프랑스 여행에서 느꼈던 객수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본 여행기에 표출된 주관성의 상당 부분은 이 점
에서 유래할 확률이 높다. 어쨌거나.. 프랑스 정원을 산책하는 기분, 그
것은 내가 받아들일 만한 괜찮은 기분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그들은 두
려움 많은 여행자, 무능한 여행자를 정글 안에까지 끌고 와서 돌덩이
앞에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12세기 전후 실재했다 사라져 버린 미스
테리한 왕조의 유산 앞에 세워놓은 것이다.
아, 바욘 사원에 둥둥 떠다니는 저 4면 부조들을 뭐라고 표현할까.
동서남북 사방을 바라보고 있는 석조 인면상들이 50개에 달하는 탑마
다 조각되어 있는 그 형상은 뭐랄까, 효수된 모가지들마냥 허공중에
떠 있었다. 오전에 보았기 망정이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을 때 이
사원에 머문다고 상상하면 그것은 정녕 악몽이다. 인면상의 미소에 대
해선 해석이 구구한 모양이다. 자비의 미소라느니.. 그런 틀에 박힌 말
들이 있다. 글쎄.. 나는 그, 얼추 이백 개 돼 보이는 얼굴들이 사방에서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그 인면상들을 심미적으로 바라볼 능력이
나 기력이 내겐 없었다. 압도당한 나머지 그저 이곳은 굉장하군, 정말
굉장해.. 이런 생각밖에 없었다.
성스러움보다는 불가해한 마성이 지배하는 곳. 이곳은 에스에프의
세계였으며 엽기적인 조형 공간이었다. 저런 걸 저 위치에다 저렇게나
여러 개를 만들어 놓다니.. 크메르 민족은 정말 엽기적인 인종들이었던
것이다.. 뭐 불교적인, 혹은 힌두신앙의 이념이 어떠했든 간에 말이다..
인면부조상들의 시선과 미소에 포위당한 채 수많은 회랑과 보조회랑의
미로를 헤매는 동안 서 있는 각도와 위치에 따라 양달과 응달이 부지
런히 교차되고 있었다.. 어떤가, 매혹적이지 않은가요? 친한 친구들이
이 여행기를 읽고 계신다면 이곳에 한번 가보시라고 강력히 권하고 싶
습니다..
다섯 기의 파인애플같이 생긴 탑들로 이루어진 3층짜리 중앙 사원
앙코르와트. 실은 엽기적이긴 이 앙코르와트도 바욘 사원에 버금 간다.
파인애플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 실제로 앙코르와트의 그 유명한 탑의
형상이 파인애플같이 생겼다고 표현한 고고학자가 있었다. 덕분에 신
성을 모독했다고 욕을 먹었다는 일화가 책에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이곳에 들어와 있다 보면 이 사원 자체가 신성모독이라는 느낌이 너무
나 강하게 온다. 신을 찬미하는 사원이 설마 이렇게 생겼을까.. 그럴
리가 없다. 파인애플이면 어떻고 제길, 코코넛이면 어떤가.. 그런 장난
스럽고 심미적인 유머 감각만이 이 사원들이 뿜어내는 악마적 기운에
저항하는 길인 것도 같다.
너비 100여 미터에 이르는 해자가 앙코르와트를 둘러싸고 있다. 우
리는 연결로를 건넌다. 이 다리를 가리켜 지상에서 하늘로 가는 길이
라고 한다. 나는 왕이 올라다녔다는 70도 경사의 계단을, 벌벌 떨며 올
라갔다. 삼중 사원이라 똑같은 계단을 세 번이나 올라갔다. 무서워 죽
는 줄 알았다.. 내가 겁 많은 건 친구들이 다 안다. 언젠가 영희가 해
준 말이 기억난다. 주향아, 너의 몸을 믿어봐. 내가 겁이 많은 건 몸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나의 눈이다. 나는 시각적인
것들에 늘 사로잡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다. 나는 내가 신앙에
서 멀어져 간 근본적인 이유를 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살아서 올라갔다가 살아서 내려왔다. 민폐를 끼치며.
수직의 고공 체험이 있고 난 후엔 수평의 체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이 내 취향이다. 앙코르와트의 한 변은 1.5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
다. 일종의 대형 몰이다. 보드를 타고 다니면 딱 좋을 그런 기나긴 회
랑의 연속. 돌덩어리들의 무거운 침묵 안에 갇혀 있던 그 이상한 오
후.. 앙코르와트 내벽엔 정교하게 조각된 수많은 힌두 아이콘들의 부조
가 늘어서 있었다. 비슈누, 압사라와 같은 아이콘들이 끝없이 나타났고
'유액의 바다 휘젓기'라는 제목이 붙은 화려한 부조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지만..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난 그것이 재미없었
다. 그 대신 소실점에 이르도록 머나먼 회랑 사이를 걸어다니는 기분
이 그만이었다. 테라스에 드문드문 서있는 망고나무와 종려나무들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저 깊은 사원 안에, 성소에 있다는 느낌만이 나를
채웠다.
그리고 타프롬의 나무들. 엄청난 생장력으로 사원을 휘감고 돌덩이
를 쪼개어 제 뿌리를 내리고야 만 그 나무들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
나무는 허연 엿이 녹아 흐르다가 순식간에 응고된 형상을 하고 있었
다. 누구는 낙지발같다고도 하였다. 일찍이 나는 김영하씨의 <당신의
나무>를 읽고 왔기 때문에 그 소설의 암시에 깊숙이 걸려있었는데 타
프롬에 와서 정말이지 그 작품을 써 내려간 작가의 정서를 십분 이해
하고 말았다. 그악스러운 나무뿌리와 돌로 된 사원이 뒤엉켜 뭐가 나
무고 뭐가 돌인지조차 구분이 안 갈 지경의, 그 괴기한 물체는, 파괴를
넘어 공존과 상생으로.. 뭐 이런 방향의 문학적 영감을 충분히 자극할
법했다. 이승에서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형상이었다. 타프롬은 야생
의 채석장이었으며.. 진짜 고색창연한 페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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