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 름 |
주향 |
 |
| 제 목 |
일곱 개의 영화로 남은 여행 1 |
|
뒤져보니 오래 전 여행기가 하나 더 있었군요.
승민아빠 해외금융연수 기간의 말미에
합류해서 보낸 97년 여름 미국에서의 며칠.
저의 첫 해외여행이었을 겁니다.
미동부캐나다 코스의 패키지 여행으로 출국해서
워싱턴 버지니아 버팔로 나이아가라
터론토 오타와 몬트리올 등등을 경유, 마침내 캠브리지에 도착하여
남편과 상봉, 그곳에서 나흘쯤 체류하고
연수일정 끝나는 대로 뉴욕에 가서 사흘 놀다가 돌아온.
당시 나무늘보님이 침튀기며 추천해 주셨던 몇 가지 품목들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욕심껏 실행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를테면 탱글우드 음악회에 참석해 보려고 백방으로 알아보던 시간들.
보스턴에서 시간을 못 내고 결국 뉴욕으로 온 이후
여기저기 알아보다 지쳐.. 투숙해 있던 5번가의 호텔 앞에 대기중이던
한국인 기사 딸린 콜택시 불러 거액을 주고 레녹스까지 달렸죠.
탱글우드의 삼림 속으로 들어갔던 그 신비로운 저녁
숲속의 음악당에서 들었던 곡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얼린 협주곡 D장조.
보스턴 심포니였고 초량린의 바이얼린 협연이었습니다.
보스턴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는 세이지 오자와였지만
그날 지휘는 켄 나가노였구요.
공연 끝나고 서둘러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엔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새벽 세 시가 넘은 한밤중에 이름 모를 다리를 건너
맨하탄으로 진입해 들어올 때
눈 앞에서 그 섬이 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까만 새틴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심장처럼
뜨겁게 약동하고 있더군요.
보스턴 차이나타운, 이 아닌 뉴욕 차이나타운에선
해산물 요리 잘한다는 식당을 찾아가
블랙빈소스(?)로 양념한 무슨 새우요리던가
게요리를 맛있게 먹었었구요..
뉴욕에서의 엠파이어스테이트, 오페라의 유령,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센트럴파크..
네, 주마간산으로 경험한 그것들 다 좋았지만..
결국은 위에서 말한 탱글우드와 해산물요리..
월요일의 블루노트에서 함께 한 라이오넬 햄프턴 밴드의 공연..
맨하탄 남단 싸우전드 아일랜드로의 공짜 왕복 페리..
이 정도가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아있을 것들은 아마도 영화들이겠지요.
아래 여행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미스테리 트레인과 풀스러쉬인을 제외한 나머지 영화들은
모두 다 보스턴 캠브리지에서 본 작품들입니다.
타노스와 데스피나는 하버드 아카이브에서..
얼라이브앤키킹은 켄달스퀘어(?)던가 하는 곳의 극장에서..
안나를 비롯한 나머지 작품은 숙소에서 걸어갈 수 있는
브래틀 극장에서 각각 감상했더랬습니다.
가끔씩 궁금합니다.
갈 때마다 똑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던
브래틀 극장의 벽시계는 여전한지..
영화 시간을 기다리며, 혹은 영화를 보고 나와 들렀던
그 극장 옆 Algier라는 예쁜 까페는 그대로 있는지..
일곱 개의 영화로 남은 여행 - 1997. 8. 23 -
써 놓고 보니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이란 책의 제목과 비슷하
다. 박완서님이, 폐암과 투병하다 세상을 뜬 남편을 회고하며 쓰신 그 책
에서 죽기 직전 독한 항암제를 맞느라고 머리칼이 빠져 가는 남편에게
가족들이 사 준 모자가 총 여덟 개였다고 했다. 남편의 육신은 가고 그
의 넋은 여덟 개의 모자로 남아 살아 있는 자들에게 머물렀던 것이다.
