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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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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호, 나가사키 - "동경(憧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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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pungwoldang.co.kr/
의사이며 음악애호가이며
클래식음반전문매장인 풍월당 주인인 박종호씨의,
(예술편지) 나가사키 - “동경(憧憬)”
“소년 시절의 꿈이 날아간 곳”
어린 시절 늘 바다를 보고 살았다. 해수욕이나 선탠을 하는 그런 바다는 아니다. 어선이 들어오고 어부들이 그물을 말리는 그런 바다도 아니다. 내가 보던 바다는 수천 톤, 수만 톤의 기선(汽船)들이 들락거리는 대규모 항구였다.
아, 기선, 이 얼마나 오랜만에 불러보는 추억의 명사(名辭)인가? 집보다 큰 증기 터빈을 돌려서 움직이던 산채(山砦)만큼 큰 선박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그 배들을 통해 쌀과 밀과 석유가 들어왔고 얼굴이 시커먼 미군들도 들어왔다. 그리고 같은 부두를 통해서, 삼촌과 옆집 형들이 월남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나는 늘 수십 척의 기선들이 정박하던 부두의 소년이었다. 소년에게는 학교 교사(校舍)보다도 배가 더 큰 것이었고, 높은 빌딩보다도 배의 갑판이 더 높았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면 저 멀리 배들이 들고나는 것이 보였다. 소년들이 공놀이를 하다가 쉴 때면 수정산(水晶山)의 산허리를 가르고 나있는 산복도로(山腹道路)의 난간에 기댄다. 그러면서 멀리 떠나가는 기선들을 바라보고는 하였다.
해가 떨어져서 친구들이 돌아가도 나는 혼자서 난간에 매달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배들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선(線)으로 배들이 사라질 때면, 마지막까지 보이는 마스터의 높은 꼭대기를 보면서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였다. 하지만 둥근 지구보다도 소년에게 더 궁금했던 것은 바다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으며 누가 사는가 하는 것이었다. 늘 물리나 과학보다는 인문과 지리에 관심이 많은 어린 시절이었다.
배들이 가는 곳도 역시 항구였을 것이니, 소년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파리나 로마 보다는 부두에서 주워들은 로테르담이나 함부르크, 마르세유 같은 이름이 더 익숙하였다.
저 바다만 건너면 있을 미지의 항구들..... 그곳에서 오는 선박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깃발을 바라보면서, 저 너머에는 깃발들에 그려진 별이나 달처럼 더 빛나고 더 아름다운 세상이 있으리라고 믿었다.
소녀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가던 시절이었지만, 소년에게 가라치면 그곳은 서울이 아니라 바다 건너의 항구였을 것이다.
부두의 소년에게는 서울보다도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렇게 소년은 네덜란드 깃발을 단 흰 화물선과 파나마 깃발의 검은 유조선을 바라보면서, 가슴에 동경(憧憬)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중학교를 가자 그 학교는 해운대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 위에 있었다. 3년 내내 바다가 보이는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물감을 묻힌 손으로 사춘기를 보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언제나 음악을 들었고, 우리 미술부원들(아, 자랑스러운 미술부들, 그들은 자만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銅)으로 배지까지 만들어서 교복 위에 달고 다니는 치기도 부렸었다)은 모두 음악과 영화에의 열광자들이었다. 지금도 미술실을 떠올리면 늘 흐르던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이 들리는 것만 같다.
너무나 영화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소설 ‘허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나왔을 때, 그것은 거의 그의 이야기였다. 미술실에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던 우리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산길을 내려오곤 하였다.
멀리 해운대의 불빛들이 신기루처럼 반짝일 때 우리는 나운영의 ‘달밤’이나 푸치니의 ‘허밍 코러스’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의례 나는 그에게 음악을, 그는 나에게 영화를 이야기하였다.
그의 집은 해운대에서 온천여관을 하였다. 주말이면 우리는 NHK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보기 위해, 몰래 친구 집의 빈 객실을 전전하면서 TV의 채널을 돌렸다.
거기에는 우리나라 TV에서는 볼 수도 없었던 프랑스 영화와 이탈리아 오페라가 후쿠오카나 나가사키 NHK의 전파로 잡히곤 하였다. 그렇게 나가사키는 소년의 마음속에 동경의 항구로 자리잡아갔다.
그 허리우드 키드는 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가 되었다. 지금은 공짜로 실컷 영화를 볼 터이니, 어른이 된 그는 여전히 행복할 것이다.
나는 자라서 어려서 상상했던 곳들을 하나씩 발로 밟아가기 시작하였다. 답사의 행위야말로 나의 어린 추억을 정리하는 과정이었다.
나그네가 된 나는 환상을 깨어가면서 혼자서 실망하고 혼자서 기뻐하였다. 때로는 외로움에 울고 때로는 한잔 술에 즐거워하였다.
얼마나 소년은 그 항구들이 보고 싶어 했던가? 다만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타야했으며, 멋진 항구가 아니라 역사(驛舍)를 통하여 들어가야만 했지만.....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을 때의 감회를 어찌 필설로 하리요?
나가사키는 소년의 고향 부산에서 가장 가까운 곳 중의 하나였다. 사실 부산에서는 서울보다도 나가사키가 가깝고, 나가사키에서는 도쿄보다 부산이 더 가깝다. 부산 수정산의 산복도로에서 날씨가 좋으면 일본의 쓰시마가 보이고, 쓰시마는 국제로밍을 하지 않고도 한국의 휴대전화가 걸리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는 데는 수십 년의 세월이 걸렸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도 독특한 도시다. 이 항구는 일본에서 가장 먼저 서양에 개방된 곳으로서, 어디나 양풍(洋風)의 냄새가 짙게 배여 있다. 그야말로 동서양(東西洋)의 멋이 절묘하게 조화된 곳이다.
