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 수업 중
복거일이 쓴 미완의 시간여행 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를 소개했을 때
한 학생이 추천한 그 드라마
<썰전> 허지웅 기자가 거품 물고 찬양한 그 드라마
한번 보면 끝까지 보게 된다며
학교 식당에서 과학부장님이 추천한 그 드라마
<나인>을 20회 몰아서 보느라
현충일부터 주말 내내 폐인이 돼 있었다
그간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시리즈로 된 드라마를 열심히 보지 않아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우리네 드라마가
이렇게 인텔리전트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김병욱 시트콤 이래 처음으로 받았다
인텔리전트할 뿐 아니라(플롯)
문학적이기도 하고(대사) 영화적이기도 한데(화면구성)
특히 나는 그 영화적인 요소의 예로,
과거라는 시간의 부비트랩에 갇혀 수난의 예수처럼
빗속에 죽어가던 잘생긴 남자주인공의 최후 장면이
너무나 처절하고 강렬하여 좀처럼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한편 드라마의 앞뒤를 고리 짓는 히말라야 장면은
오래 전 친구가 포카라에서 찍어 온
안나푸르나 사진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이 좋아
구 게시판에 저장해 두었던 것을 꺼내 본다
물론 저작권은 친구에게..
<나인>에서 인상적인 대사 하나는.. 짧아서 더 기억나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바뀌어도)
"기억과 유물과 통증은 그대로" 남는다는 말
송찬호의 시들을 읽어보게 된다
상자
-송찬호
우리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하나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이 누런 발자국,누런 냄새
우리집은 오래 되어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우리집 어느 구석엔가 여우가
살고 있다고 믿었다
누런 발자국, 누런 냄새 깊은 밤 나는
그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의 이야기가
뚝, 그쳤다 집수리 때인가 그 구멍을
시멘트로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우리집에는 오래 된 풀벌레 소리가 있다
그것은 어떤 악보나 악기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손바닥만한 나무상자일 뿐이다
나는 그 나무상자에 손을 담근다
그리고 긴 휴식을 꿈꾸는 것이다
네모난 사과, 혹은 네모난 새처럼
우리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