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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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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프랑스 여행기] 에필로그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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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1 - 1999. 8. 12 -
파리에서 4박5일, 마르세유에서 4박5일. 열흘이 채 못 되는 여행이
었다. 그렇지만 국내여행도 게으르고 겁이 많아 엄두를 못 내는 내가
왕복 항공편과 숙소 예약 등 계획 단계에서부터 현지에서의 크고 작
은 선택 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내 힘으로 해냈다는 데 스스로
큰 의의를 두게 된다. 나이 서른을 넘어 이까짓 거에 스스로 대견해
한다는 게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의 한심스런 개인사로
봐서는 혁명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말이 에필로그지, 역시 제멋에 겨
운 장황하고 시시콜콜한 잡기가 될 것 같다.
파리. 도시 전체가 영화 세트 같았던 곳, 그중에서도 에스에프 영화
의 세트처럼 보였던 지하철 내부, 빨간 제라늄을 밖으로 늘어뜨린 집
들, 한 집 걸러 늘어선 까페와 브라스리, 모양과 색상이 다 다른 그곳
의 차양과 테라스. 버터가 듬뿍 든 크르와쌍 냄새, 조경이 잘 된 정원
들, 사람과 똑같이 거리를 활보하는 황소만한 개들, 어디선가 훅 끼쳐
오는 오데콜론향..
그러나 이곳에 대해선, 다리품을 파느라고 지쳐있던 기억만이 먼저
또렷하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 몸의 이치를 돌보지 않으면 여행이 행
복할 리 없다, 고 수차 되뇌었음에도, 무리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
었던 것이다. 짐을 풀자마자 저녁 무렵 걸어나가 시테 섬과 센 강 주
변을 돌아다닌 첫날부터 발가락이 부르트는 바람에, 이후 내내 걷는
게 고통스러웠던 나는 결국 닷새 동안, 숙소가 위치해 있는 센 강 좌
안의 생 미셸 거리 일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도착한 날 저녁, 센 강변은 관광객들로 초만원이었다. 퐁네프도 만
원, 유람선들도 만원. 사람이 너무 많구나! 사람이 많으면, 내가 혼자
라는 사실이 더 사무치게 느껴진다. 나는 내가 사람 많은 걸 못 견뎌
한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거기 그렇게 서 있는 내가 한없이 진부하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힘차게 부풀어오르던 풍선, 피시시
김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것이 내 성향도 성향이려니와 피로 탓일지도 모른다고 진단
했다. 그래서 체력의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목적지의 개수를 대폭
줄이되 선택된 목적지에 대한 의지만은 강화하자, 가능하면 몸과 머
리가 비교적 맑은 아침에 움직이고 피로하면 언제든 숙소로 돌아오자
고 새로이 다짐을 했다. 이를테면, 야경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밤엔
서울도 파리만큼 아름답다. 한강도 센 강만큼 멋지다, 굳이 여기서 줄
을 서고 복작댈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합리화하며, 밤의 인파 속에서
더욱 깊어갈 고독감을, 스르르 비껴 갔다. 밤과 함께 내릴 센티멘털리
즘이 그토록 두려웠나 보다.
아침 일찍 개관하자마자 들어간 오르세 미술관의 어둑어둑한 방들
이 좋았다. 사전에 예비학습을 하며 정을 붙인 세잔과 모네의 방이
좋았으며 두아니에르 루소의 그림들이 일찍이 가보지 못했던, 영혼의
저 컴컴한 쪽방으로 나를 데려가 주었다. 조용히 그 문을 열었을 때
흑녹색 열대가 펼쳐져 있을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르세에서 나와 다리를 건너면 콩코르드 광장이다. 정오의 콩코르
드 광장. 이곳엔 성냥팔이 소녀가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자크 프레베르의 <아름다운 계절>이라는 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빈 속에 얼어붙은 채
외롭게 무일푼의
열여섯 살 소녀가
꼼짝 않고 서 있는
콩코르드 광장
정오 팔월 십오일
광장 옆 튈르리 공원 안의 오랑주리 미술관엔 마침 모네의 수련전
이 열리고 있었다. 인기가 높은지 관람객이 많았다. 사십여 점 가까이
되는 모네의 수련 연작. 예쁜 수련, 꿈꾸는 듯한 수련, 수면 위에 하
늘과 공존하고 있는 수련, 작은 수련, 큰 수련, 미쳐 날뛰는 수련, 무
시무시한 수련.. 온갖 수련이 있었다. 풍경에서 시작하여 생태학적 집
중으로 나아간 모네 그림 세계의 비밀 한 자락을 보았다.
아파오는 다리를 이끌고 그리 멀지 않은 로댕 미술관을 찾았다. 그
의 육감적인 조각 작품들을 책에서 보고 압도당하여, 보기 싫어 여러
해를 미루었던 [까미유 끌로델]까지 서울에서 보고 왔었다. 로댕이든
끌로델이든, 맹수의 앞발로 서로에게 상처주고 상처받는, 그런 불꽃같
은 애욕의 삶은 싫다. 그들이 그렇게 살고자 해서 그렇게 살았던 것
은 아닐 테지만. 압도당할지언정 예사롭지 않은 창작열을 일방적으로
내뿜고 있는 작품들 역시 고요한 완상을 허락치 않는 것 같아 부담스
러웠다. 차라리 대작보다 소품에 정이 가고, 말러나 발자끄, 위고 등
동시대 유명인들의 토르소가 재미있었다.
