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
- 여행의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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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하루키 신간의 가을



도입부, 그 도시의 가을 묘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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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짐승들의 몸은 다가올 추운 계절에 대비해 눈부신 황금색 털로 뒤덮인다. 이마에 돋은 외뿔은 희고 날카롭다. 그들은 차가운 강물에 발굽을 씻고, 가만히 고개를 뻗어 붉은 나무열매를 탐하고 금작화 이파리를 씹는다.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벽을 따라 세워진 망루를 올라, 나는 저물녘의 뿔피리를 기다린다. 해가 넘어가기 조금 전인 그 시간에 뿔피리는 길게 한 번, 짧게 세 번 울린다. 그것이 규칙이다. 부드러운 뿔피리 소리가 석양에 물든 돌길 위를 미끄러져간다. 뿔피리의 울림은 짐작건대 수백 년간(혹은 더 긴 세월일지도 모른다) 변함없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집집의 돌벽 틈새에도, 광장의 울타리를 따라 늘어선 석상에도 그 음색은 깊이 스며들어 있다.
  뿔피리 소리가 도시에 울려퍼질 때, 짐승들은 태곳적 기억을 향해 고개를 든다. 누군가는 이파리를 씹던 것을 멈추고, 누군가는 포장된 길에 발굽을 쿵쿵 구르던 것을 멈추고, 누군가는 마지막 남은 햇볕 속 낮잠에서 깨어나 저마다 같은 각도로 고개를 쳐든다.
  한순간 모든 것이 조각상처럼 고정된다. 움직이는 건 바람에 부드럽게 나부끼는 황금색 털뿐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는 걸까? 짐승들은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뿔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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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일각수의 꿈>이라고도 번역된 하루키의
80년대 작품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보았던,
조금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미지들로 작품이 시작된다
불확실한 벽에 둘러싸인 도시는 키리코의 그림들을 연상케 한다
증류수같은, 덜어내고 비워낸 아름다운 문장들에 슬퍼진다
주요 모티프는 십대 소년 시절의 기억이지만
인생의 장년을 거쳐 노년에 이르러가는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을,
참으로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서가 단비같이 흐르는 가운데
인간 의식에 대한 집요한 탐색과 하루키다운 형상화,
마음과 의지의 문제가 다루어진다
1부의 자체완결적 아름다움은 교향곡의 1악장 같았고
완서악장같은 2부를 경유하다 보면, 2부 말미에 다시 전율이 온다
마치 정신이 번쩍 나는 스케르초 악장처럼..
이어지는 3부는 교향곡의 종악장처럼 빠르고 급격하게 내달리다
깔끔한 코다로 완성된다.. 환상문학의 범주에서..
소설에 마르케스 작품 인용이 나오지만 마르케스보다
보르헤스를 다시, 제대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르헤스는 도서관만큼이나 책이 많은 아버지의 집에서 자랐고
도서관 사서였으며 말년엔 국립도서관장이었다
그런 그는 꽤 이른 나이부터 시력을 잃어갔다
그림자를 떼어내고 시신경을 잃는 대가로
사방이 벽으로 이루어진 도시에 들어가 해질녘 도서관에서
진녹색안경을 쓰고 오래된 꿈을 읽는 주인공
이쪽 세계에서 역시 작은 산간마을 도서관장인 주인공
그자신 인간도서관으로 주인공과 일체화하는 옐로서브마린소년..
아니 이 작품은 보르헤스에 대한 헌사가 아닌가
무엇보다 도서관에 대한 송가가 아닌가 물리적인 도서관이든
인류 기억의 상징이자 오래된 꿈들의 저장소인 도서관이든..
현실과 비현실의 문제는 이제 관심거리도 못 된다
내 느낌엔 현실과 비현실이 섞여들고 넘나드는 그 자체가
리얼리티가 된 지 오래다 과거와 현재도 마찬가지..
둘은 관념 속에서 공존하며 그렇기에 일상에서 공존한다
오히려 리얼리티를 감지하고 구성하고 변형하는 용기,
즉 그릇으로서의 인간 의식, 그리고 무의식,
혹은 의식과 비의식의 세계가 미스테리다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발견한 가을



GQ 10월호 소니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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