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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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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일곱 개의 영화로 남은 여행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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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live And Kicking]
다음 날은 요새 만들어진 영국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이날 새로운 극장을 찾아 나선 나는 지하철을 타고 두 구역 진출하였
는데 길에서 극장 위치를 물어본 두 젊은 여성이 마침 그 극장에 가는
길이라 하여 동행했다. 말이 동행이지 내가 졸졸 따라다녔다.
들리는 말만을 통해 추리해 본 결과 영국에서 온 고등학생들이라 했는
데 그 중 한 명이 그 극장에 와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거기서 [트레인스
포팅]과 [웰컴 투 더 돌하우스]를 봤다고 했다. 아, 익숙한 언어들이여.
이미 영어로 고문 당한지 며칠 째. 파김치가 되어 있다가 영화 제목이
들리기 시작하니 갑자기 문리가 트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극장 안에 들어가서 나는 다시 파김치가 되었는
데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영화의 대사를 20프로 정도밖에 못 알아들
었다. 그나마 멜러물의 낯익은 공식에 힘입어 내용을 때려 맞추어 보니
에이즈에 걸린 발레단 댄서 토니오가 그의 치료의와 사랑하게 되는 한편
공연을 위해 절차탁마하는 과정인데, 공교롭게도 공연을 앞두고 발레단
지도자 아줌마가 집요하게 요구하는 주요 개념은 퀴어적인 것이었고 토
니오는 마침 연인 관게에 있던 의사와 친밀함을 더해 가는 가운데 예술
적 표현의 동력을 얻는다... 뭐 이런 이야기였다.
토니오를 연기한 제이슨 플레밍이란 배우는 다비드상처럼 아름다운 육
체를 가진 배우였다. 브랜든 프레이저와 분위기가 비슷했고 빨간 입술은
특히 똑같았다. 그의 연인인 치료의 역의 앤터니 셔는 머리가 벗겨진 인
도 파키스탄 혈통의 아저씨 배우였는데 낯이 익었다.
두 주인공의 화학적 앙상블은 이 영화가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국 영
화라는 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를 연상시켰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가 특정 시기 영국의 사회 경제적, 계층적 상황이
반영된 복잡한 코드의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그런 요소가 탈색된 소품이
라는 차이가 있었다.
국내에서 상영되었다면 잘렸을 성행위 장면을 본 것 말고는 그다지 독
특한 게 없었지만 영화 후반부의 공연 장면만큼은 눈부셨다. 급격하게
쇠약해진 토니오가 무리하게 공연에 임한다. 그는 마린블루의 배경 앞에
서 고통을 참으며 끊어질듯 넘어갈 듯 애절한 몸짓으로 파트너와의 일치
를 이루려는 놀라운 몸의 연기를 보여준다. 마치 유리창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리는 듯한 질감과 속도로 공들여 연출된 장면, 편집과 촬영과 음
악과 연기가 환상적으로 결합된 뒤어난 장면이었다.
글쎄, 세상은 이즈음 나더러 동성애에 대한 견해를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편치 않은 심정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성애 소재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적지 않은 도전 의욕을 갖고 있던 마당에 이 영화를 보게 된 셈
인데...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 도전 의욕에 불씨를 던질 만한 전복적인
가치관이나 근원적인 탐구를 찾기는 어려웠다. 너무 평이하여 실망스러
웠다.
단, 인상은 있었다. 둘의 관계는 생물학적 남성의 결합으로 보이지 않
았다. 각각에게 조금씩 다른 비율로 배합되어 공존해 있는 남성성과 여
성성이 대위법적으로 화답하는 친밀한 관계로 보였다. 아름답게 그려진
모든 성관계가 그렇듯이. 커플의 생물학적 순서쌍이 어떻든 간에.
하지만 이 대목에서 생각을 발전시킬라치면 머리가 아파진다. 섹스에
서 남녀의 생물학적 변수보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발현과 화합이 문제시
된다고 했을 때 내가 붙들고 있는 문제의식의 구도가 모호해지기 때문이
다. 남녀관계를 대결과 투쟁의 구도로 파악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나에
겐 남성성과 여성성 논의는 너무 앞서 간다 싶은 것이다. 생물학적 남성
과 여성 사이에 더럽고 치사한 권력의 배치와 행사 문제, 유서 깊은 불
평등의 문제가 산적해 있는 한 봉건과 근대의 싸움은 당분간 계속되어야
할 듯한데... 어쩐지 이즈음 넘쳐나는 동성애 담론은 지나치게 선진국형
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기야 싸우자고 덤벼드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고 명확해야 편리한 건데, 현실의 복잡 미묘한 측면을 관
찰하고 생각의 토대를 전면 점검하려니 머리가 아파오는 것도 당연하다.
