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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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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출장 후-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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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 빗줄기라는 우수에 힘입어 이 년 전보다 오붓해진 느낌의 성당 두오모.
1. 처음 감상 :
올 1월에 일주일간 베니스와 모데나를 다녀왔고, 4월 16일부터 일주일간 밀라노 출장이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잠깐..그리고 밀라노에서 계속..향후 2,3년 내 마지막 출장일 듯 하며,
이젠 익숙해져버린'쓸쓸한 피곤함의 약소한 쾌락‘’에 대해 당분간 향수어린 감회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구요.
일이 끝난 자유시간에 트램을 타고 밀라노 전역과 외곽을 돌아다녔는데 2006년에 한 번 다녀왔던 기억이라서인지 길은 사뭇 익숙했습니다. 로이드 호텔 인근의 작은 튤립 전문 꽃가게가 세 개소로 확장되어 있는 걸 보고 시간이 흘렀다는 걸 실감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전 그 가게가 곧 망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컴컴한 얼굴의 중년 아랍 여성이던 직원이 모두, 가슴이 깊이 파인 노랑 유니폼의 발랄한 여성들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튤립은 더 이상 많지 않았고 , 꽃들은 모두 뒤섞였더군요. 처음 밀라노에서 두리번 거리던 때, 그 어둡던 가게를 가득 채우던 선홍색 튤립이 어찌나 기억에 남았던지요. 이제 거리는 단순해졌고 밀라노는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꽃을 보았는지는 더 희미합니다
2. 도정일님 , 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심의 극장 / 2008/ 01/28 중에서:
... 중략..
기억과 사유, 상상과 표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독특한 능력들의 목록을 대표한다. 인간이 천사를 향해 자랑할 것도 결국은 그 네 가지 능력으로 집약된다. 인간은 기억하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표현하는 존재이다. 그 네 가지 능력의 어느 것도 완벽하지 않다. 기억은 수많은 구멍들을 갖고 있고 사유는 불안하다. 상상은 기억과 사유의 한계를 확장하지만 유한한 경험의 울타리를 아주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의 형식과 내용도 시간성에 종속된다. 그러나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인간적 시도들은 그것들이 지닌 한계 때문에 무용해지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것들만이 가지는 순간적 아름다움의 광채를 포착하고 표현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워즈워드의 5월의 꽃, 푸쉬긴이 노래한 해질녘 다리 위의 소녀와 잠자리 떼, 괴테가 본 마리엔바드의 위대한 가을 숲, 프로스트의 눈 내리는 겨울 숲 - 이런 것들은 그 순간성 때문에 아름답다.
기억이 완벽할 수 있다면 아무도 기억하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며 사유가 완전할 수 있다면 아무도 사유의 엄밀성을 이상화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의 한계 때문에 상상은 위대해지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도전 때문에 표현은 아름다워진다. 책은 인간이 가진 그 독특한 네 가지 능력의 유지, 심화, 계발에 봉사하는 가장 유효한 매체이다. 문자를 고안하고 책을 만들고 책을 읽는 것은 결코 ‘자연스런’ 행위가 아니다. .... 중략
.... 그러나 책과 책읽기는 인간이 이 능력을 키우고 발전시키는 데 중대한 차이를 낸다. 책을 읽는 문화와 책을 읽지 않는 문화는 기억, 사유, 상상, 표현의 층위에서 상당히 다른 개인들을 만들어내고 상당한 질적 차이를 가진 사회적 주체들을 생산한다. 어떤 인간을 생산하는가에 따라 사회는 달라지고 문명도 달라진다. 누구도 맹목적인 책 예찬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책읽기가 인간을 더욱 인간적이게 하는 소중한 능력들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결코 희생할 수 없는 매체라는 사실이다. 그 능력의 지속적 발전에 드는 비용은 싸지 않다. 무엇보다도 책읽기는 손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량의 정신 에너지가 투입돼야 하고 훈련이 요구되고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정신습관의 형성이 필요하다.
