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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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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프랑스 여행기] 인상주의적 공간에 나를 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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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적 공간에 나를 놓는다 - 1999. 7. 13 -
초등학교때인가 중학교때인가 처음으로 전람회에 갔었다. 덕수궁에
서 프랑스 인상파전이 열린 것이다. 설마! 내가 그 옛날에 그런 구경
을 했을까. 이것은 꿈인가. 아리송하다. 그도 그럴 것이 덕수궁까지
어떻게 갔으며 뭘 봤는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증
거물을 가지고 있었다. 증거물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기억의 수
문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전람회 책자가 집안에 굴러다녔다. 아마도
미술전시회 구경이라는 방학 숙제가 있었을 테고 극성스런 엄마가 나
를 데리고 덕수궁에 갔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인상주의 그림으로 가득차 있던 그 책자를 기억한다. 표지는 모네
의 수련이었다. 모네의 수련 연작 가운데서도 원형 도판으로 우리에
게 알려진,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연못에 드문드문 연꽃이 꿈처럼 떠
있는 연푸른 색조의 그림 말이다. 표지를 넘기면 어느 휴양지의 시원
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트루빌의 여름이었던가, 알베르빌의 여름이
었을 것이다. 먼 수평선, 한가하게 흔들리고 있는 요트. 그 작품은 외
젠 부댕의 그림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름이 신기했다. 외젠 부댕이라
니..
그 다음부터는 뒤죽박죽이다.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은 정원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이었는데 눈부신 햇살 아래 형체가 분산되고
있었다.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가, 모르겠다. 뜨개질이었다면
분명 털실이 아니라 레이스였을 것이다. 모네, 마네, 시슬레, 피사로,
르느와르의 그림들이 있었고 아르망 기요맹 같은 화가 이름은 외젠
부댕 못지 않게 별나다고 생각했었다.
난 지금도 르느와르 그림들은 별로다. 여자들을 보골보골하게 휘감
고 있는 솜털같은 기운과 유난히 두텁게 엉겨 있는 오일의 질감이 싫
다. 그러나 그 옛날 책자에 있던 양치기 소녀의 그림은 참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니 르느와르의 다른 그림들보다 담백했다. 그 소녀는 그
의 다른 그림들 속에 등장하는 긴 머리의 어여쁜 소녀가 아니라 소년
이라고 해도 될 법한 중성적인 모습으로서 머리에 깃털을 꽂았으며
목동의 지팡이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림의 지배적인 색조는 고운
하늘색이었다. 천사를 그리라면 그렇게 그릴 것이다. 그 그림을 이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가장 좋아했던 그림은 피사로나 모네의 풍경화들이었다. 설경 속에
마차 한 대가 정면으로 다가오는 피사로의 그림과 모네가 그린 아르
장퇴이유의 세느강을 내가 그 어린 나이에 스케치북에다 여러 차례
모사(?)했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주려나. 분명, 되지도 않는 붓질로 덕
지덕지 물감을 처바른 수채화들이었을 것이다. 모네나 피사로가 누구
인지 알 턱이 있었겠나. 소년중앙이나 새소년, 어깨동무에 연재되던
순정만화, 이를테면 은발의 아리사, 장미 속의 리자, 파도여 안녕, 유
리의 성의 여주인공을 모사하던 것과 똑같은 정열로 작업에 임했음에
틀림없다. 오오 그럼에도, 난 왜 저런 색상이 안 나올까, 하는 가당치
않은 비교와 진지한 예술적 불만(?)을 가지고 모사에 전념했다는.. 전
설이 있다.
모네의 모든 그림들이 좋았다. 센 강 주변을 그린 풍경화를 비롯,
벨일의 암석이던가 하는, 대서양변의 기암과 거기에 몰아치는 풍랑을
그린 그림이 있었는가 하면 동산에 화사하게 한 무더기 피어난 관목
의 그림들이 있었다. 분홍과 파랑, 연두와 주황, 보라와 초록, 그 황홀
한 색채의 뗏목, 그리고 흰색의 함성들.. 물론 그 그림들에 대한 인상
을 이같이 언어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 이루어지는 일이
다. 그때 뭘 알았겠는가. 단지 그 기억들이 오늘 감각적으로 되살아난
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그리고.. 약간 새로운 관점에서 아직도 그의
그림들이 좋다.
