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사육제Carnaval>는
슈만의 피아노 작품 <사육제>를 모티브로
한 여인을 회상하는, 그저 하루키스러운 하나의 픽션이지만
내가 하루키를 즐겨 읽는 방식인 (음)악서의 관점에서는
슈만에 대한 집중탐구이자 (최)고급 음악에세이였다
관련 대목 발췌해 타이핑하면서 조금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
우리가 이의를 제기할 바 없이 훌륭한, 이른바 궁극의 피아노곡으로 선택한 것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소나타 몇 곡과 슈만의 피아노 작품이었다. 그중에서도 한 곡만 남긴다면 뭐가 좋을까?
딱 한 곡만?
그래요, 딱 한 곡만, 하고 F*는 말했다. 말하자면 무인도에 가져갈 피아노곡.
어려운 질문이다. 집중해서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슈만의 <사육제>”라고 나는 끝내 마음먹고 말했다.
F*는 실눈을 뜨고 한동안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테이블 위에서 깍지 끼고, 관절을 또각또각 꺾었다. 정확히 열 번. 주위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돌아볼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사흘 지난 바게트를 무릎에 대고 부러뜨리는 것처럼 메마른 소리였다. 남녀 불문하고 그렇게 큰소리로 관절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 양손 관절을 힘주어 열 번 꺾는 것은 그녀가 긍정적으로 흥분했을 때마다 꼭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사실을 몰랐으니, 그녀가 무슨 이유에선가 화가 난 줄 알았다. 아마 <사육제>라는 선택이 부적절했나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옛날부터 슈만의 <사육제>를 무척 좋아했으니까. 만약 그것 때문에 누가 화를 내고 주먹을 날린다 해도, 역시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정말로 <사육제>면 되겠어요? 동서고금 피아노곡 중에서 딱 한 곡만 무인도로 가져갈 수 있다는데.”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긴 손가락을 하나 쳐들고 확인하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나도 썩 자신할 수 없었다. 만화경처럼 아름다우며 인지를 초월해 지리멸렬히 펼쳐지는 슈만의 그 피아노곡을 남기기 위해,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과, 평균율과, 베토벤의 후기 피아노소나타와, 웅장하고도 차밍한 3번 콘체르토를, 눈 딱 감고 포기해버릴 수 있는가?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F*는 상태를 점검하듯 몇 번 힘주어 양 주먹을 쥐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당신 취향이 꽤 괜찮네요. 그리고 그 용기에 감탄했어요. 음, 나도 그렇게 할래요, 슈만의 <사육제>만 남기기로.”
“정말로?”
“네, 정말로. 나도 <사육제>는 옛날부터 무척 좋아했어요. 아무리 들어도 신기하게 질리질 않아요.”
그러고 나서 우리는 <사육제>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면서 피노 누아르 한 병을 주문해 바닥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부담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말하자면 <사육제> 친구다. 그 관계는 결국 반년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만든 것은 사적인 <사육제> 동호회 같은 것이었다. 꼭 두 사람이어야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인원수가 둘을 넘는 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말고 우리만큼 슈만의 <사육제>를 애호하는 사람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그뒤로 상당히 많은 수의 <사육제> 레코드와 CD를 들었다. 어느 콘서트에서 누가 이 곡을 친다고 하면 만사 제치고 같이 들으러 갔다. 노트에 따르면(나는 각각의 연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세 명의 피아니스트가 <사육제>를 연주하는 콘서트에 갔고, 총 마흔두 장의 <사육제> 레코드와 CD를 들었다. 그리고 그 연주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교환했다. 실로 많은 동서고금의 피아니스트가 <사육제>를 녹음했다. 제법 인기 있는 레퍼토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거다’ 하고 수긍할 만한 연주를 꼽으려 들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했다.
연주가 아무리 기교적으로 완벽하다 해도, 그것을 구사하는 방법이 음악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사육제>라는 곡은 그저 무기질적인 손가락 운동으로 전락해버린다. 매력의 태반이 사라져버린다. 사실 대단히 표현하기 어려운 난곡이다. 어지간한 피아니스트는 감당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실명을 언급하진 않겠지만, 세간에서 대가로 통하는 피아니스트조차 이 곡에서만은 그르친 연주, 재미없는 연주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이 곡을 경원시하는(그렇다고밖에 볼 수 없는) 피아니스트도 많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생애를 통틀어 슈만의 음악을 즐겨 연주했지만, 어째서인지 <사육제>는 정규 녹음을 남기지 않았다. 스뱌토슬라프 리히테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언젠가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사육제>를 꼭 들어보고 싶다는 건 나 하나만의 소망이 아닐 것이다.