5. [Female Perversion]
[얼라이브 앤 키킹]의 소재적 연장선에서 이 영화를 택했다. 감독은 여
자임에 틀림없고 [올란도]와 데릭 자만의 영화에서 봤던 틸다 스윈튼의
이름이 선택에 확신을 주었다. [얼라이브 앤 키킹]의 경우처럼 이 영화의
대사도 알아듣기 힘들었다. 이번엔 장르 공식에 들어맞는 영화도 아니라
더욱 참담했다. 내 참, 이러고도 감상을 쓸 수 있는 건지...하여간에 조금
뻔뻔해지기로 한다. 소득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며 여성의 몸과 사랑의 행위에 렌즈를 들이대는 카메라의
선택 폭이 의외로 광범위함을 깨달았다. 카메라의 각도와 위치, 화면에
담는 여성 육체의 부위가 생소했고 이 생소함은 그간 아무 생각 없이,
라기보다는 별 뾰족한 수가 없어 찜찜해 하며 봐 왔던 영화 속 여성의
육체가 보여지는 방식을 한번 재고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했다.
남성적 시선에 의한 여성 묘사가 어떠니 저떠니 하는 문제제기는 흔하
게 접해 왔어도 뭐가 어째서 편파적이며 뭐가 여성을 우롱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게 표현하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설명을 접해 보지 못한 나는, 부끄러운 얘기일 수 있겠지만 일반 극영화
에서의 레즈비언들의 성행위 묘사와 포르노 필름에서의 레즈비언 묘사가
영화 테크닉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아직까지 구별 못하는 사람이
다. 서술적 맥락에 의해서 그 차이를 구별해 낼 수야 있지만 해당 부분
의 기술적 연출이란 측면에선 차이를 간파할 수 없다. 일면 하찮아 보이
는 그런 부분에 성에 관한 특정 이데올로기가 분명 작용하고 있을 텐
데...그 기술적 이치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대안적인 것은 과연
어떠한 형태일런지...
서점에 가면 이런 초보적 문제의식에 영감을 제공하는 영화와 여성,
시선에 관한 이 분야의 고전이 있으며 이런 문제의식하에 기획된 여성영
화제 등도 제법 있어 왔으며 요즘은 대학에 여성학이니 남성학이니 하는
강좌가 보편화되어 이런 화제에 대한 유익한 강의도 있으며 논의도 전개
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이런 것을 접하기 용이한
장에서 멀어지는 나이가 돼 버린 것 같다.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공부해
보고 싶은 영역이다. 가능하다면 선생도 모시고, 머리는 냉철하며 마음은
따뜻한 그런 사람들과 함께.
6. [안나]
이번 영화보기 순례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을 고르라면 난 주저없이 니
키타 미칼코프 감독의 영화 [안나]를 꼽는다. 국내에서 개봉되었던 [위선
의 태양]을 우물쭈물하다 놓치고, 아니 정확히 말해 재미없을 것 같아 외
면하고 여기 낯선 곳에서 이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안나]는 1980년부터 13년 간 미칼코프 감독이 조국 러시아의 정치사
회적 변동을 기록필름으로 편집해 내고 사이사이 자기 딸 안나를 매년
한 차례씩 인터뷰한 내용으로 구성한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대략 브레즈
네프에서부터 고르바초프, 옐친까지의 정치 지도자들의 모습을 축으로,
붕괴되어 가는 소련, 페레스트로이카, 연방 해체, 전쟁으로 이어진 자기
조국의 최현대사를 담담히, 때로는 조롱과 냉소로, 무엇보다 사랑이 없으
면 불가능할 무서운 반성력으로 그려 나간 영화였다.
감독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역시 안나의 인
터뷰 장면이다. 풀밭에서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아빠의 카메라를 향해
달려와 수줍게 웃음지으며 질문에 대한 답을 궁리하던 여섯 살 꼬마에서
부터 성숙한 처녀가 되어 스위스로 공부하러 떠나는 10대 후반에 이르기
까지 13년 간 안나의 성장이 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러시
아의 슬픈 현대사가 거기에 투영되어 있다.
