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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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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아벨 페라라 영화들에 대한 옛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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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장 비고의 [라탈랑트]를 보고 나오는 길인데
다음 상영작이 무엇인지 모여드는 면면들의 열기가 상당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려 할 때 얼핏 이동진 기자도 본 것 같다.
지하철 안에서 스케줄을 확인해 보니
상영작이 아벨 페라라의 [복수의 립스틱]이었다.
뭐랄까, 영화서클 내에서 입소문이랄까, 공지가 아주 잘 된 모양이다.
마침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어쩌구 하는 영화제와 함께
아벨 페라라 특별전이 진행중인 듯한데 저 작품 말고도
[악질 경찰] [킹뉴욕] [퓨너럴] 등이 상영작 목록에 올라있다.
생각이 나서 [퓨너럴] 개봉 즈음인 98년에 써 둔 옛글을 올려본다.
이 글을 보며 지금 흥미로운 것은, 당시 나 또한 영화깨나 본다는 축들이
그러했듯 이 사람 영화들의 강한 자극에 매혹을 느끼면서
심오한 면이 있다고 여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뭔가 석연치 않아했다는 점이다.
재능없는 감독이라고 치부한 강한섭씨의 충격적인 의견에
살짝 끌리고 있었던 것을 보면..
[장례식] 가기 전, 어수선한 랩 몇 소절
김주향 98/02/06 22:17 | 조회수 249
[장례식]이란 영화, 괜찮을까?
이 영화가 베니스 영화제인가에서 선을 보이고 크리스 펜이 연기상
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 기대라면 기대를 가져왔다. 마침 개
봉이 임박하면서 어디선가 비릿하게 흘러오는 피냄새. 멋진 갱영화
본 지 오래고 피다운 피 본 지 오래라 그런가, 무슨 흡혈귀과라도 되
는지.. 어서 봤으면 좋겠다. 음, 갑자기 스쳐가는 어느 날이 있으니..
그날은 10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다. 우리반 사나이 중의 사나이 정
모의 주먹 한 방에 호근이의 코뼈가 으스러졌다. 그때 3층교실에서
1층 양호실에 이르는 층계와 내벽을 시뻘겋게 무늬지운 피, 그들의
교복 셔츠와 양호 선생님의 희디흰 가운을 흥건히 적셨던 피..
이미 겁에 질려 충분히 뉘우치고 있는 당사자들을 향해 나는 혼비
백산한 나머지, 버벅거리며 화를 내고 어쩌고 했던 걸 기억한다. 그러
나 그 와중에도, 산전수전 겪어 음란하고 간교하기 이를 데 없어진
감각의 선두주자, 먹어도 먹어도 배고파하는 탐욕의 결정체가 다름
아닌 '시각'인지라, 어느덧 눈은 이리저리 피를 훑고 있었다. 저건 말
그대로 첩혈 속의 쌍웅이군.. 오호라, 저수지의 개들과 똑같은 선홍
빛.. 호근이가 시비 걸고 정모가 열 받는 장면, 그 피 튀기는 장면을
내눈으로 봤어야 하는 건데.. 아깝다, 리와인드 안 되나..
그 가을날, 토요일 오전의 시야는 투명하였고 인근 병원으로 달려
가는 길의 자연광은 꽤나 눈부셨다.
다급하고 위협적인 현실의 상황을 순간적으로 풍경화해 버림으로
써, 그렇게 해서 시각적으로 고정된 풍경을 기시감으로 정돈해 냄으
로써 현실의 상황에서 나를 살짝 소외시키는 버릇, 이러한 버릇이 언
제부턴가 생겼다.
하기야 사태가 이보다 더 심각하였다면, 아니 내 자식이 깡패한테
얻어맞고 피를 한 바가지 쏟으며 들어왔다면, 아니 내 모가지에 칼이
들어왔다면 그 상황에서 뭐? 소외? 웃기고 있네, 풍경? 좋아하시네..
어림 없는 얘기다.
우리에게 물리적 폭력이란, 피란 무엇일까. 영화로 답해 보자. [그랜
드캐년]에 그 해답이 나온다.
좀더 잔인하게, 좀더 악랄하게, 좀더 자극적으로, 좀더 많은 양의
피를.. 하고 외치던 할리우드의 영화감독인지 제작자가 있었다. 한 마
디로 좀 촐랑거리는 밥맛이었는데, 아마 스티브 마틴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아닌가보다 하세요. 케빈 클라인이거나 윌리엄 허트였을 지
도 모릅니다. 이럴 때 클릭해서 열면 제깍 정답 나오는 초스피드 두
뇌장치 같은 거 없나) 그가 어느 날 대낮에 노상에서 강도를 만난다.
그때 그는, 영화현장에서 그리도 용감하고 대담무쌍하던 그는 좀도둑
에 불과한 강도의 위협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오줌을 질질 싼
다. 이어서 그 강도의 권총 한 방에 다리가 꺾인다.
그 장면은 현실과 영화의 차이를 간명히 보여주었다. 그것이 현실
의 우리다. 우리는 그렇게 허약한 것이다. 오죽하면 영화라는 거대
한 무용(武勇)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들어가 안전하게 활개
치겠나. 영화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껄껄 웃
고 피로 떡칠을 하고 피바다에 뒹굴면서도 용감히 싸운다. 피를 찾아
헤매고 피를 갈아마시고 피와 결혼하며 피로 세례를 주고 피로 세례
받으며 피에 경배한다. 대체 무슨 짓을 못하리.