시간은 그렇게 물질을 빌어 사람의 기억 안에서 영속하곤 한다. 여행이
라는 나의 시간 체험도 영화라는 물질의 형체를 빌어 지금 막 기억 속에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에선 영화를 배제하지 않았다. 영화가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다 보니 때론 지겨워서 벗어나고픈 것도 사실이지만 절해고도로
떠난 것도 아니고 대도시 중심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영화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않았으며 오히려 영화야 오너라, 기회 닿는 대로
만나자꾸나 하는 심정으로 길을 나섰다.
다음 일곱 편의 영화들은 16일 간의 미동부지역 여행의 와중에 접하게
된 영화들인데 이미 내게 저장되어 있던 정보들과 영화를 향한 나의 욕
망과 기회라는, 세 가지 요소가 만나는 지점에서 선택된 작품들이다.
해외에 가서까지 아까운 시간 쪼개어 국내에서 개봉 중이거나 국내 개
봉이 확실시되거나 적어도 국내 개봉이 가능한 영화들을 보고 오는 어리
석은 짓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만큼 낯선 영화들을 찾아다닌 편이라
이 글에서 언급할 영화들이 생소할 지 모르겠다.
어차피 개별 영화에 대한 정보를 주기 위한 글은 아니다. 그럴 능력도
못 되고 인터넷 등에 의한 신속한 영화 정보의 습득이 가능한 상황에서
그럴 필요도 못 느낀다. 그래도 혹시 불가피하게 언급되는 내용들이 앞
으로 영화를 보실 분들에겐 폐가 될까 걱정하며 글을 쓴다. 여행이란 형
태의 특별한 삶의 체제 속에서 영화가 어떤 모양으로 간섭해 들어오며
그 위력을 행사하는 지에 대한 사적인 보고서쯤으로 봐 주시면 좋겠다.
1. [미스테리 트레인]
여행 전날 짐 자무시의 [미스테리 트레인]을 봤다. 낯선 미국이 있었
다. 외로움, 공포, 권태...
이방인들의 그러한 정서는 사실 상상하면 끔찍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
는 이상하게도 그런 낯선 미국의 풍경 속에 한번 있어 보고 싶었다. 소
름끼치는 외로움일지라도, 피말리는 공포가 온다 하더라도, 권태 속에 서
서히 죽어간다 해도, 예상되는 이 모든 끔찍한 정서를 송두리째 감내하
면서라도 그 어두운 길목에, 상점 앞에, 밤의 가로등 아래, 공중전화 앞
에, 기차역 대합실에, 너저분한 숙소의 침대 위에 한번 있어 보고 싶었
다.
이게 웬 철없는 생각이냐. 아, 하지만 로비 뮬러가 촬영한 장면 하나하
나의 쓸쓸함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가. 촬영감독은 달랐어도 [천국
보다 낯선]의 인상 역시 그렇지 않았던가. 이런 심정을 한심하게 여기는
자들과는... 음, 친구하고 싶지 않다.
미국 여행을 목전에 두고 이 영화를 본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어찌
되었든 여행 중에 이 영화는 나를 지배했다. 보름 가량의 기간 중 숙소
를 여러 차례 옮겨 다녔는데 숙소 주변이 고적할수록, 숙소 시설이 엉망
일수록 이 영화 생각이 많이 났다. 내가 머문 숙소의 낡은 라디오에서도
느려터진 '블루문'이 흘러나오는 듯하였다.
2. [Fools Rush In]
비행기 안에서 본 이 영화는 뉴욕에서 업무차 라스베가스로 출장 온
알렉스와 멕시코 처녀 이사벨이 사랑에 빠지고 서로의 문화적 차이, 심
리적 차이로 티격태격 우여곡절을 겪다가 마지막에 행복한 결말을 맺는
다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챈들러역으로 유명
한 매튜 페리와 건강미의 화신 살마 헤이약이 주연했다.
