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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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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프랑스 여행기]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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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4 - 1999. 6. 28 -
요새는 서점에 들르면 으레 이런저런 여행가이드북 구경하는 게 일
이다. 같은 도시라 해도 책에 따라 정보를 풀어놓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한 책자에 오래 매달려 있다가 새로운 책자를 보면 도시가 달
리 보인다. 이럴 때 마음의 지도를 수정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여러분은 저마다의 지도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 가시는지? 총론과
각론을 어떤 순서로 활용하시는지? 내 경우는 총론에서 각론으로 가
는 방법보다 각론에서 총론으로 가는 쪽이 상상력을 자극하여 즐겁
다. 맨 먼저, 하얗게 비운 지도에다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각론을 쑤셔
넣는다. 한 장소에 대한 동기나 소망은 결국 구체적 각론에서 발원하
는 것이니까. 이 각론들은 정보의 상세본에 의거하여 수시로 보충된
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총론으로 전체수정이 가해진다. 이때 정보의
요약본이 있으면 도움이 된다.
좌우지간에, 어제도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대로 프랑스편을 따악
펼쳤다. 어느 책이나 다 고만고만하고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는 파리
는 그냥 넘어가고, 상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남프랑스 부분을 펼쳐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갑자기 여행 2부의 거점 마르세유에 대한
수상한 어조가 눈길을 끌었다. 마르세유는 범죄율이 높고 치안이 불
안한 요주의 도시라는 것이었다. 소매치기 들치기 날강도가 극성을
부리니 구항은 물론 칸비에르거리를 밤에 걸어다닐 생각은 하지도 말
라고 가이드북은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쳇, 항구도시가 다 그렇
지 뭐, 했지만 이 어조는 너무 강경하다. 완전 쫄았다.
내가 결코 되고싶지 않은 여행자의 모습이 몇 가지 있다.
바캉스철을 맞아 현지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파리. 에펠탑, 개선
문, 루브르, 베르사유 앞에 관광버스가 정차하여 일군의 무리를 토해
낸다. 떠들썩하게 사진 찍고 일제히 버스에 올라타는 그들. 제발 그
속에 내가 섞여있지 않기를. 참고로 미리 살짝 알려드리면, 위에 나열
한 네 곳은 이번 파리 일정에서 과감히 뺐다. 정확히 말해 이 네 곳
은 관광의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다.
그런가 하면 한 푼 아끼느라 혈안이 된 궁상맞은 여행객도 되고 싶
지 않다. 물론, 여행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유럽 대
장정의 도중에 있는 젊은 배낭족이라든가, 여행의 의미를 고행과 수
련에서 찾는 사람의 경우라든가, 오지 탐험 같이 한 사회에 대한 인
류학적 탐구 자세가 필요한 여행의 경우라면 또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궤도 이탈의 의미가 강하다. 여행자는 곧 이탈자이다. 아
끼고 절약하는 일이라면 여기서도 충분히 하고 살았다. 구두쇠처럼
아끼고 규모있게 돈쓰는 이탈자 봤는가. 영화에서 보면 이탈자란 기
관총 들고 폼나게 설치는 자이며 남의 차를 훔쳐 씽씽 달리는 자이며
보란 듯이 가게 진열장을 주먹으로 깨뜨리고 보석 목걸이를 갈취하는
자 아닌가. 한 마디로 이탈자란, 막가는 자를 의미한다. 여행지에까지
가서 돈 아끼고 싶지 않다. 여행지에선 경제관념을 슬그머니 버릴 예
정이다.