미술관 안뜰의 그림같은 정원에서 지친 다리를 쉬고 있을 때 한국
말이 들려왔다. 앞 벤치에 앉은 두 아가씨가 파리 지도를 펼쳐놓고
다음 코스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반가움보다 외면하고픈 마
음이 앞섰다. 뭐랄까, 침해당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를 일본인
쯤으로 오해해 주기를 바라며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이때부터 고독
의 맛을 즐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 날 너무 더워 길거리에서 소르베라고 부르는 아이스크림 샤벳을
두 번이나 사먹었다. 처음 택한 시트롱맛이 어찌나 상큼하던지 이날
이후로 돌아오는 날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트롱 소르베를 먹었
다. 레먼맛이 나는 시트롱 소르베가 가장 흔하고 또 맛있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나는 이 단어의 발음에 매료되었다. 하염없이 도시를 걸으
며 태양의 따가운 공격에 녹아내릴 즈음, 시트롱 소르베를 나직이 발
음하는 것만으로도 감각의 문이 활짝 열리곤 했다. 그리고 눈에 띄는
대로 그것을 사먹으며 기운을 차렸다. 매일매일의 시트롱 소르베 중
서도 압권은 제법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긴 후 디저트
로 시킨 시트롱 베르였다. 베르라는 색채 형용사 하나가 덧붙은 데
불과하건만 초록의 시트롱, 즉 푸른 레먼을 연상하면서 나는 먹기도
전에 혼미해졌고 이윽고 내 눈 앞에 당도한 세 덩어리의 상아색 소르
베, 그 안에 점점이 박힌 푸른 과육을 보았을 땐 황홀한 나머지 거의
기절 직전이었다.
이날 저녁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거기까지 가서 영화냐,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이국 땅에서 보는 영화, 여간해서
잊기 어려운 강렬한 추억을 남긴다. 게다가 파리는 시네마의 나라 아
닌가. 또.. 이것은 거의 운명이라고 여겨지는데, 내가 머물던 곳이 소
르본 대학 바로 옆이라서인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한 극장들이 구
석구석 숨어있었다.
상상해 보시기를.. 걸어서 3분 거리의 극장에서 파졸리니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들은 마음만 먹으면 줄줄이 볼 수
있다! 날짜가 안 맞아서 포기했지만 쿠스투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도 시내 두세 군데 극장에서 상영중이다! 그것도 몽땅 필름으
로! 정말이지 이곳에 유학 와서 공부하기는 죽어도 싫은 반면, 대학
옆에 세들어 살며 영화만은 죽도록 보고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공항에서 산 파리스코프에 밑줄을 그어가며 세 작품을 선정했다.
숙소에서 극장 간 거리, 상영 시간과 일정의 우선 순위 등을 고려하
며 작품을 고르던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하던지...
이렇게 선정된 파리에서의 시네여행, 그 1탄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었다. 올해 칸에서 심사위원상과 감독상을
받은 작품, 황금종려상 수상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던 그 작품.
오기 전에 이미 이 영화가 파리 극장에 걸려있다는 소식을 알고 점찍
어 두었었다. 물론 스페인말에 프랑스어 자막이다. 인물의 표정으로
추적이 가능한 멜로드라마적 라인을 겨우겨우 따라갔을 뿐 오직 대사
로 전달될 수밖에 없는 이 영화의 유머는 깡그리 놓쳤다. 알모도바르
영화의 특징적 코드를 머리 속에서 활성화하고 사전에 주워들은 대략
의 줄거리에 화면을 꿰어 맞춰 가며 장님 코끼리 만지듯 더듬더듬 영
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찔끔찔끔 울었다.
마누엘라라는 간호사는 아들과 산다. 아들은 예민해 보이는 10대
소년으로서 유명한 여배우의 열렬한 팬이다. 어느 날 모자는 여배우
가 공연하는 연극 구경을 간다. 그런데 여배우의 사인을 받으려고 ㄸ
어나갔다가 아들은 차에 치어 즉사한다. 절망을 딛고 세상과 대면한
마누엘라는 문제의 여배우를 비롯, 주변의 사연많은 여인들과 연대하
며 슬픔을 나누게 된다.
어제 읽은 어느 영화잡지 기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 영화는 '마누엘
라가 아들을 잃은 뒤에 더 넓은 의미의 모성적 유토피아를 이루어나
가는 과정'이다.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깎아내리더라도 모성이 여자에
게 있어 숙명이라고 할 때, 개인적 숙명의 고리를 끊고 이타적인 사
랑의 실천을 통해 모성을 확장해 가는 마누엘라의 모습은 감동적이었
다.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아들을 잃은 뒤 마누엘라가 바르셀
로나로 가는 대목이었다. 아마 그녀는 마드리드에 살고 있었던 듯하
다. 바르셀로나는 상처 입고 떠나온지 오래된 고향쯤 되는 것 같고.
통상 알모도바르 영화를 뒷받침하곤 하던, 예의 가슴 저미는 선율이
기타로 연주되는 가운데 화면은 돌연 바르셀로나의 야경을 저공비행
해 들어간다. 이어서 새벽 우물인 양 맑은 암청색의 하늘을 배경으로
가우디 건축물이 나타난다. 꿈이었나.. 택시를 타고 바르셀로나 시내
로 들어가기 전의 그 짧디 짧은 두 개의 쇼트는 마누엘라의 절망적인
내면을 대변하는 것처럼 슬프게 흔들리고 있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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