영화가 너무 쉬운 나머지 아메리카에선 우연과 마법이 지배하는 사랑
이 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만만히 보였다. 이따위 해묵은 내용, 해묵은 수
법을 가지고서 아메리카로 향하는 나를 유혹해 오다니, 어림도 없었다.
즐기려고 작정하고 나섰다지만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 못지 않게 만약의
경우를 위해,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보다 완벽하고 성공적인 즐거움을
위해 영악하게도 환멸까지 준비해 간 나에게 이런 제의는 전혀 유혹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귀여웠다.
흥미로운 것은, 나같이 미국 문화에 친숙해 있는, 또는 친숙해 있다고
믿고 있는 아시아인은 뉴욕이란 대도시를 여러 가지 이유에서 동경하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보듯이 실제로 뉴요커들의 일부는 오히려 대자연의
공기와 멕시칸의 건강과 낙천성 같은 것에 상시적인 동경을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이다. 아무리 인간이 자기 있는 곳의 저 편을 바라보고 사는 존
재라 하지만 이런 사실은 참 코미디같다. 잠시 왔다가 스쳐가는, 혹은 스
쳐갈 운명의 사람에게야 이국은 언제나 그런 곳인지 모른다.
웅장한 캐년을 배경으로 양가 친지들이 모여 축제를 벌이는 끝장면에
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Can't help falling in love가 흘렀다. 영화는 유혹
적이지 않았지만 영화 속의 이 노래만은 유혹적이었다. 노래 덕분에 영
화를 조금 더 귀엽게 봐 줄 수 있었다. 아 참,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비
로소 이 영화의 제목이 어디서 왔는지 알게 되었다.
Wise me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3. [타노스와 데스피나]
여행을 삼등분했을 때 2기에 해당하는 중간의 나흘 간은 어느 조용한
학원 도시에서 혼자 나돌아다닌 기간이었다. 형편상 그곳을 뜰 수도 없
고 빈둥거리기만 하면 되는 그 짧고도 이상한 기간, 나의 상태는 상주도
아니고 체류라기에도 뭣하고 굳이 표현한다면 단기적 억류라고 할 만했
다.
영화보기는 이 기간에 집중되었다. 그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이 말
을 바꾸면 어디에 떨어져도 혼자서 할 만한 기특한 오락의 하나가 영화
라는 얘기도 된다. 어쨌든 이국에서도 혼자 놓아두면 늘 하던 짓을 그대
로 하게 된다는 사실이 나를 피식 웃음짓게, 한숨짓게 하였다.
첫 번째 선택은 파파다키스라는 그리스 감독의 66년작 [타노스와 데스
피나]였다. 보고 나니 언젠가 우리나라 티비에서 해 준 영화가 아닌가 싶
기도 했다.
마을의 세력자와 그의 압제 하에 있는 양치기 타노스의 대결 구도 속
에서 세력자의 딸 데스피나의 행보가 영화의 흐름을 결정짓는다. 인형처
럼 모셔지며 고이 자란 순결한 데스피나는 마침내 딸을 빼앗길까 전전긍
긍하던 아버지를 배반하고 타노스를 따라나선다. 사이사이 어수선한 분
위기 속에서 거짓 예언자의 세 치 혀에 현혹되어 가는 군중들이 그려지
고, 가학과 피학의 미묘한 심리적 줄다리기를 펼치던 타노스와 데스피나
는 쫓기다가 마지막에 눈부신 태양 아래 절벽으로 가볍게 뛰어 내린다.
비장해할 틈조차 주지 않는, 주저함 없는 그 간결한 매듭이 무척 인상적
이었다.
군부독재가 막 시작되기 직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했다. 현실 정치의
팽팽한 긴장을 짐작케 하는 아주 우의적이고 표현주의적인 흑백영화였
다. 코스타 가브라스,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에 깊이 드리워져 있던
그리스 현대사의 그늘진 면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 계속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