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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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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캄보디아 여행기] 사이공의 하늘과 땅-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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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터널
80년대 학번인 우리들로 말할 것 같으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으
면서 대학 생활을 시작한 세대다. 우리들 중 절반은 민주화운동에 참
여했거나 약간 몸을 담갔으며, 한두 명은 지금도 교육운동가이다. 우리
는 대체로, 사회주의에 대한 다소 어설프고 막연하며 빛바랜 동경을
갖고 있다.
첫날 구찌 터널을 방문한 우리는 미군 폭격기에 움푹 패인 구덩이
같은 것을 보았다. 베트콩이 정글 속에 파묻어 놓은 창조적인 지뢰들
도 있었다. 코브라 독을 발라놓은 죽창이 몸을 아작내 버리는 살인지
뢰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나서 베트남인들의 체구에 맞게 건설된 악명
높은 베트콩의 유격참호 속에 직접 들어가 보았다. 두더지처럼, 허리를
구부리고 무릎으로 기어야 통과할 수 있는 터널이었다. 겨우 두 개의
터널을 통과하고서 우리는 녹초가 되었다. 무더위 속에 동굴을 기어다
닌 나머지 살이 한 2킬로는 빠졌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따뜻한 차를 대접 받았다. 콰이메라는 이름의 고
구마 비슷한 음식도 맛보았다. 전쟁 당시 베트콩들이 먹던 구황작물
인 것 같았다. 사실 이런 오지체험식 여행은 왠지 낭만이 없다. 패키지
코스다운 지나치게 전형적인 프로그램이라 매력이 없다. 어쨌든.. 사우
나라도 다녀온 듯 몸과 마음은 맑아졌다. 역시 스포츠는 좋다..
실은 나는.. 이 코스가 요구하고 있는 듯한 모종의 교육적 의도를 사
양하고 싶었다. 여행길에 들어서면 나는 일종의 무정부주의적 정서로
나 자신을 가누고자 한다. 프랑스에 갔을 때도 프랑스를 지워버리려고
노력했다. '프랑스'라는 단어는 내가 감당키엔 너무 크게 느껴졌고 무
엇보다도.. 거품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파리라는, 마르세유라는, 엑
상프로방스라는 한 도시들이 한 점들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번 여행에
서도 핵심은 베트남이 아니라 사이공이었고 캄보디아가 아니라 앙코르
유적군이었다. 난 여행 중에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체라든가 역사를,
과도하게 염두에 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구속할 것이라고 생
각했기 때문이다. 고로 베트콩 유격 참호였다는 구찌 터널 같은 곳은
도대체 탐탁치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시니컬해져 있었다. 그런데 이
코스는.. 이같은 내 의식이나 의지와 무관하게 곧 효능을 발휘하게 된
다.
6. 사이공의 학교
우리 중 누군가의 발의로 사이공의 학교를 견학하게 되었다. 이는
예정에 없던 코스였다. 마침,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공부한 바 있으며
한국어를 잘하시는 현지인 가이드분께서 애써 주셔서 자그마한 초등학
교를 방문할 수 있었다. 아오자이를 입은 여교사들은 피로해 보였다.
예쁘고 선한 눈엔 경계심이 일고 있었다.
막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교실을 우리는 수줍게 들여다 보았다. 그
도 그럴 것이 우리에겐.. 과연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미안함
이 앞섰으니까. 정식으로 취재 온 무슨 방송국 직원이나 기자도 아닌
주제에.. 일개 관광객들이.. 아무리 교사라지만, 수업중인 교실을 들여
다 보다니.. 입장 바꿔, 우리가 수업하고 있는 교실에 외국 관광객들이
구경 좀 하겠노라며 우르르 몰려오기라도 했으면.. 말하나마나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런 미안함을 안고 어느 교실에 들어섰다. 그랬더니.. 아아, 한 30명
정도? 초등학교 1, 2학년쯤 돼 보이는 어린이들의 눈망울이 일제히 우
리를 향해오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들은 너무나 작았으며 그 아이들
의 눈망울은 너무나 초롱하였다. 우리는 어쩔 줄을 몰랐다. 제각기 그
들의 눈길을 외면하며 벽이나 책상이나 이런 데를 바라보면서 솟아나
는 눈물을 감추기 바빴다.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그때 우리의 '정신적 지주'인 용현이가 어색한 분위기를 정돈하며 즉
석에서 인사말을 시작했다. 현지인 가이드분에게 통역을 부탁하고 즉
석으로, 그야말로 임기응변으로. 아무나 못할 일이었다.. 용현이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린 그걸 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한국
에서 온 교사들입니다. 과거에 여러분의 나라와 우리 나라는 사이가
안 좋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나라를 존경합니
다.. 대강 이런 내용의 말이 용현이의 우렁차고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교실에 울려퍼졌다.. 나는 감정이 북받친 나머지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
왔던 것 같다. 부끄러워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내 친구들도 비슷했으리
라 생각한다.
사실 이날의 에피소드는 절반은 넌센스였다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
다. 우리의 감정을 순진하게 투사시킨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
각한다. 물론.. 이 나라는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세계 유일의 국가
이며 인간적인 사회주의를 이룩한 나라로 알려져 있다. 통일을 이끈
지도자 호치민은 도덕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었다. 말할 나위 없이, 그
들은 대단하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민족적 자부심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다. 또 어린이들은
한없이 순진하다. 우리는 이런 사항들에 충분히 가치부여를 할 수 있
고, 연민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베트남은 그냥 베트남이다. 태국이 그냥 태
국이고 대만이 그냥 대만이듯이.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에선 상당한 패
권을 행사하고 있는 나라이고 그 나름으로 몹시 공격적인 나라이기도
하다. 반미는 반미였고, 현재 미국과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적어도 이 나라의 공식 입장이라고 한다. 국제적으로 보면 베트
남 역시 철저히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많고 많은 국가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도 충분히, 필요한 만큼 약다.