모네는 고호같은 광기의 화가도 아니었던 것 같고 동시대의 화가
그룹에서 천재성이 가장 뛰어난 화가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의 그림
은 장식적이고 화려하고 예쁘고.. 등등의 형용사로 표현되고 말 요소
가 다분하다. 일필휘지의 대담성은 느껴지지 않으며 이른바 깊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듯하다. 왜냐하면 거기엔 표면만 존재하기 때문이
다. 그의 그림들은 광선의 움직임에 따라 바스러져 가는 덧없는 세계
일 뿐이다. 이야기가 제거되고 관념이 사멸한 지대에, 빛과 대기의 화
학반응으로 빚어진 색채들이 교향악을 연주한다. 그 연주가 불러일으
키는 서정성과 더불어 그의 그림들이 지닌 '식물성'이 나는 유난히 좋
다.
여행을 앞두고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모네가 파리, 또는 파리 근교
의 풍경을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담아낸 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오
늘날 그의 그림들은 파리의 유명 미술관들에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
행복한 화가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그림을 그림의 대상 바로 곁에 영
원히 걸어둘 수 있는 화가란.. 자, 작품 바로 곁에 작품의 소재가 있
다! 방금 전에 내가 걸어 온 거리, 내가 바라본 강이 미술관 화랑에
걸려있다! 자연은, 도시는 어떻게 해서 예술이 되었는가. 그 해답이
그 언저리에 있을 것만 같다.
파리에서 그밖에 무엇을 할 것인가. 대단한 계획이 있을 수 없다.
그곳에 절친한 친구가 거주하고 있어 나를 모셔갈 이유도 없고, 결국
남들이 해 온 것, 남들이 하는 것 흉내내고 다니는 정도밖에 도리가
없어 보인다. 실은 그것만으로도 힘에 부쳐 헥헥댈 것이다. 노트르담
에 가보고 센 강변에도 가 보고 유람선도 타고 퐁네프도 건너보고 에
펠탑을 넣어 사진 한 장 찍을 것이며 까페에 앉아 거리 구경도 할 것
이다. 좀 흥이 난다면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나서기도 할 것이다. 그리
고 은밀하게 나만 알아두었다고 착각하고 있음이 분명한, 파리내의
고요한 쉼터들을 찾아다닐 것이다. 그곳은 묘지가 될 수도 있고 정원
이 될 수도 있고 교회가 될 수도 있다. 영화를 한 편 봤으면 좋겠고
숙소가 따뜻하고 운치 있었으면 좋겠고 하루쯤 비가 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뭘 보고 뭘 먹고 뭘 하든 파리에서의 최우선의 주제는 인
상주의의 공간에 나를 놓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림이나 어떤 예술적
유파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상주의의 원리는 어떤 면에서 내
가 사물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 생활감정과 참 비슷하다. 평화로
운 관조. 순간에 대한 집착. 분위기의 지배력에 대한 승인.
풍경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이러한 정서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풍경화는 쉽다. 풍경화를 이해하기 위해 굳이 시대배경을 알
아야 할 필요는 없으며 도상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다. 원근법과 명암
처리에 대한 지식이 없이도 나는 꽤 훌륭한, 풍경화의 감상자가 된다.
무엇보다도 풍경화는, 내가 영화를 통해 단련해 온 시각적 비전에 가
장 행복하게 조응하는 그림 양식이기도 하다..
모네의 그림이 있는 미술관들, 오르세나 오랑주리에 온종일 죽치고
모네가 그린 정원, 숲, 강 따위를 누비고 다니며 파리의 햇빛, 파리의
대기를 접하다 보면 파리가 절로 스며들겠지 싶다. 마음의 사진을 찍
어오려고 한다. 인상주의 화풍의 사진 몇 점들을.
"창문을 통해서 파리의 나직한 웅얼거림이 바람에 실려 내가 있는
곳까지 밀려왔다. 밖에, 저 뜰의 철책 뒤에는 알마 광장, 그리고 내가
오후 줄곧 정처 없이 걸어다닌 다음에 앉아 있었던 카페의 테라스.
나는 이 도시와 나를 혼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저 나뭇잎이었고 도로
에 번들거리는 빗물의 그림자였고 웅성대는 목소리였으며 거리의 저
수십 수백만 개의 먼지들 중 하나였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잃어버린 거리> 중에서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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