그런데 좀 우습다. 사실 이렇게까지 큰소리 치지 않아도 된다. 나
는 나를 잘 안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막가파는 못될 위인이다. 난
원래 경제관념이 밝은 편은 못 된다. 그런데 경제관념은 엉망인 주제
에 경제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만은 투철하다. 경제관념은 가
지려고 해도 가져지지 않고 경제관념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은 버
리려고 해도 버려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대단히 복잡하고 모순된 지
기합리화가 작동하는데 어쨌거나 이 두 개의 관념이 유기적으로 결합
하지 못한 채 공존, 아니 갈등한다는 점이 나를 늘 짜증나게 한다. 그
결과 사소한 영역에서의 낭비는 심하고 거창한 영역에 대한 투자는
죽어도 못한다. 휴우, 이 사실은, 나라는 사람이 소비생활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적 인간형에 어떻게 적응(호응이 아니라)해 왔으며 어떻게
반발(저항이 아니라)해 왔는지의 불행한 전말에 관계된 얘기로서, 단
언컨대 그럴 듯한 논문 테마다..
그래, 내가 여행지에서 사치를 해 봐야 얼마나 하겠나. 카지노에 가
서 돈을 날리겠는가. 이곳에서도 끔찍하게 여겨 피해다니는 백화점
쇼핑을 거기까지 가서 하겠는가. 사람에 따라선 여행이 자신의 전면
적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일 수 있다. 모험. 좋은 말이다. 하지
만 모험에 살고 모험에 죽어 아름다운 시기가 따로 있다. 나이 서른
다섯에 아이 엄마로서 무슨 얼어죽을 모험인가. 모험을 하기엔 나는,
잃어버려선 안 될 것들이 너무나 많다(솔직히, 결혼해서 애낳고 사는
주제에 지나치게 용감하고 체제저항적인 사람들을 보면 좀 의심스럽
다. 남자들, 특히 배운 남자들 중에 이런 사람 많다) 또, 이것은 비밀
인데, 나는 고생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벌써 눈치들 채셨다구요?).
따라서 내게 여행이란 모험이라기보다는, 완전히 낯선 공간에 나를
놓아보는 조용한 실험의 의미를 지닌다. 와당탕쿵탕 실험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조용한 실험.. 쉽게 말하면 휴양이다.
마지막으로, 되고 싶지 않은 여행자상이 하나 더 있다. 날강도라도
당할까봐 경계심으로 잔뜩 주눅이 든 여행자의 모습이다. 앞의 두 유
형은 개인적인 선택과 의지와 결단에 의해 얼마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피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동무 하나 없이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을 때 난감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공포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겁이 나서 구항의 밤거리를 걸어보지 못할 것이면 마르세
유엔 왜 간담..
자, 이상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결국, 어디서나 품위있는 여행자가
되고싶다는 말이다. 그런데 방도가 없다는 말이다. 아다시피 품위란
여유에서 비롯된다. 여유는 곧 돈이며 경험이며 체력이며 몸에 밴 국
제감각이다. 가난하고 소심한 자의 초보 여행에 어찌 여유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품위와 여유는 고사하고 올여름 유럽 어느 한 구석에서,
어리버리 겁먹은 표정으로 뚜리뚜리 헤매고 있는, 오랜 걷기와 무더
위에 녹초가 된, 선천적 운동부족으로 보이는 동글동글한 여자 하나
발견하시면 다름 아닌 저인 줄 아쇼.
여행지에 대한 상이 구체화됨에 따라 여행의 실현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판타지의 길과 현실의 길이 다른 탓이다. 판타지의
길과 현실의 길 사이에서 진자운동의 폭이 심해질 때마다 머리가 어
지럽고, 자주 비관하게 된다. 하지만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을까. 사
람은 결국 보고싶은 것만 보게 돼 있다. 판타지 역시 현실이고, 현실
은 곧 판타지의 연장이며 확장이며 재구성 아닌가. 판타지와 현실을
대립시킬 까닭이 있을까. 그 둘은 상극이 아니다. 둘은 서로를 견인하
며 서로를 흡수하며 서로를 닮아가며, 마치 푸가의 악보처럼 나란히
붙어 화성을 진행시킨다. 판타지와 현실의 대화적 구조와 통합에 대
한 이해. 이야말로 제대로 된 현실인식이 아닐까 싶다. 그 누구 아닌,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어찌 됐든 최악의 경우 이 여행기만은 남을 것이다. 가지 않은 길
에 대한 여행기.. 어느 행복했던 사람의 슬픈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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