그러나.. 영화 속에서 아무리 까불어 봤자 제 몸이 찢기는 현실의
고통 앞에선, 제몸에서 뭉글뭉글 흘러나오는 피의 색깔 앞에선 겁쟁
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다. 이 경우에도 의식만은 또렷하여 우아
하게 자신의 육체를 분리시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이 소리
를 또 하고 앉아 있다니 나도 아직 정신 못 차렸다.. 혹 무공이 대단
하여 죽을 때 자기 몸에서 솟구치는 피의 소리를 들었던 맹무살수쯤
이라면 모를까, 한낱 소인 범부들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물론.. 현실의 지배력이 강력하고 준엄하다는 이같은 이야기가 곧
허구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이야기는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허구에 기
대어 현실의 지배력을 돌파해 보려고 애써 왔던 우리 인간의 수고는
의미있는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연속이 곧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문명과 자연의 관계가 그러하듯 허구는 겁쟁이 인류가 현실에 맞서
이루어온 위대한 정신적 유산인 것이다. 허구의 다양한 양식 가
운데서도 영화는, 테크놀로지와 결합함으로써 현실을 가장 정교하게
모사해 낸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표상하는, 허구의 정화인 셈이고..
다시 [장례식] 얘기로 돌아와서..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아벨 페라라의 영화들을 좀 봤다.
옛날에 본 [스네이크 아이]와 [나쁜 경찰], 둘다 주제가 비슷했고
괜찮은 영화들이었다. 감독이 보는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이고 그 안
에서 주인공들은 악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다. 위험 수위의 언저리에
서 그들은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다. 세상을 향해, 자신을 향해. 그러
한 반성의 과정이 너무나 진지하고 절박하여 영화는 내내 비상한 긴
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괜찮다'는 표현은 인색하
다.. 무척 우수한 영화들이었다. 비교적 화면이 매끈하고 돈 들인 티
가 나던 [바디 에이리언]도, 위 영화들과 장르상으로 차별되는 한편
어떤 면에서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이번에 본 [복수의 립스틱].
강간 당한 여주인공이 만나는 남자마다 다 쏘아 죽인다. 마치 태엽
풀린 살인병기처럼 그녀는 모조리 죽여버린다. 여기엔 예외가 없다.
별로 악하지 않은 남자, 우호적인 남자, 점잖은 남자도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 반면, 여자인 경우는 자신에게 위해가 되는 상대라도 안 죽인
다. 심지어는 여자 손에 총을 맞고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쏜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그녀에게 겨누었던 총을 거둔다.
영화의 마지막이 재미있다. 주인공의 살인 현장에 얼쩡거리고 있었
던 개 한 마리가 실종되었다 살아 돌아오는데 이 장면은, 그녀가 살
인축제를 벌이는 와중에도 여자와 더불어 결코 동물은 죽이지 않았음
을 암시한다. '수컷 인간' - 개만도 못한 그 족속들을 '남자'라도 불러
준다는 것 자체가 부당한 일이다. - 만 사살한다는, 주인공에게 입력
된 그 완벽한 채널이 인상적었던, 매우 공정한 영화였다.
[킹 뉴욕]. 찌든 잉크 퍼진 듯한 화면 색깔을 보니 얼마전 [데블스
애드버킷]의 엔딩 곡으로도 나왔던 롤링 스톤즈의 명곡 Paint it
black이 생각났다. 그의 영화가 어떤 재료를 갖다 써도 한 가지 색깔
이라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게 화려한 캐스팅이라면 [대부] 가 나오든
가 그 아류쯤은 나왔어야 하는데 여전히 값싸 보이는 질감의 영화를
내놓았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그런데 그것이 돈이 없어서라든가 능
력이 딸려서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타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런 스타일, 즉 제 맘대로 시커멓게 칠해 버리는 심술과 광기야말
로 이 감독 특유의 스타일인 듯하고.. [장례식]에서 기대되는 것의 하
나도 우선은 그런 스타일이다. 그리고.. 순식간에 뒤통수를 둔기로 내
리치는 듯한 어떤 요점이 그 스타일 안에 녹아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너무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란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씨네21'에서 강한섭씨가 무시무시한 평가를 내렸는데 자그
마치 별 한 개를 준 것이다. 게다가 그 잔인한 논평이라니. 영화에 대
한 부정적 평가 정도가 아니라 감독과 감독의 영화세계 전반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이었는데 정말이지 오뉴월 한을 품지 않은 이상 이런
평가는 나올 수가 없다.
다른 분들 평가에는 의연할 수 있어도 강한섭씨 경우는(이분의 별
점이 나와 꾸준히 불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내게 영향을 미치는 편이
다.(살다보면 주위에 이런 인물이 있다. 나와 견해가 다를지언정 그
견해의 토대를 내가 인정할 수 있고 나와의 그러한 적당한 거리가 매
력이고 생기일 수 있는 상대) 영화에 대한 견해가 달라도 그 토대만
은 넉넉히 수용되는 분이었는데, 이번엔 전혀 뜻밖이고 충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나쁜 경찰]은 보시고 하신 말씀인지.. 찾아가서 여쭙
고 싶다, 조그만 목소리로, 이렇게..
성질 더러운 건 저도 인정해요. 정신 말짱한 놈은 분명 아니에요.
때로 그건 칭찬일 수도 있죠. 그런데 재주가 없다고요? 어찌하여 그
런 냉혹한 평가를 내리셨사옵니까. 이 감독, 그렇게 엉망은 아닌 거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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