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텍스트를 먼저 읽고
이어서 안내서인 후자를 읽었다
지옥편 34곡(서곡 포함) 연옥편 33곡 천국편 33곡
전체 100곡으로 이루어진 서사시 본문을,
번역어일망정 자주 소리 내어 낭송하였으며
페이지 하단에 설명된 주석을 꼼꼼히 읽고
신속히 본문으로 돌아갔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들이 각 곡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적어도 서너 개 이상의 번역본을 대조해 가며
포인트를 잡아주는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신곡 강의는
그저 활자가 시각을 스쳐가는
시간의 누적과 흐름에 지나지 않았을 독서에
부분부분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하는 자극이자
묵상의 시간을 제공했다 또한
심오한 신학적 질의응답과 신비주의적 묘사들로 인해
지옥편과 연옥편에 비해 이미지화하기가 어려운
천국편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새삼스럽지만 19세기말부터 20세기에 활약한
일본 지성인들의 서구문화 수용 역량과 전달력은 놀랍다
그들은 서구문화를 완전히 자기것으로 흡수한 후
철두철미한 번역과 해석의 기술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가는데
소화가 잘 되는 부드러운 이유식으로 만들어
아예 숟가락으로 떠먹여준다..
단테는 중세말 르네상스초 피렌체 사람이었다
라틴어가 공용어이자 문화적 세계언어였던 14세기 유럽에서
모국어인 (토스카나)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썼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역사, 중세 이탈리아 도시국가사,
특히 단테(1265~1321) 당대 피렌체와 그 주변 정치상황,
중세 천문학과 지리학, 성서 지식과 그리스도교 교리 등이
배경지식으로 요구되는 책인데 그나마 내가 좀 아는 것은
성서 지식과 그리스도교 교리 정도..에서 출발했고
단테가 신곡을 쓰게 된 모티브 두 가지는 기억해 둬야 했다
첫째 베아트리체와의 만남
둘째 피렌체의 정적들에 의해 추방되어
평생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는 망명 생활을 했다는 사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파인 기벨리니파와 교황파인 구엘피파로
양분된 정치 상황 속에서 단테는 구엘피파였고
구엘피파 안에서도 흑당에게 세력을 잃은 백당의 지도자였다
나 역시 읽어가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책속의 수많은 정치적 알레고리와 풍자 및
기저에 있는 단테의 시선과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
수시로 인지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었다
대부분의 고전이 그렇듯 신곡을 읽는 시점은
중년 이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인생에 위기가 도래했을 무렵.. 그 위기를 ‘인식했을’ 때가
이 책을 읽을 적기라 생각된다 그래야 읽힌다..
단테 자신이 삶의 방향감을 상실하고 어둠에 처했을 때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지옥편 서두(1곡)는 이러하다
우리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 있었으니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또는
우리네 생명 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는
나 올바른 길 잃고, 인생 나그넷길 반 고비에 어두운 수풀에 있었노라
단테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로마 시대의 대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안내에 따라
1300년, 부활절 전후
대략 일주일 간의 저승여행을 떠난다
책에 나타난 저승세계 이미지는
매우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인 구조를 가진다
아래는 독서 후 고르고 고른 대표 이미지들
먼저 보티첼리가 그린 지옥 이미지
지옥의 위치는 북반구 예루살렘 근처
땅 속 깊은 곳이며 지옥의 구조는
전통적인 지옥상에 단테의 상상력이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즉 아래로 좁아지는 칵테일잔의 형태로
그리스도 이전에 살아 세례를 받지 못한,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이 처해 있는 맨위
제1원 림보(변옥)에서부터
제2원 음욕
제3원 탐식
제4원 낭비
제5원 분노
제6원 이단
제7원 폭력(살해약탈/자살/신과자연모독)
제8원 기만
제9원 배신의 죄를 범한 영혼들이 이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지하세계의 최저층까지 묘사된다
순서대로 죄의 무게가 크며
7,8,9원은 각각 여러 구역으로 소분류된다
이 부분의 독서는 극도의 폐소공포와 유사질식을 유발하는
탄광의 갱도나 중세 지하감옥 체험에 견줄 수 있다
연옥 이미지
제일 궁금했던 연옥이다
연옥은 12세기 초에 확립된 개념으로
신곡의 묘사에 따르면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북반구 지하에 있는 지옥의 지구중심부를 통과해
반대편으로 뚫린 좁은 동굴을 기어올라 다다른
남반구 바다에 솟아있는 산이다
연옥에선 지옥과 달리 처음으로 전망이 보이고
일렁이는 바다가 보이며 천사가 일을 하고 있다는
반짝이는 별이 보인다
천국편도 그렇고 분명 현대의 자연과학 지식과 다르지만
단테가 가진 지구와 천체에 대한 지리적 관점과
그에 따른 묘사들이 나는
더없이 시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연옥은 지옥에 떨어질 만큼 악하지 않고
천국에 갈 만큼 훌륭하지 않은 애매한 영혼들이
불로 죄를 씻어내는 일종의 소독과 치료의 과정을 통해
천국행의 가능성을 꿈꾸는, 정죄계purgatorio이다
이곳은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욕
이상 7대죄의 권역으로 이루어져 있고 연옥산 정상은
지상의 천국으로 이곳부터 저 위 하늘,
즉 천국으로의 접근 상황이 펼쳐진다
흥미롭게도 연옥의 영혼은 현세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에 의해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하늘에 오를 수 있다
지옥과 천국의 이분법에 틈을 내는 연옥의 개념은
상당히 혁신적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중간자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개념인지..
