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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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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앙코르의 깊은 사원에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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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잔상
피라미드나 그랜드캐년에 다녀온 사람의 눈에 앙코르 유적은 상대적
으로 스펙터클이 떨어질 수도 있을까.. 그런 느낌도 가능하다. 실제로
앙코르 유적은 프랑스 제국주의의 호들갑 덕택에 관광상품으로 과대평
가되어 온 감도 있다. 일단 피라미드나 그랜드캐년에 가보지 못한 나
로서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피라미드는 피라미드고 그랜드캐년은
그랜드캐년이며 앙코르는 앙코르인 것 같다. 사막을 배경으로 한 거대
한 기하학적 구조물, 북미대륙의 협곡, 비의로 가득찬 정글 사원. 이것
들은 다 다른 것들이다. 우리는 자신이 서 있는 곳, 대면하고 있는 곳
에 도취될 권리가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이즈'에 대한 컴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었던 기회로 이 여행을 정리한다. 무슨 [고질라] 영화의
홍보 문구마냥 사이즈는 내게 관건이었다. 언제나 큰 것을 보고 싶었
다. 앙코르는 그런 나를 만족시켜 주었다.
여행기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이상의 모든 것들이 느리고 우아하게
내 안에 퇴적되어 감을 느낀다. 세월이 더 흐른 후 끝내 화석으로 남
을 잔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곳에 다녀간 수많은 여행객들의 경우
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를테면 바욘 사원과 더불어 마지막
순례지였던 타프롬의 잔상은 퍽 오래 남을 것 같다. 그곳의 식물은 강
인했다.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강인했다. 또한 탐욕스러웠다. 누가 신
록을 예찬하고 나무가 아름답다 했는가..
그런가 하면 돌들은.. 폐허의 돌들이 으레 그럴 테지만.. 꽤나 사색적
인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리스의 폐허에 굴러다니는 돌들은 아마도
흰색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돌은 검다. 이곳 건축물들은 그 옛날의
영화로운 황금 장식이 다 벗겨져 나간, 혹은 뜯겨 나간 이후 바스러져
가는 사암의 아슬아슬한 집적체들이다. 그리스 폐허의 돌들이 희고 단
단한 모습으로 찬란하게 태양을 반사하며 영원을 희구한다면 이곳의
돌들은 어둡고 축축한 질감으로 오랜 세월 장엄하게 허물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훨씬 역동적이지 않은가.. 아마도 몇 마리의 짐승들이
이 안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불길하게 어슬렁거리며.. 액세서리같이..
오늘날의 우리들처럼. 나는 이 모든 것이 조금 무서웠다.
5. 호치민 공항에서 만난 사람
호치민 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약 5시간 정
도를 죽치고 있을 때, 우리는 지친 몸을 가누기조차 힘겨운 상태에서
마지막 수다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박철수 감독이 내 시야에 잡힌
것은 그때였다. 그는, 우리와 한 팀이 되어 동행한 모 스포츠 신문 기
자와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커먼 턱수염을 기르고 두
꺼운 검정테 안경을 쓴 캐주얼한 차림의 아저씨를 보는 순간, 씨네21
을 쓸데없이 열심히 읽고 보아 온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나날
이 주접도 좋아져서, 어, 박철수 감독님이시네요.. 하고 붙임성있게 다
가갔는데 또 그쪽은 그쪽대로 어, 많이 보던 분이네, 식사라도 같이 합
시다.. 뭐 이러신다. 대체 어디서 날 봤단 말인가, 의아해하며 나는, 어,
저는 아무 것도 아닌데요.. 하며 넘어갔던 것인데..
탑승을 하고 보니 또 바로 앞자리에 앉아 계신다. 촬영감독을 비롯,
몇몇 스탭과 동행하여 사이공과 캄보디아를 찾았던 모양이다. 사연인
즉슨 박철수 감독은 과거 월남전에 참전했었다고 한다. 그때 알았던
누군가를.. 아마도 여자이지 싶은데.. 찾으러 간 거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반사적으로, [쓰리시즌]의 하비 케이틀이 생각났다. 하비 케이틀
은 결국 베트남에 와서 자기 딸을 찾는다. 그런데 박철수 감독은 만나
고 싶었던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조만간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사인을 청할까 하다가, 뭐 이 나이에 유치하게 사인이냐, 하고
그만두려고 했다. 그런데 감독님 입장에서 좀 섭섭하지 않겠냐, 걱정이
되어, 이륙 후에 조용히 메모장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아주 친절한, 다
음과 같은 사인을 남겨주셨다. '김주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화 좋
아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영화감독 박철수/ 2000.12. 28/
-SAIGON-' 또 본인의 새 작품을 공짜로 볼 수 있는 시사회관람권도
한 장 주셨다.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접시꽃 당신] [안개기둥] 같은 초기작에서부터 [학생부군신위]
와 [삼공일 삼공이]까지 잘 챙겨봤으며 안타깝게도 최근작은 못 봤다
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좀더 성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
뜯으며 박철수 감독에 대한 그밖의 데이터를 뒤져보았다. [어미]가 그
렇게 훌륭했다는데 못 봤고 [산부인과] 얘기하기는 좀 민망했고.. 저,
게릴라식으로 영화를 찍으신다고 들었어요, 랄지, 감독님 편집감각을
좋아해요.. 요따위 대사를 속으로 읊어보다가 다 관뒀다. 어쨌든 재미
있는 사건이었다.
6. 끝
그럭저럭 정신이 들고 보니 서울이었다. 여행에서 얻은 게 무어냐고
묻지 말자. 뭘 얻으려고 여행하지 않는다. 여행으로 달라지는 건 정말
없다, 는 게 내 생각이다. 머나먼 사원 안에서도 나는, 내가 놓고 온
일들로 이런저런 번뇌가 가시지 않았다. 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와 보
니 서울도 변함이 없다, 예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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