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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여행기] 사건과 영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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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초 추석명절에 다녀온 [홍콩 여행기] - 2001. 10. 27 -
1. 출발
남편은 교통사고때 부서진 왼무릎 슬개골에
철심을 하나 박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일 년 반만에 그 철심을 뽑는 수술을 하던 지난 여름,
우리 가족은 휴가를 못 갔습니다.
그때 못 간 휴가를 10월초 연휴기간에 다녀왔죠.
홍콩이었고.. 물론, 제가 졸랐어요..
출국할 때 남편 여권에 약간의 문제가 있음이 발견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결정이었고 가볍게 다녀오자 생각했기에
여권을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었어요.
남편 여권은 관용 여권이었는데.. 출발 당일날 기준으로
여권 만료일이 한 달이 채 안 남은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럼.. 안 된다나 봐요..
관광 목적으로 이박삼일 체류 예정에다 단체 입국이니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들 했지만
미 테러 사태 발발 직후라 국제 정세가 경직되어 있고
아다시피.. 죄 없는 사람조차 죄인처럼 쫄아들게 만드는 것이
공항 출입국 심사대의 그 싸늘하고 엄중한 분위기고 보면..
아니나 다를까, 아시아나에서 수속을 하는데, 담당 여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홍콩 현지에서 입국을 거부할 경우
군소리없이 돌아온다는 내용의 서약서까지 쓰게 하는 것이었어요..
의례적인 절차인 듯했지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니
어처구니가 없고 다리에 힘이 쪼옥 빠졌습니다.
남편은 업무 관계로 혼자 해외출장 몇 번 나갔었고..
저 또한 비록 손꼽을 정도이긴 해도 늘 혼자서 나갔었고..
이래 따로 노는 게 저희 집안의 미풍양속(?)이었거든요.. 해서?
모처럼 아드님까지 하여 식구가 함께 떠나게 된 이번 해외여행이
대단히 감격적인 집안 행사였던 셈인데..
이런 어이없는 사유로 한 사람이, 그것도 가장이
비행기값만 축내고 여행지를 밟아보지도 못한 채 돌아간다면
이 어찌 쪽팔리는 사태 아니란 말인가..
그때부터 세 시간여의 비행과
홍콩 쳅락콕(발음이 맞는지) 공항의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기까지..
퍽 우울하고 심란했습니다.
남편은, 자기가 허탕치고 돌아가면 아이랑 구경 잘하고 오라고,
자기는 홍콩 세 번이나 갔었기에 볼 것도 없다고
넉살스럽게 말하고 있었지만.. 눈치를 보니
이 사람 역시 속으로는 쫄아있는 것 같았어요.
내가 아는 이 사람은 간이 매우 작은 사람이지요.
우리 둘다, 간의 크기는 거의 비슷하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아, 이 와중에 저는 각종 할리우드 첩보액션물을
떠올렸더랬습니다. 이를테면 설정만 보자면 [트루라이즈] 같은..
요컨대 잠시, 남편이 혹, 내가 모르는 국제스파이, 적어도
은행원을 가장하고 암약하는 국가안전요원, 같은 게 아닐까 상상했죠.
아니면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이던가에 나오던
그 전업 테러리스트 같은 존재 아닐까..
뭐, 공항의 모든 관계자가 이 사람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 또한 믿을 수 없는 남자로 느껴졌는지 원..
그런데.. 그렇게 보기 시작하니 또 그렇게 보이는 거에요..
곰곰 생각해 보니 남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더라구요..
그렇지 않습니까, 남편과 아내 사이란 게..
결국 아는 것만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닙니까..
새삼스럽지만.. 그는 내게, 없어선 안 될 절대적 타인, 인 것입니다.
2. 낙하
10월1일 일요일자 홍콩 동방신문 1면의 헤드 기사는
수십 층 건물 위에서 낙하한 생수병이
건물에 돌출된 두께 8센티 유리지붕을 산산조각내는 바람에,
마침 그 지붕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관광객들이
유리 파편에 부상을 입었다, 는 사건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기사 옆에는 배낭여행중이던 한 여대생이 머리에 피를 흘린 채
공포에 사로잡혀 소리지르고 있는 모습, 그리고
119가 올 때까지 그 여대생을 껴안고 진정시키고 있던 한 한국인 가이드,
피투성이 범벅이된 그 가이드의 흰 옷, 겁에 질려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던 관광객, 들의 사진 몇 장이 실려 있었구요.