로마의 테베레강 어느 다리 밑에 가면
연옥행 대기자들이 배를 기다리며 줄서있다는데
심판 이후 내 영혼도 그쯤 가 있을는지.. 잘하면 말이다
(지옥과 연옥을 포함한) 천국 이미지
지옥과 연옥은 단테의 상상이지만
천국의 구조는 2세기 알렉산드리아 출신 천문학자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천구도를 따른다고 한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인 천동설의 우주관에 기반하여
지구 위로 10단계의 하늘이 순환한다 다시 말해 천국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겹의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성 베르나르도의 안내로
이곳을 단계적으로 상승 체험해 간다 그러면서
점차 강해지는 별들의 파워에 수차례 실명하고 실신한 후
새롭게 리셋된 시력과 체력으로 신성과 지복을 엿본다
우리가 알아온 기존의 평면적이고 정적인 천국 이미지들이
연옥 정상의 지상 천국쯤에 대응하는 것이었다면
이곳은 천상의 이미지가 보다 우주적인 규모에서
스펙터클하고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초월 세계로서
나의 전체적인 인상은 신의 설계에 의해
성스러운 영혼들의 군무와 노래가 어우러지는
일종의 찬란한 매스게임 이미지였다
제1천 월광천(달의 하늘)
제2천 수성천
제3천 금성천
제4천 태양천
제5천 화성천
제6천 목성천
제7천 토성천
제8천 항성천(붙박이별들의 하늘)
제9천 원동천(최초 움직임의 하늘)
제10천 최고천(엠피레오)
이곳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또 여러 영혼들과
원죄, 십자가 구원, 부활 등 그리스도교의 주요 이슈에 관해
문답을 통한 지적 대화를 나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에 따르면 천국편은
‘단테 시대의 자연과학 천문학 철학 신학의
학문적 지식이 응축된 장’이며 철학과 신학에 있어
아마도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그리스도 교리를 결합한
중세 최고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신곡, 특히 천국편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의 문학적 재현일 수 있다
실제로 아퀴나스는 천국편 제10곡에 등장한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그림의 도상들이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지옥에서 연옥으로 진입하는 대목을 옮긴다
지옥소굴을 막 탈출해 연옥 해변에 이른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시선이
먼 바다와 별들을 향한다
숨통이 트이고 가슴이 뻥 뚫리는 대목이었다
지옥편 끝(34곡)
밝은 세상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길잡이와 나는 그 험한 길로 들어섰으니
휴식을 취할 생각도 없이 그분은
앞에서, 나는 뒤에서 위로 올라갔으며,
마침내 나는 동그란 틈 사이로 하늘이
운반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으니,
우리는 밖으로 나와 별들을 보았다
연옥편 서두(1곡)
보다 편한 물 위를 달리기 위하여
내 재능의 쪽배는 벌써 돛을 펼치니,
그토록 참혹한 바다를 뒤에 남긴 채,
[참혹한 바다: 지옥]
이제 나는 인간의 영혼이 깨끗이 씻겨
하늘로 올라가기에 합당하게 되는
저 두 번째 왕국에 대해 노래하련다.
오, 성스러운 무사 여신들이여, 나는
그대들의 것이니, 죽었던 시가 여기
되살아나고, 칼리오페가 잠시 일어나
[칼리오페: 예술과 학문을 수호하는 무사 여신들 중 으뜸가는 여신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서사시를 수호한다]
저 불쌍한 까치들이 호된 타격에
용서를 바랄 수도 없게 만들었던
음악으로 내 노래를 이끌어 주소서.
[까치들: 피에리스(복수는 피에리데스). 마케도니아의 왕 피에로스와 에우히페 사이에 태어난 아홉 명의 딸들로, 무사 여신들에게 도전하여 노래 시합을 하였지만 패배하여 까치들로 변함]
동방 사파이어의 감미로운 빛깔이
첫째 둘레까지 순수하게 펼쳐진
청명한 대기 속에 모여 있었으니,
[첫째 둘레: 천국의 하늘 아홉 개 중 첫째 하늘인 달의 하늘]
나의 눈과 가슴을 슬프게 했던
죽은 대기에서 이제 막 벗어난
나의 눈은 다시 기쁨을 되찾았다.
사랑을 이끄는 아름다운 행성은
뒤따르는 물고기자리를 희미하게 하며
동쪽을 온통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행성: 베누스. 금성]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다른 극을
향했고, 최초의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도
바라본 적이 없는 네 개의 별을 보았다.
[다른 극: 남극
최초의 사람들: 아담과 하와. 연옥의 산이 솟아있는 남반구의 바다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간주되었다
네 개의 별: 예지 정의 용기 절제를 의미]
하늘은 그 별빛을 즐기는 듯하였으니,
오, 북반구의 황량한 홀아비 땅이여,
너는 영원히 그 별들을 볼 수 없구나!
나는 그 별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큰곰자리가 이미 사라져 버린 다른
극을 향하여 약간 몸을 돌렸고,
[다른 극: 북극]
끝으로
책을 읽게 된 계기인
리스트의 순례의 해 둘째 해 이탈리아 중
‘단테를 읽고’를 다시 들어본다
거대한 서사시인 신곡 전체를 작정하고
음악적으로 반영한 작품은 당연히 아니고
신곡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20분 가량의 피아노 독주곡으로
지옥편 이미지가 연상되는 주제 악상에
강력한 포인트를 주며 전개되는 자유로운 환상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