책의 세계는 정신의 자기회귀를 강화하는 고독한 성찰과 불안한 의심의 극장, 의식이 의식을 만나 협상하고 교섭하는 대화의 극장, 인간이 유한성의 조건 속에서 그 유한성에 보복할 모든 가능한 책략들을 꾸미는 음모의 극장이다. 그 극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신적 비용은 싸구려가 아니다. ..중략
3. 셋, 쪽지 :
"나는 여기 멀리가기 위해 이렇게 쪽지를 남기네. 지난 유럽 여행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곳이 포르투칼의 ‘로까곶’이라는 장소였어. 유럽 지도를 놓고 볼때 가장 서쪽에 위치한 포르투칼과 그 포르투칼에서도 가장 서쪽으로 들어선 곳. “ 여기서부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던 광고처럼, 대서양의 처음이자 유럽 대륙의 마지막인 곳이지.
난 내가 돌아다니며 본 것들의 결말이 하나의 다른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이 느낌이 훌륭했어.
이건 바흐의 음악 같잖아. ..저 끝없는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고 다시 튕겨 돌아오던 그 음악처럼, 순환하고 반복할 뿐인, 하나의 시작이 하나의 끝으로 막을 내려버리지 않는, 결론없는 음악들 말이지.
파도, 포말, 바람의 장소인 로까곶에서 나는, 눈이 아니라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어. 열려진 가슴으로는 결론없는 음악들이 들이쳤고 다 제 몫 이상을 했어. 그건 말이지.. 되풀이해서 맞이하는 시간들이 좋을 수 있다는 데 대한 안도감이었던 것 같아. 매일 나가는 직장처럼, 언제나 같이 있어야 하는 결혼 생활처럼. 마지막까지도 어쨌든 되풀이 될 하루라는 시간들처럼. 하나의 근사한 결말 없이도 그냥 계속 무한히 좋을 수 있다는 거, 새로울 수 있다는 거. 스페인을 가로질러 로까곶에 다다르고, 거기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여정이란 건, 그런 여행이었어.
..하꼬다떼도 그런 곳일까? 훗까이도의 최남단이라는..
북쪽, 남쪽, 서쪽, 동쪽, 끝을 가보고 싶은 이 욕구를 님이사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게 ‘간다’,는 동사는 너무나 황홀하다오. 이해해 주시게. "
- 익명을 요구한 누군가, 일본 하꼬다떼로 떠나기 전 남긴 편지 중에서
4. 넷, 감상:
여행에 대한 내 감상 중 하나는, 저 위 두 텍스트간의 저울추를 내 삶의 과정에서 조율해 보는 것이다. 그건 마음 밑바닥 영토를 뒤지는 매우 사적인 작업인 동시에 생존을 넘어선 어떤 품위의 발견, 혹은 일상적 한계를 회의하고자 하는, 속되지만 평범한 욕구와 연관된다. 예전에 이런 작업은 주로 도정일 님 말씀하신 그 은밀한 무대, 책의 세계를 통해 일부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그분 만큼 책의 효용을 믿지 않던, 건방진 작업 결과는 초라했다..-_- 돌이켜 보니, 단지 책을 읽는 순간 자체 속에서는 내 의식에서 각성할만한 재료를 만난다는 게 힘든 일이었다고 본다. 책읽기는 오히려 자아의 객관화를 방해하였고 인문적 교양의 실체가 결국 고양된 정신의 영광이라는 마취적인 쾌락을 끝없이 자극하는 일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혐의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혐의는 주로, 책 밖의 세계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저열하다는 점, 그 저열함을 수용하거나 일상화하는데 있어 도정일님 같은 의미에서의 각성이나 경험은 오직 책읽기를 통해서는 매우 힘들었다는 점에서 비롯했다.
차라리 내 의식 속에서 구축되어 왔고 교묘한 틀로 자리잡은 책읽기의 학습된 교양을 다 버려야했을 때, 그런 것들이 왔다. 책읽기로부터 가능했던 가장 중요한 자산 때문에 또한 중요했을 삶의 몇 순간을 놓쳐야 했던 걸 눈치 채고나서였다. 깨는 순간, 개인적인 트러블들은 있는 그대로의 일들을 객관화 하기위해 노력하고 겪어내는 일로만 가능했으며, 나중에, 정신적 학습의 무대에서 철저히 유기되었을 때 밀려 왔다. 사실 어떤 각성들은 책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강렬한 현재적 테마라고 생각한다.. 책읽기의 세계는 이런 강렬함들을 희석하거나 유예 시키기도 한다. 삶이 포맷된 양식처럼 정렬되어 있다는 희망들 아래 독서자를 묶어놓기 때문이다. 아마 책읽는 개인들은 사회적으로 좀 더 안전한 인간들일 것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의 규범과 저자라는 타인과의 훈련에 길들여지니까.