그 사건의 현장에 저희 식구도 있었죠.
내 참.. 누가 홍콩 아니랄까 봐.. 영화같은 일이었어요..
문제의 여대생은 우리 팀 바로 뒤에 줄 서 있던 한국인 배낭여행객이었으며
여대생을 보호하고 있던 한국여자는 우리 팀 가이드였습니다.
첫날 홍콩섬의 이런저런 관광지를 돌고
빅토리아산정에서 트램을 타고 막 지상에 당도한 우리는
밤의 도시를 돌아보려는 계획으로 이층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어요.
그때 사건이 터진 거죠.
돌연 무슨 폭발물 터지는 소리와 함께 외마디 비명이 연이어 들렸고
돌아보니 바로 내가 10초 전에 머리 위로 통과해 온 유리지붕이
땅바닥에 산산조각나 어지럽게 쌓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종 테러인가..
진상을 알고 보니 수십 층 높이에서 누군가 생수병을 던진 것이었죠.
그것이 낙하 가속도에 의해 유리지붕을 박살냈고
마침 그 순간에 지붕 아래를 통과하던 여대생 한 명이
직통으로 파편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사건이 터진 후 불과 5분만에 119가 도착하고
경찰, 신문사, 방송국 등지에서 총출동하여 사진 찍고 취재하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뒤숭숭한 세계 정세 속에서
홍콩이라는 국제도시에서 맞은 첫날밤은 그렇게 흉흉한 것이었네요.
다행히 문제의 여대생은 중상은 아닌 것 같았으나
모두들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층버스고 야시장이고 밤거리고 간에
일정 취소 후, 10시도 되기 전에 숙소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잠자리에서 누구나 생각했겠죠.
재수없으면 내가 저 피투성이 부상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더 재수없으면 이국땅에서 초상 치를 뻔했다..
다음 날 대화해 보니 과연, 악몽을 꾼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참, 우리가 산다는 게.. 살고 싶어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싫어 그만 둘 수 있거나 그만 두어지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지금 살아있는 게 내 의지에 달린 문제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인식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조금 정신이 든 후 영화 한 편이 떠올랐는데..
키에슬롭스키의 [레드]였군요.
은퇴한 노판사와 패션모델 간의 기묘한 관계를 통해
생의 부조리함과 불가해함을 조용히 말하던 그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은,
비행기인지 선박인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간 수많은 인명 피해와 부상 피해를 낸 불의의 참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렌 야곱을 노판사가 텔레비전 뉴스 장면을 통해
확인하는 장면이었.. 던 것 같습니다..
왜 그 영화, 그 장면이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영화 전체에 드리워진 비극적 세계관 같은 것.. 이
이상하게도 지금에 와서야 실감이 나요..
딱히 홍콩에서 맞은 그 밤이 연상의 계기였을 테지만..
돌이켜 보건대 키에슬롭스키의 영화들..
그의 도시, 그의 색감, 그의 채광, 그의 이미지들은
언제나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침울하고 쓸쓸했기에
보고 나면 무거운 추가 하나 몸에 달린 듯했죠.
그러면서 저는.. 생전의 키에슬롭스키가 늘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려낸 이미지들의 갈피갈피에 흐르는,
문명화된 유럽사회가 직면한 정신적 공황, 인간소외 같은 것을,
적어도 그 시기엔, 또 그 나이엔
제대로 소화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적어도 그 당시
키에슬롭스키 작품에 대한 뼈속 깊은 이해라든가
그의 그 내과의적인 성찰적 시선에 대한 진정한 공감은
서구 비평가들의 몫이란 생각이 들었고..
따라서 저는 [십계] 연작 포함,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나
삼색 시리즈 개봉과 더불어 쏟아져 나온
우리 나라 영화계 인사들의, 키에슬롭스키 예찬을
무작정 신뢰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영화가 가진 힘은 이렇게 커지고 있습니다..
갈피갈피에 흐르던 정서를 이젠 조금씩 이해할 것 같은 느낌 아닙니까.
이것이.. 결단코 행복한 일은 아닐 테죠.
키에슬롭스키 영화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는 것,
즉 그의 영화에서 이미지 아래의 것들까지 받아들인다는 것,
이것은 대단히 우울하고 착잡한, 어떤
문명사적 경험에 동참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3. 또 낙하
생수병 추락 사건이 1면 헤드라인으로 실리던 그날 신문의
같은 면엔 그 사건 말고도 두 개의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실연 당한 남자가 고층 건물 꼭대기에서 투신자살한 사건,
또 하나는 상점 간판이 떨어지는 바람에
지나가던 행인이 머리를 맞고 부상당한 사건.