그리고 이 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우리가 베트남이란 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정서일 것이다. 물론 그것조차 세대별로 다르겠지만.. 예컨대 50대 이
후는 베트남 참전 경험, 이른바 386세대는 반미 감정과 관련한, 참전에
대한 죄의식, 그중에서도 좌파라면 가질 법한 베트남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 이런 식이겠다.
글쎄.. 국가 단위로 부여하는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 베트남
사람들 개개인이 처한 복지 현실이 아닐까 싶다. 그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들 개개인의 행복지수이고. 그런데 이같은 문제는 단순
비교나 피상적인 측정을 불허하는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우
리가 줄 만한 시선은 상대적인 시선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 편이 예
의라고 생각한다.
사이공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역시 세상 어디에나 있는 아이들이었
다. 물론 너무 잘 먹어 포동포동한 아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네
초등학교에서 흔히 발견되는 엽기적으로 되바라진 아이들도 눈씻고 찾
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어쩌면 그 아이들의
표정과 모습은 서울 교육 현장에서 13년을 교사로서 굴러오는 동안 많
이 절망하고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꿈꾸었으되 오래 전에 잊혀져 간,
교실 풍경에 대한 어떤 그리운 심상을 일깨웠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이 지경으로 감상적일 수 있었던 것이, 순수 이데올로기에 사로
잡힌 결과이거나, 구찌 터널 견학의 의도하지 않았던 후유증 탓이라고
생각되었다. 아니면, 장예모 감독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 같은 영화
를 너무 열심히 보고 온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날 우리 내부에서 솟구쳐 올랐던 감정을 쉽게 잊
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태, 그 순간만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으
므로. 우리는 귀국하자마자 여행사를 통해 그 학교에 학용품을 보내주
기로 했다. 그 학교가, 그 학교 선생들이, 또 그 학교 학생들이 진정으
로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눈물도 아니요, 미안함도 아니요, 집단 죄
의식도 아니요, 당장 쓸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일 테니까.
7. 사이공, 쌀국수, 검은 강물, 배들
사이공 시내는 부릉부릉 오토바이의 쇄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운전
자들은 대개가 무표정한 얼굴에 복면을 쓰고 있는데 온종일 이 광경을
보다보니 이 패션은 제법 매력있다. 나도 그렇게 차리고 달려보고 싶
었다. 사이공시는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프랑스 도시의 거리와 흡
사했다. 길이 뻗어 있는 형태, 길 이름을 달아놓은 양식, 까페 거리, 가
로수들, 공원의 조경 상태.. 모두가 그랬다. 도시 설계의 원리가 같았던
모양이다. 사이공 시내 한가운데는 노트르담 사원이 있는데 사원의 형
태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조형 공간까지 파리 시내의 그것들과 비슷했
다. 다만 성당의 사이즈가 작고 색상이나 조각 상태가 어딘지 모르게
조악하다는 차이가 있었다. 원본과의 차이는 확실히 해두어야 했나 보
다. 성당뿐 아니라 우체국이나 주요 관청 건물 등이 그런 식이었다. 그
런 건물, 그런 길이 나는 참 아름다웠다. 식민지의 도시는 다 아름답
다. 슬프고 아름다운 법이다.
차창 밖으론 나무와 건물, 사람뿐만 아니라 알파벳에 이러저런 부가
기호들이 첨가된 베트남 문자들도 휙휙 지나갔다. 까페 안엔 낡은 해
먹이 보였고 사람들은 권태로워 보였다. 그 안에서 진하고 새까만 커
피를 팔고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민예품 가게에 들렀을 때 친구들이
이것저것 쇼핑을 했다. 밤이었다. 흰칠이 되어 있는 가게 외벽에 귀여
운 도마뱀들이 붙어 있었다. 그 앞에 서 있는 나를 미선이가 사진찍어
주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쌀국수를 먹었다. 서울에서도 먹어본 적 있지만
참 맛있었다. 맑은 쇠고기 국물에 선하게 생긴 흰 면발이 푹 삶아져
있었다. 그렇지 않은가. 밀가루는 얄밉고 쌀은 선하다. 먼저 라임즙을
뿌려 기름 냄새를 제거하고 신선한 숙주와 주황색, 혹은 녹색이 감도
는 이런저런 채소들을 넣고 베트남 요리 특유의 강하고 새콤한 향신료
가 가미된 소스를 첨가하여 홀홀 먹었다. 음식은 국제이해교육의 효과
적인 수단이다.
시엠립으로 떠나기 전날 밤 우리는 사이공강의 유람선에서 강바람을
쐬었다. 도시는 더럽지만 밤은 아름답다. 밤은 모든 걸 덮어주기 때문
이다. 재미있게도 콘테이너 선박이 도심의 강에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선상에서 거대한 선박의 행렬을 구경했다. 저 배가 움직이는지 내가
탄 배가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느릿느릿한 항해가 이어졌
고 우리는 몇 척의 배와 스쳐갔다. We're two ships that pass in the
night.. 그렇다, 그 배들은 인천항에 정박해 있던 아빠가 타던 배같이
생겼다. 나는 선장의 딸이었다.. 하긴 모두가 다 누구누구의 딸들이다.
목수의 딸, 군인의 딸, 학자의 딸..
한밤 사이공의 검은 강물 위에 소리 없이 떠있는 배들 곁에서 친구
들과 나눈 담소는 참으로 아늑한 것이었다. 텅 비고 우묵한 밤이여, 모
든 것이 귀기울이는 밤이여. 너의 돛단배 위에 우리를 태워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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