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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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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행기] 파리, 그 거품을 걷어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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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그 거품을 걷어내며 - 1999. 7. 13 -
1.
대학 시절, 불문과나 불어과 여대생들의 분위기가 싫었다. 여
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차적으로 그애들이 너무 예뻐서
샘이 났던 것 같다. 타고나기를 예쁜 아이들이 유난히 불문과에
잘 들어가는지 어떤지 통계야 알 수 없고, 그 '예쁘다'는 것이
이목구비 잘 생긴 결과인지 아니면 잘 꾸민 결과인지 늘 헛갈리
는 내 눈에, 좌우지간 불문과엔 예쁜 애들이 많았다. 조금 다듬
어 말하자면, 그 아이들이 단순히 예쁘다는 사실보다는 자기가
예쁜 줄 너무 잘 알고 있는 듯한 묘한 태도에 비위가 상했었다.
그들에겐 타인의 시선을 모으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시선을
처리하여 돌려보내는 상당히 정교한 연출 기제가 있는 것 같았
다. 이때 연출의 내용물은 당연히 파리지엔느의 이미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일부 여대생에 대한 인상일 뿐 일반화할 수
없는 얘기다. 불문과 다니던 은주 언니는 안 그랬다. 또 고등학
교때 불어 가르쳐주시던, 갓 대학 졸업하고 오신 젊은 여선생님
두 분도 그런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문과나 불어과에 다
니고 있거나 졸업한 그대가 화낼 일 아니다.
그런데.. 일부 불문과 여대생들에게 존재하던 그런 분위기의
진원은 세월이 꽤 흐른 아직까지도 궁금하다. 그런 연출 기제
(라고 명명하고 싶다, 나는)는 어디서 온 것일까. 아마도 어느
정도는, 뭔가 세련되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프랑스 이미지, 정
확히 말해 파리 이미지의 암시에 걸려든 결과로 생각된다. 왜
하필 남대생이 아니라 여대생인가, 하는 문제는 잠시 접어둔다.
잘 모르겠다. 편견일지 모르지만, 아니 편견이겠지만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외부에서 주어지는 암시에 민감하며, 남에게
보이는 부분에 대하여 섬세하게 신경 쓰는 측면이 있다는 사실
을 감안하여 설명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파리지엔느적인 분위기를 놓고 성을 낼 이유는 없어
보인다. 특히 그들 각각을 향해서는. 그런 분위기는 하나의 반응
양식에 불과하며, 반드시 자의식이 개입한 결과도 아니기 때문
이다. 그러나.. 지금보다 어렸을 때 나는 그들이 만들어 내는 공
기가 무조건 싫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공기는 사회과학적 인식
의 결여, 혹은 인식의 차단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그때와 똑같은 시각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세상의 정보들은 말할 필요 없고 라이프스
타일마저도 대중매체에 의해 기획되고 관리되는 사회에서 어차
피 그 일원으로 살아가며 사물의 지배적 이미지에 걸려들지 않
기란 어렵다. 그것은 거의 불가피하다. 우리는 '모두가 대중매체
의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하는 것들에 수시로 질문을 던지고 사회
를 관찰하며 자기를 돌아보며 현상을 분석하며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 곧 반성의 행위란 대단한 중노동인 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는 사람을 지
식인이라 불러도 좋을까. '변혁에의 의지', 뭐 이런 건 좀 낡아보
이고.. 오늘날 지식인의 개념을 구성하고자 할 때 그 무엇보다도
'대중조작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한 자격 요건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식인이라는 말이 싫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질
리 없는데다 어차피 일정한 기능을 담지하던 말을 폐기하는 것
보다야 잘 다듬어서 새로운 용도를 찾는 길이 바람직한 마당에
이런 의미 정도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말 나온 김에, 우리 주변에서 어떤사람들이 지식인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내 생각에 대학의 박사과정급 이상의 사람
들 정도라고 본다.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고 대체로 그렇다는
것이다. 개개인으로 보자면야 어디나 한심한 사례는 있기 마련..