그러나 책 밖의 세계는 흘러가버리는 시간들, 무지막지한 현재성의 공포로 점철된 시간들이며, 결국 붙박힌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이런 뼈저린 결별을 인내하는 게 그 세계라는 걸 알게 되는 곳이었고, 그건 단순하게 내 식으로 정리하자면 내가 나로서 연관되지 못한 시간에 대한 의식의 출발인 것 같다. 내가 놓인 곳의 불명확성, 부재감, 텅빈 시간, 그것만큼 자기 좌표와 세상이라는 실체를 강렬하게 의식하는 순간이 있을까? 그건 바로 자기 소외에 대한 의식일 텐데 말이다..
소외, 라는 단어는 한 때 내 욕망의 리스트로 자리했던 트리니티 칼리지를 방문한 그 여름을 떠올리게 한다.
몇 년 전, 정수리가 쪼개질 듯 내리쬐던 태양 빛을 받으며 이스탄불과 더블린과 버밍햄을 다녀왔던 그 때, 나는 간혹 호되게 텅빈 시간을 경험했었다. 몸이 힘들어서, 혹은 풍경이 너무 황홀해서도 아니었고 아마 내가 처한 풍광이 너무 낯설어서, 혹은 나라는 존재의 구성요소에 하나도 공명되는 게 없을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거나 마음이 아무것도 지어내지 못해서, 작동될만한 지식이 없어서.. 즉, 어리둥절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잠깐의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이며 차라리 하나의 공포에 가까웠던 여행의 단상으로 남았다.
이 공포는 옥스포드 트리니티 칼리지를 방문했을 때 최고에 달했다. 베를린 목사 부인의 권유로 여행을 마음먹었던 트리니티 칼리지, 무엇을 만나려고 했는지 알 수 없으나 가면 있으리라는 여행자들의 숙제를 안고.. 과거 마음에 내려앉은 것들을 만나리라는 희망대로..
그 회벽의 돌들, 종교와 신성에 대한, 학문과 진리에 대한, 젊음과 몰입에 대한 단편적인 인상들의 폭격과 찬란한 대상이 죄없이 드리우는 기묘한 이질감이 가득했다.
삶에서 구체화되지 못하는 모든 요소는 결국 기형도식으로, ‘내 것이 아닌 것들’ 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떠난다. 무게를 갖지 못한 쾌락, 실체가 없던 개인의 소감들은 ‘은밀한’의식의 무대엔 등장했을지라도 삶의 단계라는 ‘그랑빨레‘엔 서보지도 못한 채 마감되는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 여행에서 내 삶의 언저리에 있던 한 시절의 의미들이 전부 가버렸던 그 날이 아직도 가끔 기억 난다.
내가 떠나 보낸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욕망의 리스트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삭제했을 뿐인건지, 이별 끝에 실체의 한 부분을 잊어야했던 것인지, 확실한 건, 트리니티 칼리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책읽기의 과거로 형성된 것들 중 가장 무거운 추를 가슴에 얹고 있었고 이것들을 그 곳 교정에 다 내려놓고 왔던 것 같다. 그 이후에 아마, 현재의 자신과 자기 공동체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 생각한다 :)
한편으로는 이 소외의 발견조차 어떤 과거의 시답잖은 훈련, 혹은 책 속 규범의 학생으로서 견습을 거쳤던 시간에 의한 부산물일 지 모른다고도 생각한다. 그리고..이렇게, 목적없던 시간들도 보상이 있다는 위안을 삼으련다.
여행은 아마.. 책읽기라는 행위와 일상의 시간이라는 위태로운 두 줄 사이 어딘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또한, 도정일님의 텍스트와 하꼬다떼로 떠난 사람이 남긴 쪽지의 어느 중간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ps. 미국 생활은 여행이 아니라 생활이 되겠지만.. 그래서 이토록 반갑지 않은 것인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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