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름 |
주향 |
 |
| 제 목 |
종화의 마술 |
|
리플 감사해요, whereto님.
장단 맞춰주신 김에 기운 내서 몇 마디 더 할까 합니다.
종화군이 이런 기쁨을 주는 한편으로 저한테 시집살이를 좀 시킵니다.
희고 멀끔해서 이렇듯 눈에 화악 띄는 주제에
내면이 복잡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컨디션이 안 좋을 땐 거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극도로 침울해서 가여울 지경으로요.
학급 대표이고 우등생 그룹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일반적으로 교과 선생님들이 기대하는,
수업시간에 눈이나 대답으로 호응하는 스타일도 아니라
몇몇 분들은 간혹 오해를 하셔서 쟤, 원래 냉소적이예요?
신경이 좀 쓰여요.. 이런 말들을 하세요..
이것은 얼핏 선생님들의 과도한 관심으로도 보이지만
실은 종화편에서 끊임없이 선생님들로 하여금
안색이나 심기를 살피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와 제스처가 있습니다.
이번 수련회때 작년 담임과 이야기 나눈 결론으로는
쉽지 않은 학생인 건 확실하구요..
영재스러운 측면이 있지만 다양한 욕구와 인성적 요소들이
통합이 안 되어 불안정한 정체성을 보이며.. 따라서
이 학생이 발산하는 그럴싸한 분위기엔 거품도 분명 있구요..
여기엔 부모의 의욕적이되 조직적이지 못한 교육방법이라든가
가정적인 요인도 좀 있는 것 같죠..
하지만.. 잘은 모르겠어요.. 그런 걸 내가 교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더 분석하고 깊이 알아야만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런 것은 양상이 다를망정 모든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인 것도 같고..
다만 지금까지 저에게 확실한 것은..
종화는 분류하기가 어려운 매우 신비한 학생이라는 점입니다..
늘 선생님한테 뭔가 할 얘기가 있는 눈치고.. 안 그런 척 의연해 보이지만
실은 기회만 되면, 물어만 주면 자기 얘기를 하고싶어
안달이 나 있는 학생이라는 점도요..
그런데 내가 면담을 좋아하는 교사가 아니니 이를 어쩌나..
일일이 예를 들기 어렵지만 하여튼 설정을 자기편에서 하는 바람에
제가 좀 황당할 때가 있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겠구요..
하지만 종화는 이 모든 불안한 면모들을,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일거에 종식시키는 전환모드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엊그제 스승의 날, 유일한 공식행사로
학급 대표가 카네이션을 담임에게 달아주는 순서가 있었어요.
교실에서 막 방송 조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종화가 교탁 앞에 앉아있던 제게로 나오더니 난데없이
자그마한 종이쪽지를 들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는 거였어요.
어머, 얘가 무슨 짓이야, 위험하게.. 하고 소리치려는 순간
공중에서 불꽃이 화악 붙었다 사그러들고,
두 손이 어지럽게 오락가락하더니 흡사 마술처럼 종이쪽지가
온데간데 없는 와중에.. 한 손으로 준비한 카네이션을 쓰윽 내미는 거였어요.
그때서야 저는 이것이 유서깊은 구애 내지 기사도 이벤트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생들이 와아, 탄성을 지르고.. 살다살다 이런 일을 처음 당하는 저는
순간 제 속에서 백 년을 잠자던 '공주'(드높은 자아인가 정신질환인가.. by k) 및
'여우', 뭐 이런 잡다한 생물이 장엄하게 소생하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감동의 도가니탕에 빠져 잠시 표정관리가 안 되었는데
이벤트를 벌인 본인도 뭐.. 연습을 했건만 불꽃과 꽃송이 헌납의 연결 타이밍이
시원찮았던 모양인지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들어가더군요.
글쎄.. 이런 닭살스러운 짓을 벌이면 급우들이 종화를 놀릴 소지도
충분히 있건만 전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
즉 홍종화는 홍종화 이름 석 자로 통한다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이고
이것이 저한테는 또하나의 미스테리입니다.
한편 이날 저희 반 학생들이 꽃들을 좀 가져왔는데
유일하게 편지를 써 준 것도 종화였습니다.
그 편지의 겉봉에는 정성스럽게 눌러 쓴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어요.
젊음이란 지나쳐가는 시간의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젊음이란 머물러있는 마음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 존경하는 담임선생님께 종화가 -
그리고 속지에는 새뮤얼 얼만이라는 미국인이 쓴
'젊음Youth'이라는 리더스다이제스트풍의 시를 영문으로 타이핑해 놓았더군요.
알고보니 겉봉에 적은 문장은 그 시의 첫머리인 다음 문장의 번역이었습니다.
Youth is not a time of life ; it is a state of mind
그리고 종화는 속지 맨 끝에 이런 문장을 적어 놓았어요.
선생님께서 평생 젊으시리라는 걸 전 확신합니다.
저는..
마음의 저 편에서 무슨 파도같은 것이 밀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랑을 하고싶었던 나머지 집에 와서 언제나처럼 편지를 꺼내놓고 떠벌였지요.
이거 봐바.. 당신이나 핀잔 주지 나 학교에선 존경도 받고 산다구..
아아, 마지막 문장, 너무 감동이야..
그러자 승민아빠가 이러는 거예요
그 문장 앞에 양보절이 생략되었구먼, 당신 늙었다는 말이자나..
이 순간, 저는 꿈에서 깨어나 고개를 갸웃하면서
그런가? 과연 그런 것이었나? 할 수도.. 있었겠죠..
웬걸요.. 승민아빠가 결단코 샘을 내고 있는 것이라고 전 확신했습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