16세기에 처음 포르투갈 선박이 나가사키에 닻을 내린 이래로, 포르투갈과 스페인, 이어서 네덜란드의 문화가 들어와서 4백년간 거의 서양화(西洋化)가 되어버린 곳이다.
그 후 일본이 쇄국 정책을 실시하는 동안에도 나가사키만은 서양선박과 서양인들에게 개방되어 그들의 문화를 받아 들였다.
서양인들의 놀라운 문화를 두려워한 일본 당국은 나가사키의 항구 안에 ‘데지마’라는 인공(人工)섬을 만들어, 그곳에서만 네덜란드인들이 거주하게 하였다.
하지만 문화에도 고급과 저급이 있으며, 그것은 또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데지마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4백년이 흐르면서 서양 문화는 점점 시내의 곳곳에 스며들어서, 이곳을 일본 속의 서양 항구로 만들고 말았다.
그 상징의 하나가 카스텔라다. 어려서부터 어머님이 유달리 좋아하시던 카스텔라. 홍차에 곁들이던 노란 카스텔라 한 조각은 지금도 어머니의 단정한 모습과 함께 나의 머릿속에 행복하고 평화로웠던(비록 늘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기(少年期)를 떠올리게 한다.
나가사키에 가면 그 유명한 카스텔라와 홍차를 마셔보리라고 작정했었지만, 너무나 많은 카스텔라 가게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카스텔라는 원래 포르투갈 선원들이 전파한 것이지만, 그들은 이것을 나가사키의 특산물로 만들어서 결국 그들의 것이 되고 말았다.
나가사키에는 수백년 된 집안의 카스텔라 장인(匠人)들도 있다. 진짜 장인은 여럿이 나누어 제과(製菓)공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고수(高手)가 계란을 깨는 것에서부터 마지막 설탕을 묻히는 것까지를 혼자서 직접 하면서, 일종의 카스텔라도(道)를 완성한 것이다.
그 외에도 영국 출신의 워커가 19세기에 나가사키에 ‘저팬 브루워리 컴퍼니’를 세웠으니 그것이 일본을 대표하는 기린(麒麟)맥주가 되었으며, 올트는 규슈지역의 광대한 차(茶)밭을 사들여서 일본차(茶)를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수출하기 시작하였으며, 글로버는 트롤 어법(漁法)을 일본에 도입하여 이미 백 년 전에 일본 어업을 세계정상급으로 도약시켰다.
이 모든 것이 작은 도시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나가사키라면 원자폭탄이 떨어진 도시로 먼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원폭으로 도시가 큰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도 항구를 바라보는 남쪽 끝의 미나미야마테와 히가시야마테 언덕 지역은 무사하였다.
이곳은 서양인들이 거주하던 곳으로, 백여년 전 나가사키의 서양문화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그 언덕의 한 지역은 다들 ‘구라바엔’이라고 불러서 마치 일본지명처럼 여겨지지만, 원래 글로버라는 사람의 정원(庭園)이라는 뜻으로 글로버원(園)이라는 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나가사키에서 근대적인 상사(商社)를 설립했던 사업가이다. 나가사키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서양식 건물들을 모아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그리하여 구라바엔은 서양풍의 정원 안에 서양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다.
언덕에 서면 연상되는 것은 당연히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나가사키에서 초초상의 집을 찾는 헛된 수고는 하지 않기를 바란다. 오페라의 이야기는 픽션이니 그녀의 집은 남아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롱의 원작 소설이 19세기 말의 나가사키를 실제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어딘가에서 초초상이 나타날 것만 같은 분위기이기도 하다.
구라바엔 언덕에 올라오면 오페라에서처럼 항구를 들고 나는 배들이 정말 잘 보인다. 그러니 아마 이 정도의 위치에 핑커톤이 비운(悲運)의 현지처(現地妻) 초초상을 위해 999년 동안 빌린 집이 있었을 것이라고 오페라 팬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글로버의 부인이 쓰루라는 일본 여인이어서 그녀가 초초상의 모델이라고도 하지만, 이쯤 되면 이미 호사가들의 입방아의 수준으로 전락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구라바엔의 언덕에는 역사상 최고의 나비부인이었던 마리아 칼라스도 직접 이곳을 찾아서 심었다는 30년 넘은 올리브 나무 한 그루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글로버 저택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면 건너편에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거대한 조선소가 보인다.
한 때 세계 최대의 조선소였고 태평양 전쟁 때 미국을 위협한 대형 전함들을 건조했던 곳. 일본인들은 핑커톤의 전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를 오페라처럼 눈물과 원망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백 년 전부터 그런 전함을 자기들도 만들기를 원했다. 기어이 그들은 그것을 해냈고, 이어지는 무모한 자만심은 미국을 향해 개전(開戰)을 하고 말았다.
결국 이 나가사키에 돌아온 것은 원폭이었다. 미군이 평화로운 미항(美港)을 폭격목표로 삼은 조선소 때문이었으니, 그들이 벌인 일은 파괴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미쓰비시 중공업에서는 더 이상 군함을 만들지 않는다.
나가사키는 다시 아름다운 항구로 돌아갔다. 지금 내가 차를 마시는 평화로운 언덕의 정자(亭子)에서는 일본인 성악가로서는 사상 최초로 세계적인 초초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프리마돈나 미우라 다마키의 ‘어떤 갠 날’이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있다.
배들은 조선소를 앞을 돌아서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풍경이 여기서 기시감(旣視感)으로 되살아난다. 그토록 동경(憧憬)했던 곳에 비로소 섰지만, 나의 마음은 어린 시절의 그 때와 다름이 아니다.
철없이 나이만 먹은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중년을 넘긴 사내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저 바다 건너는 부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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