학부생은 어떨까? 아니다. 석사급? 아닌 것 같다. 교사? 오호,
절대 아니다..
2.
요컨대 파리는 강력한 환상물이다. 비단 우리 나라 사람들만
그런 거 같진 않으나 어찌 됐든 파리의 환상이 워낙 크고 그 환
상의 영향력이 강하다 보니 우리는 파리에 대한 매혹의 어디까
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거품인지 잘 모른다. 이러한 불신감
탓에 언제부턴가 나는 파리를 꿈꾸는 자, 파리에 가고 싶어하는
자, 좀더 정확히 말해 파리에 대해 떠드는 자, 주로 파리를 예찬
하는 자들을 신중하게 관찰하는 버릇이 생기고 말았다. 파리물
을 먹은(어감이 이상하군, 차라리 빠리로 할 걸 그랬나) 자들의
발언에 불필요하게 묻어있는 파리의 찌꺼기(확실히 어감이 좋지
않다)를 적출하는 데 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파리물 먹은 자들 가운데 아마도 최대 난적은 파리에 유학갔
다 온 자들일 터이다. 어느 사회나 그렇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학문적 커리어란 곧 지식 권력과 직결되는 만큼 해외에서 공부
하고 온 자들의 저술과 발언을 대할 때는 세심한 주의와 분별력
이 요구된다.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는
불신과 경계심! 이것이, 학문적 성과가 곧바로 수혈되는 교육현
장에서 십여 년 간 굴러온 경험에 의거, 학자들, 그중에서도 해
외에서 공부해고 돌아온 학자들에 대해 내가 갖게 된 응어리진
관념이다.
사실 나는 불문학을 전공했거나 프랑스에서 공부한 사람들의
은혜를 많이 입은 편이다. 철든 후 나의 독서 세계를 지배한 것
은 대부분 그들의 번역으로 읽은 프랑스 문학이었고 우리말로
된 저술 가운데 나의 언어적 감수성을 일깨운 것은 시나 소설
이전에 주로 불문학자들이 일구어낸 비평적 문체들이었다. 그들
의 감식안이 서른 살 이후의 나를 키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소리없이 스며들어온 자유의 기운, 개인의
가치.. 어쩌면 이러한 정서적 영향력을 나 자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의식적으로 경계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내가 여자라 그런지 프랑스?유학 갔다 온 여성들에 대해
서는 좀더 엄격해진다. 너무 쫀쫀하여 밝히기 민망한 감이 있는
데.. 가령 나는 영화평론가 유지나씨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정란씨를 좋아하며 그들의 저술과 사회적 발언의 내용을 지지
하는 편이지만 몇 가지 치사한 이유로 그들에게 마음을 통째로
주지 못한다. 웃지 마시길.. 예컨대 그들의 화장이 언제나 짙어
보이는 데 대하여 사적으로, 어디까지나 주관적으로, 불편한 감
정을 갖고 있다. 아니 화장의 농도가 아니라 화장술의 세련도가
문제인데..
언론이라는 무소불위의 매개물 탓에 그들과 나의 참된 커뮤니
케이션이란 애초부터 글러먹은 것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지만,
왜 그들의 화장은 그렇게 세련돼 보이는가. 왜 맨 얼굴이 아닌
가. 왜 차라리 전투적 화장이 아닌가. 이도저도 아니라면 오정희
씨 화장같이 전형적인 아줌마 화장이면 안 되는가. 저 위에서
언급한 불문과 여대생들의 파리지엔느 이미지로부터 그들은 과
연 자유로운 여성들인지, 어느 정도 해방된 여성들인지, 물음을
그칠 수 없다. 적어도 그들 정도라면 극복했어야 하고 어떤 식
으로든 극복했음을 스타일 그 자체로 알려 주어야 할 부분이라
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책 표지에서 만나는 그들의 모
습이 혹 내가 모르는 새로운 극복 방식을 통과한 결과가 아닌
바에는.. (열 내다 보니 유지나씨는 이 성토에서 제외하고 싶다
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내게 말과 글로 깨우쳐준 인식의 새 영토
가, 일말의 소격효과도 주지 못하는, 주류적인, 참을 수 없이 주
류적인 그들의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다.. 나의 이런 유아
적 문제의식에 공감해 주는 휴머니스트와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
련하여 그들을 변호해 줄 페미니스트가 있었으면 한다. 전자가
여자이고 후자가 남자이면 좋으련만..