아빠는 매년 같은 질문 서너 개를 던진다. 지금 네가 가장 사랑하는
건 뭐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가장 무서운 것은? 원하는 건? 여섯 살
소녀는 마녀가 가장 무섭다고 답한다. 그 이유는 코가 크기 때문이다. 또
악어를 가지고 싶다고 한다. 나이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육체적 성장과
함께 안나의 정신도, 대답도 변화한다. 구상적이던 대답이 추상화되고 단
어의 나열은 문장의 옷을 입는다. 성숙해진 안나는 더이상 마녀를 무서
워하지 않으며 악어를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다. 안나는 전쟁이 싫으며
가장 무서운 건 상실감이라고 답한다. 모든 걸 잃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
이 가장 두렵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평화롭게 살기를 원
한다고 한다.
마지막에 스위스로 공부하러 떠나는 안나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이런저런 심란함에도 불구하고 조국에서 살기를 원하느냐는 아빠의 질문
에 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다고 답한다. 안나가 그 질문에 답하기
직전의 '잠시'는 내게 영원같이 느껴졌다. 영화가 끝나고 한참을 앉아 있
었다..
7. [마마로마]
나흘 간의 억류 기간의 마지막 날 파졸리니 감독의 [마마로마]를 봤다.
흑백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안나 마냐니의 억척 엄마 연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아들에게 자기의 미래를 거는 엄마. 아들 하나 바라보며 사는 엄마. 그
엄마는 우리네 엄마들과 어쩜 그렇게 닮았을까. 네오리얼리즘의 세례를
받은 대개의 이탈리아 영화들 그렇듯이 그 나라 서민들의 정서가 우리의
정서와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영화였다.
아들 에또레를 연기한 소년 배우는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의 오렌지]
에 나온 말콤 맥도웰과 흡사한 외모였다. 한 마디로 정이 안 가는 인상
이란 애긴데 10대 후반에 이른 그 또래의 일탈 소년답게 엄마 따위는 신
경 안써, 하고 일갈하는 철없는 아들이다. 이 아들로 말할 것 같으면 데
이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레코드판을 고물상에
팔아먹을 만큼 싸가지가 없는 녀석이다. 나는 기가 막혀 화면으로 뛰어
들어가 그 녀석을 늘씬하게 패 주고 싶었다.
엄마가 사랑하던 낡고 오래된 레코드판에선 직직거리며 민요가 흘러나
오고 있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연주해 다오, 아름다운 바이올린아...젊은
시절 남편의 목소리로 녹음된 그 애수에 찬 노래를 엄마는 눈물을 글썽
이며 따라 부르곤 한다. 그 지역의 태양과 하늘과 바다와 바람은 그런
노래를 낳는가...
[마마로마]는 좋은 영화였지만 파졸리니라는 감독의 이름에 기대하고
있던 어떤 특별한 것을 내게 주진 못했다.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다가
비디오 쇼핑을 할 때 눈에 띈 그의 [테오레마]라는 작품을 하나 사 왔다.
* 후기
위에서 언급한 3에서 7까지의 다섯 편의 영화들은 머물고 있던 장소에
서 도보로 15분 내외의 거리에 있는 극장들에서 본 영화들이다. 극장에
선 고전에서부터 최근 영화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영화들이 테마별로 기
획되어 필름으로 상영되고 있었다. 그런 환경, 영화에 갈급한 자들에게는
행복이라면 행복일 것이었다. 몇몇 도시에 국한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나는 흥분했고 열심히 일정을 짜 가며 단기간에 영화 보는 즐거움을 누
렸다.
그러나 즐거움이 오래 가진 않았다. 나흘 째로 접어들면서 나는 지쳤
고 모든 게 시들해지고 있었다. [미스테리 트레인]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하나만 믿고 멤피스에 내렸던 일본인 처녀총각의 심경이 내게도 찾아왔
다. 해가 지면서 이곳은 대수롭지 않은 곳, 내가 살던 곳과 닮은 꼴이면
서 물리적 확장에 불과한 공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 얼굴에 부질없이
립스틱을 칠해 보기라도 해야 위안을 얻을 그런 곳으로 변하고 있었다.
영화보기가 시들해지고 있는 현상은 불길한 징조였다. 다음 날 일정에
의해 뉴욕으로 떠났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정서 불안에 시달렸을 지도
모른다. 나아가서는 떠나올 때의 계산으론 전혀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
서도 안 되는 일이지만 향수 비슷한 것이 밀려오는 느낌도 들었다. 어,
이래선 안 되는데...이런 건 각본에 없었는데...
