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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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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최 윤, 결여의 여행, 바르셀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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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윤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중에서
- 결여의 여행, 바르셀로나 -
여행의 길은 발길이 좇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다.
한 여행에 우리는 그 전에 했던 수많은 여행의 길을 동반하고 떠난다. 여행의 냄새가 거의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다른 여행들의 흔적을 깨워일으키기 때문이다. 여행의 냄새란 무엇일까. 가슴을 시리게 하는 것, 가슴을 메이게도 하고, 때로 무섭게 뛰게 하는 것. 여행의 냄새란 바로 그 이전에 했던 숱한 여행의 기억의 뒤섞임, 그것이다.
그 누적이 끊임없이, 다시금 떠나게 한다. 머리에 앞서 몸을 부르고, 정연한 기억에 앞서 몸이 기억하는 아주 에로틱한 행위로 여행의 한 성질을 설명해도 될 것이다.
이렇게, 아주 요약해서 여행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은 일종의 육체적 중독이다.
여행이 중독인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마비상태를 즐기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마비에까지 이르는 취기의 과정을 즐긴다. 의식이 비워지는 순간의 무책임한 절정을 맛본 사람은 그 순간을 찾기 위해 떠나는 일을 멈추기 어렵다. 당장 이름지을 수 없는 어떤 결여가 절정의 순간들을 찾아나선다.
예를 들면 내게 있어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의 여행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바르셀로나를 자주 여행했지만, 그리고 내가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그 도시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문화를 알고자 하는 순수한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어떤 결여에 의해 자주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여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탈로니아 지방에 속하는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 자주 그러하듯이,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한 도시로서보다는 카탈로니아라는 독립된 문화적 색채로 내 머릿속에도 존재한다. 내게 바르셀로나는 그 현실적인 면모와 무관하게, 내 고향의 이웃도시 정도로 익숙하게 혼자 길들인 그런 환상의 도시다. 그 도시로 훌쩍 떠나던 당시의 나의 내적인 상황과 나를 맞는 도시의 풍경이 너무도 비슷하게 닮아 있어, 바르셀로나로의 여행을 여행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내게 여행에 대한 본질적인 어떤 문제를 제기하게끔 만든다.
내가 약 오 년을 산 적이 있는 프랑스 남쪽의 프로방스 지방의 소도시 엑-상-프로방스에서 나는 우울할 때면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꼭 우울할 때만이었을까. 너무 광적으로 기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정작 몸이 떠날 수 없을 때는 바르셀로나의 몇 개의 동네를 생각했다. 가우디의 초현실주의적 건축물과 현대가 시작되는 그곳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뒷골목,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과 그 골목에 널려진 빨래와 지중해 기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음식의 냄새가 배어 있는 길들. 프로방스가 내게 이국이었다면 바르셀로나의 몇몇 구역은, 60년대의 서울이나 70년대의 서울과 현실적으로 유사한 점은 드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나의 고향 서울이었다.
물론 나는 바르셀로나가 정성들여서 만들어낸 많은 예술가들, 음악가와 작가들을 내 나라의 작가들이나 예술가들만큼이나 좋아했다. 나는 그들의 감각성과 어두운 운명을 받아들이는 회화적인 낙천성을 좋아했다.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수다와 고통의 격렬함과 삶에 대한 사랑의 눈빛.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셀로나는 사람 하나가 지나가기 어려운 골목, 낡은 건물의 담이 아슬하게 휘어지면서 만들어내는 골목길에 겨우 비집고 들어간 햇살, 그 빛 속에 널려 있는 눈부신 빨랫감, 일상의 방치된 고성과 소음과 값싼 삶의 냄새를 통해 내 유년의 서울을 연상시켰기에 나는 외로움의 방패를 그 도시로 정하고서, 바르셀로나라는 하나의 상징적인 고향을 향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이것은 엄밀하게 여행이라 말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고향으로 떠나는 것을 여행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한참동안, 적어도 내가 유럽에 머무르던 동안에는 내 고향의 에르자츠로서 내 머릿속에 자리잡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한번도 여행자의 시선으로 이 도시를 알지 못했다. 내가 이 도시를 좀더 객관적으로, 소급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몇 년 후에, 내가 서울로 돌아와서, 나의 고향의 거리를 둘러보고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모르던 바르셀로나를 나의 감정의 투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침내 바르셀로나의 새삼스런 여행이 가능하게 됐다고나 할까?
이때 눈을 감고 책장을 더듬었다 해도 내 손의 감각은 몬탈반(Manuel Vazquez Montalban)이 쓴 소설 <피아니스트( Le Pianiste)>를 구별해내었을 것이다. 내가 보지 못한 20년대, 50년대, 그리고 70년대의 바르셀로나의 한 구역의 냄새와 분위기를 그토록 잘 되살려낸 놀라운 소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내 삶에서 바르셀로나를 도망지로 삼던 시간대는 지나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적어도 나의 바르셀로나는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여전히 서너 명의 친구가 있고. 여전히 지중해의 빛을 받으며 서 있을 갈색과 자주색, 노란색의 벽이나 짙은 초록빛의 나무 덧문들 뒤에서 낮에는 잠을 자고 해가 지면 밖으로 나와 긴 저녁나절의 식당과 술집 순례를 시작하는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 그러니까, 여름의 여행지를 아직 결정하지 못했을 때, 내가 다시 보고 싶었던 도시는 바르셀로나, 바로 그 도시였다. 시간, 돈, 마음에 두루두루 여유가 없던 유학 시절, 그 여유 없음을 잊기 위해 자주 그랬던 것처럼. 훌쩍 밤 기차나, 고물차를 타고 지중해변을 달려 프랑스 국경을 넘고, 그러자마자, 나 같은 많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들의 우수와 걱정거리와 불안을 단번에 집어삼킬 줄 아는 바르셀로나. 이런 도시는 지구상에 그리 흔하지 않다. 이토록 완벽하게 현재를 마비시키는 도시는. 적어도 여행자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꼭 여행자에게만 그럴까. 나는 그 도시에 관한 한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나의 환상인지 잘 구별할 수가 없다.
모든 도시에 대해 환상할 권리가 여행자에게는 있다. 그리고 모든 환상은 꼭 증명해 보일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 나는 도쿄를 잘 모르지만, 나의 친구 필립 퐁스가 쓴 <에도에서 도쿄까지(D'Edo a Tokyo)>를 읽고 나서, 내가 본 도쿄 이상의 도쿄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일본인의 도쿄와 설령 거리가 있다고 한들 어떻단 말인가. 뛰어난 감각의 일본문화 연구가인 이 친구는 그 책을 보내주면서 이렇게 썼다. "여성을 탐험하는 마음으로 도쿄의 거리들을 탐험했노라"고.
어느 누구도 한 도시에 대해서 완벽하고 객관적인 이해를 할 수 없다. 더욱이 여행자로서는. 어느 누구도 한 사람에게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바르셀로나는 그렇게 여전히 나에게 환상의 도시로 남아 있다. 아무리 여러 번을 탐험해도 현실적으로 잡기 어려운 그런 여행도 있는 것이다. 현실의 척도가 아닌 다른 것이 그 여행의 동인이 되었기 때문에. 나의 바르셀로나처럼 자주 우리들의 여행은 절대적인 결여에 바치는 헌납물에 다름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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