3.
그러나.. 이상의 얘기들에도 불구하고 곤혹스러운 것은 프랑스
의 거품이 그렇게 싫은 나 역시 그 거품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나 역시 프랑스와 파리의 거품 속에서 뒹굴고
미끄덩거리는 가운데, 그에 대한 환상의 씨앗을 만들고 환상의
열매를 키워 온 사람이다. 아니라고 우겨도 소용 없는 일이다.
보라, 당장 프랑스 타령을 하고 있지 않은가. 기어코 나도 한번
가보겠다고 설쳐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글이라는 소박한 반성 행위를 통하여 내게 묻어 있는 거
품을 걷어내고자 하나 아무리 깨끗이 헹구어내도 사라지지 않는
얼룩들은 존재한다, 환상의 얼룩들. 문제는 지워지지 않는 그 얼
룩들을 나 자신이 곱게 봐줄 수 있느냐, 곧 긍정할 수 있느냐일
것이다. 그 어떤 자기 검열에도 불구하고 난 내가 결국 환상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갈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심리적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준비된 말은 얼마
든지 있다. '나는 파리의 거품을 떨어내려고파리에 간다.' '파리
에 대한 환상을 말소하기 위해 파리로 간다.' 등등. 그러나.. 이
런 말은 멋있지만 비겁해 보인다. 어떤 대상에 환상을 갖고 있
다는 것은 죄가 아니다. 차라리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간다'
는 표현이 더 솔직해 보인다.
글쎄.. 이 모든 장황하고 구차한 변명의 수사법들과 이것들의
대척점에 있는 침묵의 경우조차도 그 심층엔 '파리를 알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는 진실이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 아닐까.. 그렇
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층의 더 아래 기저에는
'타인을알고 싶다, 이해하고 싶다'는 우리네 삶에서 흔히 관찰
되는, 아주아주 인간적인 요구가 존재하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리 여행의 방향을 이렇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파리 여행은 '파리'라는 '세계적인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파리'라는 '세계의 한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다. 즉, 파리를 지방
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파리는
유럽 대륙의 일부이자 거대한 세계 지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다. 파리건 서울이건 모두가 세계의 한 지방이다. '지방'이라는
개념은 대상을 전체 속에서 조망하게 해 주는 기특한 개념으로
서 대상을 절대화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
그러나 가능할 것인가. 한 지역의 지방 개념에 가장 충실해질
수 있는 여행 방식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장기체류이다. 한곳에
오래오래 머물며 살아볼 때에야 인류학적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
이다. 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다니고 같이 이야기하고.. 타인
을 이해하는 원리와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단기여행자는? 말
하나마나 '졸속'이 될 수밖에 없다. '날림'이 될 수밖에 없다. 적
어도 '이해'라는부분에 있어서만은. 이 점 각오하고 가야 한다.
단기여행자는 오로지 '인상'을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여행자
의 노트는 인상의 소묘들로 채워질 것이다. 사물의 윤곽선이 희
미한, 미완성의 소묘들. 여행자 내부에서 거품을 제거하고도 끝
내 살아남아 저절로 나의 일부가 돼 버린 환상의 얼룩, 그것이
지시하는 욕망과, 인류학적 체험의 중간 지대에서 형성되는 섬.
그 섬의 소묘들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말만 많고 아직도 안 떠난 김 주 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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