참고로 슈만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 중 그 음악의 훌륭함을 알아준 이는 거의 없었다. 멘델스존도 쇼팽도, 슈만의 피아노곡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의 작품을 헌신적으로 꾸준히 연주해온 아내 클라라조차(그녀는 당대의 손꼽히는 명피아니스트였다) 이렇게 변덕스러운 즉흥곡 같은 피아노 작품 말고 정통 오페라나 교향곡을 쓰면 좋을 텐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소나타 같은 고전적인 형식을 원래부터 선호하지 않았던 슈만은 이따금 종잡을 수 없을 만큼 몽상적인 작품을 써냈다. 기성 고전주의에서 벗어나 바야흐로 새로운 낭만파 음악을 시동하려 했지만, 많은 동시대인의 눈에는 확실한 기초와 내용이 결여된, 익센트릭한 작품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그 대담할 정도의 익센트리시티가 낭만파 음악을 전진시키는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지만.
어쨌거나 그 반년 동안, 우리는 틈나는 대로 열심히 <사육제>를 들었다. 물론 <사육제>만 들은 것은 아니고 때로는 모차르트도 듣고 브람스도 들었지만, 직접 만나면 반드시 누군가의 <사육제>에 귀기울이고, 그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내가 서기를 맡아서 우리의 의견을 요약하고 기록했다. 그녀가 우리집에 온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그녀의 집로 가는 쪽이 훨씬 많았다. 그녀의 집은 도심에 있었고 우리집은 교외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둘이서 총 마흔두 장의 <사육제>를 듣고 난 후, 그녀는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의 연주(엔젤반)를 베스트로 꼽았고, 나의 베스트는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연주(RCA반)였다. 우리는 한 장 한 장의 음반을 면밀히 채점했지만, 물론 그런 순위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그건 덤으로 따라오는 놀이 같은 것이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해 주고받는 심도 있는 대화, 열의를 품을 수 있는 무언가를 거의 목적 없이 공유하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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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슈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슈만은 슈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젊어서 매독에 걸렸고, 그 병을 몸 속에 지닌 채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갔어. 게다가 원래부터 분열증 증세가 있었지. 일상적으로 집요한 환청에 시달리고, 몸이 한번 떨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어. 그는 자신이 악령들에게 쫓긴다고 믿었어. 악령들의 존재를 진짜로 믿은 거야. 끝나지 않는 무서운 악몽에 쫓겨서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기도했어. 라인강에 몸을 던지면서까지. 내적인 망상과 바깥의 현실이 그의 안에서 떼어낼 수 없이 뒤섞여간 거야. 이 <사육제>는 꽤 초기의 작품이라, 아직 그의 악령들이 뚜렷이 얼굴을 내밀지 않았어. 카니발 축제가 무대이니 도처에 명랑한 가면을 쓴 자들이 넘쳐나지. 하지만 그저 단순히 흥청거리기만 하는 카니발이 아니야. 이 음악에는 이윽고 그의 안에서 온갖 잡귀로 발전할 것이 차례차례 얼굴을 내밀거든. 가볍게 첫선을 보이듯, 모두 유쾌한 카니발의 가면을 쓰고서. 일대에는 불길한 봄바람이 불고 있어.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모든 이에게 대접되지. 사육제. 이건 바로 그런 유의 음악이야.”
“그러므로 연주자는 등장인물들의, 가면과 그 아래 양쪽 모두를 음악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그런 뜻이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야. 바로 그거. 그것이 표현되지 못한다면 이곡을 연주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이 작품은 어찌 보면 환락의 극치에 있는 음악이지만, 말하자면, 환락이 있기에 비로소 정신의 밑바닥에 생식하는 사악한 것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거야. 그들은 암흑 속에 있다가 환락의 음색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지.”
그녀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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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제법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슈만의 <사육제>를 연주하는 콘서트가 열리면 가능한 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그때마다 객석을 열심히 둘러보면서, 혹은 휴식시간에 로비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면서 그녀의 모습을 찾는다. 실제로 발견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인파 속에서 그녀가 당장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예감이 떠나지 않았다.
<사육제>의 새로운 음반도 여전히 사모으고 있다. 그리고 노트에 채점을 매긴다. 수많은 신보가 나왔지만 나의 베스트는 지금도 변함없이 루빈스타인이다.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는 사람들의 가면을 억지로 벗기려 하지 않는다. 그의 피아노는 가면과 민낯 사이를 바람처럼 부드럽고 경쾌하게 빠져나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