'어제는 아무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두 번 식당에 갔지만 우리 말
을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때 책을 읽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린 나를 부르며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대여, 그대가 없다면 일찍
이 나도 없는 것이다' 결코 이 시의 풍경처럼 되어선 안 되는 거였다. 하
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
어쨌든 뉴욕은 나를 구원해 주었다. 여기선 빈둥거릴 수 없었다. 도대
체 가만 놓아두질 않는 곳이었다. 한가하게 권태나 향수에 시달릴 틈이
없었다. 모두가 분주하거나 분주해 보여 나 역시 분주한 척이라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난 남들 으레 하는 것들을 따라 해 보느라고 바빴다. 그러면
서 비로소 영화를 잊었다. 여기까지 와서 영화를 보다니 말도 안 돼, 더
재미난 게 수두룩한 걸...실제로 스펙터클한 뮤지컬 공연과 본고장 재즈
연주의 감흥에 비하니 갑자기 영화는 궁상 맞고 쓸쓸해 보였다. 이곳엔
젖과 꿀이 흘렀다. 좀더 긴 시간 체류했다면 그 젖과 꿀이 부패해 들어
가는 꼴, 이미 부패해 있는 꼴도 목격했을 지 모르지만 불행인지 다행인
지 단기 여행자인 내게 그것은 향기롭기만 했다. 그 젖과 꿀이 비싸다는
게 흠이긴 하지만...
자주 까먹고 사는 것인데 정말 세상엔 영화만 있는 게 아니다. 그동안
영화사랑합네 하고 감상문도 올리고 했는데 갑자기 바깥 세상 구경하더
니 영화에 대한 정절을 포기하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쑥스러워 이런 말
안 하려 했는데 마음의 길이 반드시 도덕과 일치하란 법은 없는 듯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라는 대중매체에서 놓여나기 힘
든 것은 영화가 뭐 대단하고 유별나서가 아니라 그만한 가격과 비용을
들여 즐길 오락으로 그만한 것이 없다는 손익계산의 결과가 아닌가. 알
고 보면 영화가 아니면서 영화가 주는 재미와 환상, 예술적 정화감을 선
사하는 매체는 얼마든지 있으며 그 각각의 세계는 또한 영화의 경우가
그렇듯 들여다보고 탐구할수록 우물속처럼 깊다는 것도 사실 아닌가. 설
마, 그래도 영화가 제일이지 하며 맞서고 싶어도 어쩐지 입지가 좁아짐
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기감 느낄 필요는 없다. 왜 그래야 하는가. 영화
의 테두리에서 멀어져 다양한 매체의 하나로 영화를 위치시키고 그 가치
를 전체 속에서 저울질해 보고 때때로 영화의 한계나 조건을 인정하는
자세가, 모래 위에 높이 쌓은 영화사랑보다 오히려 영화를 제대로 알고
사랑하는 머나먼 길의 튼튼한 출발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도대체 영화만 보고 있었으니 도처에 또다른 진기한 세계가 있음을 알
도리가 있었겠는가. 가령, 바람이 푸른 삼림을 소요하는 황혼녘, 정교하
게 설계된 야외 음악당에 청아하게 울려 퍼지는 교향악단의 연주에 영화
를 비할 수 있을까. 비교가 필요없는 시간. 비교를 허락치 않는 시간. 이
것을 경험하는 동안 세상은 완전하고 아름다웠다.
굳이 영화가 아니라도 우리를 즐겁고 행복하게 하는 매체는 널려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이는 정절의 포기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는
집착에서의 해방이고 세상에 대한 겸손이며 유연함이라고 난 믿는다. 여
행이 가져다 준 겸손과 유연함.
* 진짜 후기
끝났다.
혹시 누군가 다시 여행을 가겠느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이와의 보름 만의 상봉이 감격스러워 다
음 여행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돌아온 후 지난 이틀 간 그애와 껴안
고 어루만지고 쓰다듬고 뽀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국 땅에서 불시에 엄습하였던 '향수' 비슷한 것의 정체
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제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것은 한강이라든가 서울
하늘이라든가 내가 소속되어 있는 가족이나 일과 관련한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떨어뜨려 놓고 온 아이와 나 사이에 연
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탯줄의 진동이었다. 예감 못한 바는 아니지만
그 진동이 그렇게 클 줄이야...
다음 여행은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다음 영화나 결정해야겠다.
와 보니 이곳 서울은 여전히 영화라는 약물이 필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샌프란시스코가 쑥대밭이 되고 불바다가
되는 에디 머피 주연의 제목도 모르는 영화를 부분부분 비몽사몽간에 보
았는데 당연히 그 화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 이제, 미국 극장 간판에서
여러 차례 유혹을 느꼈지만 일부러 국내에서 자막 딸린 걸로 보려고 참
고 기다려 왔던 [페이스 오프]를 보러 가자. 그리고서 서늘하고 향기로운
[올리브 나무 사이로] 빠져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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