일단.. 이 신문은 대체 어떤 성향의 신문이길래
1면 기사가 이런 사건으로 도배되는가, 하는 의문은 제쳐두고라도..
기가 막히더군요..
결국 그날 그 신문 1면에 실린 세 개의 사건 모두가
뭔가의 추락 내지는 낙하가 초래한 사건들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 사건들의 이미지는
참으로 홍콩답다고 생각되는 거에요..
투신자살은 그렇다 치고 간판 추락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재미난 것이.. 홍콩의 상점 간판들은
우리처럼 부조로만 박혀있는 게 아니라
마치 도로표지판처럼 온통 공중에 입체적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무슨 편물처럼 가로세로 교직된 간판들..
그 수평과 수직의 무수한 입체교차,
이것이 만들어내는 특색있는 도시 조형 공간.
홍콩 시가지를 돌며 접하는 가장 인상적인 비주얼이라면
바로 이, 도로 주행시, 또는 도보시 끊임없이 이마빡에 맞부닥쳐 오는
초록과 빨강과 노랑들로 이루어진 호화로운 상점 간판들이라
할 수 있으며.. 제가 확실히 예습하고 간 홍콩의 이미지,
또 가서 느끼고 싶었던 1순위 이미지 역시 이것이긴 했어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에서 얼핏 선보인 그 짧고도 강렬한
총격전의 배경으로서의 홍콩 거리, 기억하시는지요..
그 면밀한 묘사는 이같은 홍콩의 이미지를
무서울 정도로 정확히 재생했더랬죠.
어쨌거나 홍콩 시내에 지천으로 널린 간판들을
머리 위로 휙휙 지나보내면서..
폐소공포를 경험하는 건 불가피했고
특히.. 앞서의 생수병 추락 사건 때문에..
뭔가가 낙하해서 두개골을 박살낼 것 같은 불안감에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홍콩에선
한 해에 한두 번씩은 간판이 떨어져
행인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해요.
덕택에 스릴 넘치는, 정말 이상한 고장이었습니다..
4. 낙하의 절정
그러나 역시.. '낙하'라는 이번 여행 테마의
하일라이트요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마지막날의 불꽃놀이 아니었나 싶군요..
여행 첫날인 추석 명절의 다음 날은,
마침 중국 정부 성립 기념일이었고.. 그날 저녁
이를 기념하기 위한 대대적인 불꽃놀이가 벌어졌던 것이고
운 좋게 우리는 이것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불꽃놀이.. 낙하 혹은 추락의 이미지 맞죠?
아아, 홍콩.. 대단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고공에서 뭔가를 떨구고 마는군요..
불꽃놀이를 본 곳은
홍콩섬이 건너다 보이는 침사추이의 끝,
페리 타는 부근이었습니다.
불꽃놀이 옆에서 볼까 앞에서 볼까, 하고 물었을 때
다들, 페닌술라 호텔 앞이 적소라고들 했지만
이미 교통은 두절 상태였고
거대한 인파에 휩쓸려 최대한 전진한 지점이
바로 그곳이었군요.
연중 최대의 명절연휴를 맞아 영국 아닌 중국 정부가 주최한,
일종의 전시효과를 노린 불꽃놀이였는지
시간적으로나 사용된 폭죽의 양으로나
홍콩에서 이만큼 무지막지한 불꽃놀이는 처음이었다는
현지인의 증언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마치
베트남전때 정글에 투하되던 네이팜탄처럼 무자비하고 격렬한,
뭐랄까, 아름다움 이전에, 지독히도 무식한 불꽃놀이였습니다..
현지인들도 많았지만 관광객이 태반이었던 그곳의 그 시간,
인종과 국적과 언어는 다를지언정
똑같이 탄성을 내지르고 똑같이 손뼉치던 그 시간,
적어도 그 20분 동안만은, 인류는 하나였다, 고 느꼈고..
천공의 중심으로 기운차게 솟구쳤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보석의 파편들처럼
광채 영롱히 부서져 내리는 그 불꽃들이
내 눈동자 안에, 내 가슴에 화르륵 쏟아져 들어올 때마다
까닭 모를 눈물이 솟았습니다.
오늘 밤 별빛은 찬란하여라.. [금야성광찬란]!
임청하가 주연했던 오래전 허안화 감독의 영화였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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