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름 |
주향 |
 |
| 제 목 |
[프랑스 여행기] 에필로그 2 |
|
에필로그 2 - 1999. 8. 12 -
파리에서의 시네여행 2탄은 다음 날 오전으로 이어진다. 역시 걸어
서 3분 거리에 있는, 어제 그 극장 바로 뒤에 위치한 극장에서.. 그렇
다, 꿈에 그리던 루키노 비스콘티의 [베니스에서 죽다]를 김주향은 보
게 된 것이다. 잘하면 이 영화가 손에 들어올 것 같다, 8월중에 비디
오방이라도 가서 함께 보자, 고 제안했던 친구들이여, 먼저 배신을 때
려 진심으로 미안하다.
말러의 5번 교향곡 4악장 아다지에토는 드디어 제 영상을 만나 합
체되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아다지에토의 뮤직비디오이
다. 영화 내내 폐활량이 부족해 보이는 더크 보가드의 극도로 선병질
적인 연기에 경탄하며, 그와 함께 다치오,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광채 영롱한 미의 결정(結晶) 앞에 대책없이 눈부셔하고 전율했다..
극한의 아름다움은 왜 죽음과 연결되는지.. 그 둘의 관계는 어쩌면 그
렇게 논리적인지..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견딜 수 없는 비애에 이
르게 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잊지 못할 다치오를 연기한 소년은 스웨
덴 배우인 것 같았다. 비요른, 아니 스티그, 이런 이름이었던가. 그의
모습을 이후 다른 영화에서 볼 길이 없다 해도 허전해 할 필요는 없
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로 신화에서 자양분을 얻어 구성된 순
정만화들에서 아쉬운 대로 그와 비슷한 표정과 상징성을 가진, 무엇
보다도 그와 비슷한 바디라인을 가진 캐릭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날은 별로 한 일이 없다. 영화 시간을 기다리던 아침, 뤽상부르
정원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등이 굽은 할머니들이 많이 보였다.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한다. 가끔 벤치에 앉아 비둘기 모이를 주거나 책을
읽는다. 생수를 마시기도 한다. 그러다가 안경 같은 걸 떨어뜨리기도
한다. 휴지통에 뭔가를 버리기도 한다. 마치 영화에서의 정지화면처럼
자주 그들에게 시선이 머물렀다. 그들의 슬프도록 완만한 움직임, 그
들의 가냘픈 어깨에 한낱 먼지처럼 내려앉은 인생을 보며 왜 키에슬
롭스키 영화들의 한 모퉁이에 어김없이 저런 할머니들이 나타났다 사
라지곤 했던가 알 것도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리용역까지 걸어가 마르세유행 떼제베를 예약했
다. 파리에서 마르세유 가는 길이 난감했었는데 이 일을 끝내니 걱정
이 가셨다. 그러나 방심하면 위기가 온다고, 지하철 안에서 잠시 헤맸
다. 환승역에서 RER라고 하는 고속 전철 구간으로 들어가 식은 땀을
흘리고 있던 와중, 술 취한 아저씨(이럴 땐 아저씨보다는 사내라고들
표현하지요) 하나가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추근대기 시작했다. 간이
콩알만해졌다. 슬슬 도망쳐서 안전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의 안
숨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런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메트로
에서 미친 놈이 따라온다, 어떻게 할래요, 자, 따라해 봐요, 눈을 부릅
뜨고, 옳지, 큰소리로, fuck you! 하며 아주 실제적인, 그러나 다분히
자기 본위의 조언을 여행 오기 전에 해 준 권아무개의 얼굴이 떠올랐
던 것이다. 영화에선 참 많이 봤는데.. 그런 대사나 그런 연기도 할
만한 사람 있고 죽었다 깨나도 못할 사람 정해져 있는 거 아닌가.
이날, 볕이 따가운 오후 나는 센 강 좌안의 중심가라 할 생제르멩
데프레 거리에 있었다. 창이 별로 없고 두터운 돌벽으로 이루어진 생
제르멩 데프레 교회가 마음에 들었다. 개구부가 많고 장식이 화려한
고딕식 사원들보다 이같이 밀폐된 성당이야말로 성소다운 느낌을 불
러일으킨다. 성당 뒤로 수도원의 담장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퓌르스
텐베르그라는 작은 광장이 나온다. 아니, 결코 광장은 아니다. 뜨락이
라고 해야 한다. 그 옆에 들라크르와 미술관이 있었다. 나는 이 화가
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이 미술관을 굳이 찾은 까닭은 김화영 선생
님의 소개 때문이다.
그림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다만 그늘진 뜨락의 보기 드문 적
요와 조급한 사람은 지나치기 십상인 그 미술관의 겸손한 입구, 닫힌
대문을 삐익 열면 나타나던 둥근 아치와 돌로 된 바닥, 거기서 또 출
입구를 찾아 실내로 난 계단을 올라가야 비로소 매표소가 보이던, 일
련의 미술관길이 잊혀지지 않는다. 김화영 선생님이 반드시 오후 네
시경에 앉아있어 보라고 권한 미술관 안뜰의 벤치, 그 자리에서 고개
들어 바라본 나무와 하늘 또한..
파리에서의 마지막날, 악화된 발가락 상처를 핑계로 거액을 투자해
당일코스의 버스 투어를 결정하였다. 나는 노르망디쪽의 생말로에 가
고 싶었다. 어차피 프랑스의 남단, 즉 지중해엔 곧 간다. 그렇다면 대
서양은 어떨까.
투르니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간만의 차가 없는 지중해는 너무
얌전하고 제 한계 속에만 갇혀 있으며 너무 맑아 신비가 없다고. 지
중해를 이 따위로 말한 놈은 처음 본다. 괘씸해서 더 들어본즉, 요컨
대 투르니에 자신은 대양 체질이라는 것이다. 수평선을 향해 바닷물
이 밀려나가면 발 아래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인적미답의 발판이 드러
난다. 그 모래, 그 갯벌, 그 산발한 바위들. 변화무쌍한 하늘이 비치는
그 물웅덩이들. 바로 이런 세계 말이다. 따라서 지중해는 무한에서 와
서 무한으로 되돌아가는 저 너무나도 생생하고 억센, 요오드 냄새의
광대한 호흡을 알지 못한다. 쳇, 이 글을 읽고 어찌 지도상의 노르망
디나 브르따뉴 지방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결국 프로그램을 찾지 못했다. 파리에서 생말로로 가는 길
을 사전에 세심히 조사해 왔건만 시행착오를 염두에 두면 당일로 돌
아오기 어렵다는 판단에, 차선으로 프랑스 중서부의 불르와, 쉬농소,
샹보르, 세 개의 성을 돌아보는 고성투어를 신청했다. 동화책에서나
상상하던 성들이었다. 소공자 세드릭이 폰틀로이경이 되어 해비샴씨
와 함께 드린코트 성을 향해 들어가던 기나긴 마찻길이 내 앞에 펼쳐
졌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성들과 성에 이르는 산책로 이상으로,
성에 도착하기까지 차창 밖에 펼쳐지던 광대한 밀밭과 해바라기 들판
이 더 좋았던 것 같다. 산이 없어 특히 좋았고, 달리는 밴 안에서 장
시간 다리를 쉴 수 있어 좋았다. 그 대신 나는 이날 페르라셰즈와 몽
파르나스행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날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 나는 세 번째 영화, 파졸리니의 [마태
복음]을 보았다. 이 영화 역시 얼마나 바래왔던가. 그런데 불행히도
영화 시작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졸음이 쏟아졌다. 투어로 인한 피로
에다가, 내일이면 프로방스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저녁 식사때 주제
넘게 파스티스를 주문해 몇 모금 마신 탓인지, 아니면 약국에서 사다
먹은 딸기향 나는 감기 시럽 때문인지도 몰랐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몽사몽을 헤매
는 와중에 제프리 헌터보다 엄숙하고 로버트 파웰만큼 미남이며 그보
다 약간 젊은, 막스 폰 시도우보다 덜 신성하고 윌렘 데포보다 심리
적으로 덜 복잡한 예수가 화면을 누비고 있었다. 걸음걸이에서부터
설교하는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가 단호하며 신념에 찬 예수였다.
내용은 복음서 그대로인 듯했다. 마태는 마가나 누가처럼 예수의
수난에 신학적 관심을 집중하거나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
기보다 의심의 여지 없는 메시아로 예수를 인식했던 것 같다. 영화엔
신념형의 열정어린 예수와 함께, 그런 그를 부인했던 제자들의 비겁
함에 대한 통회가 자세히 묘사되고 있었다. 프롤레타리아적인 힘차고
단순하고 선명하고, 그래서 그 나름으로 아름다운 예수관이 느껴졌다.
날이 밝고 마르세유로 떠날 시간이 왔다. 내가 머문 호텔은 우리나
라 장급 여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시설을 갖춘 별 세 개짜리 호텔
이었다. 호텔의 이름은 흔한 프랑스 사람 이름이었다. 이를테면 장이
나 자끄, 아니면 끌로드나 제라르와 같은.. 나는 그 이름이 마치 저택
을 관리하는 충직한 집사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 들어가면
꽉 차는 요상하게 개조한 엘리베이터, 신통치 않은 에어컨, 잠을 설치
게 하는 바깥 소음 등에도 불구하고 파리 관광의 중심인 시테섬과 센
강까지의 거리가 500미터밖에 안 된다는 장점 때문인지 이 호텔은 시
설에 비해 숙박료가 비쌌다.
그러나 갓 구운 크르와쌍, 차고 신선한 우유와 오렌지주스, 갖가지
치즈와 버터, 바게뜨 들로 제공되던 아침 식사만큼은 사랑스러운 기
억으로 남는다. 잘라놓은 바게뜨 한 조각에 주스 한 잔만 마셔야지,
하고 마음먹지만 매번 크르와쌍 한 개를 더 먹고 우유도 한 잔 더 마
시고 향기에 이끌려 한약처럼 진하고 새까만 커피까지 사양하지 않았
다. 그 탓에 몇 번 설사를 했음에도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다시 바구
니에 가득 담긴 빵덩이와 크리스탈 안에서 출렁이는 순백색 우유, 그
리고 오렌지 주스를 보는 순간, 만사를 잊고 달려들곤 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