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자주 가는 모 주부커뮤니티 게시판에
클래식 음악 제목을 찾는 글이 올라왔다
여느 때 같으면 고수들이 달려와 곧장 정답이 올라왔을 텐데
오늘따라 정답이 안 올라온다 30개의 댓글이 달렸건만..
글쓴이가 제시한 힌트는 메인테마 계이름부터
사용된 악기라든가 곡의 분위기나 느낌 묘사까지
매우 구체적이며 비범한 설명이었다 예컨대
만돌린이나 기타, 어쩌면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를
손으로 뜯어서 연주하며 제목에 스페인 지명이 들어가는 듯하며
영화 삽입곡일 수도 있으며 메인 테마 계이름이
도도도-도-, 도라라
시시시-시-, 도미도(도도도)인데 이 주선율을 첼로가 감싸며
현악기로 드그다가 드그다가(?!) 하며 긁는 주법이 나오며
단조가 아니라 장조로 듣고 있으면 밝은 달빛 아래 산책하는 느낌,
그러다가 다리 위에 서서 물가에 비치는 달빛 보며
밤공기를 마시는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단지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뿐
댓글에 달린 아랑훼즈 알함브라 안달루시아 로망스 비발디 파가니니
죄다 글쓴이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근데 내가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몸이 쑤셨다
평소 퀴즈라면 환장하는 사람으로
답이 올라와야 진정이 될 텐데 올라오지 않으니 더 집착이 생겼다
댓글을 달고 싶어 로그인을 시도하니 아차 회원가입조차 안 돼 있었다
10년 이상 이 커뮤니티를 눈팅만 했던 것
뒤늦게 가입을 하고자 했으나 이곳은 몇 년째 회원가입을 불허하고 있었다
100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가 밀고 있는 답은 바로
이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 쓰인
보케리니의 현악5중주곡, 일명 ‘마드리드 거리의 밤의 음악’이다
La Musica Notturna delle Strade di Madrid
소제목이 붙어 있는 짧은 일곱 개 악장 중
4분 16초 경 시작되는 5악장에서 예의 그 계이름 선율 등장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둘이 이 부분을 듀엣으로 연주한다
아래 영상 1분 17초 경 바이올린과 첼로가 마치
만돌린과 기타같은 효과로 스페인풍을 돋운다
2003.12.3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거대 예산의 블록버스터급 영화로 소개된 작품치곤
동기유발이 잘 안 되는 영화였다.
몇몇 스틸에 비친 주연 러셀 크로우만 해도..
열혈팬이라 자처하는 내 눈에마저 우스꽝스럽게 다가왔으니
나는 진정한 그의 열혈팬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안 볼 수는 없었는데..
그래도 거대 영화고 그래도 러셀 크로우니까.
스펙터클과 스타는 이다지도 강력하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이 범주의 영화들,
콕 집어 말해 제리 브룩하이머 스타일의 거대 영화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영화 틀에서 살며시 비껴나 있었다.
해양 액션어드벤처이고 거대예산 블록버스터, 맞긴 맞는데..
아리아 한 소절 듣고 나온 듯 우아한 느낌을 남긴다.
이런 느낌은, 범선과 항해에 대해 우리가 가져온 서구적 해양판타지를
이 영화가 정공법적으로 충족시켜 준 데서 온 것 같다.
이 영화는 나폴레옹과 해군 제독 넬슨의 시대에,
프랑스와 겨루던 영국 함대의 선상 생활과 해상 전투에
온 에너지를 집중한다. 마치 19세기 근대 산업사회,
첨단문명의 총아였던 증기기관차에 매혹되어 그것을 예찬하고 그 디테일을
작품화하는 데 바빴던 일군의 소설가나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혹은 매니아들처럼, 한 대상에 뜨겁게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유명한 해양소설을 각색했다 하니 그런가 보다 싶고..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엔 어떤 교양주의가 흐른다.
그것은 러셀 크로우가 연기한 잭 오브리 함장과
폴 베터니가 연기한, 함장의 동료이자 의사인 스티븐 마투린,
두 사람의 캐릭터에 스며들어 있다.
그들은 전형적인 군인과 전형적인 학자로서
각각 리더십과 인문주의를 대표한다. 캐릭터 특성상 두 사람은
영화 내내 의사결정의 양축을 대표하며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상호보완적인 파트너이기도 한데
그들의 파트너십은 그들이 공유하는 계급성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르겠다.
기질이 다르고 전형이 어떻고 해도 그들은
교육받은 엘리트라는 점에서 통한다. 그들은 소리쳐 싸울망정
서로 말이 되는 사이고, 바이올린과 첼로로 듀엣을 연주하는 사이다.
이 두 사람이 지탱해 가는 서프라이즈호는 그 자체로 사관학교이다.
서프라이즈호는 소수의 장교와 다수 선원들 간의
엄격한 위계와 지도력에 의해 관리되며
엄마젖을 뗀 지 며칠 안 돼 보이는 아동 생도들은
군인의 표상인 함장과 학자의 표상인 의사 양자를
스승이자 역할모델로 삼아 성장해 간다.
결과적으로 [마스터 앤드 커맨더]는
[타이타닉]같은 서스펜스 넘치는 재난영화와도 좀 다르고
[캐리비언의 해적]처럼 액션, 러브스토리, 스펙터클이
적당히 안배된 놀이동산형 영화와도 좀 다르고
[퍼펙트 스톰]같은 바다와 인간이 대결하는 악전고투형 영화와도
좀 다르면서.. 해양의 순수성이랄지 해양 무드가 살아있는,
바다와 배, 뱃사람, 그리고 항해에 대한
시적 낭만이 살아있는 영화였다.
영화는 대양에 띄운 한 조각 실내악처럼
우아한 스펙터클, 고요한 스펙터클을 선보이며
항해 그 자체의 가상체험으로 보는 이를 이끈다.
함선간 전투씬은 스펙터클의 야욕에 익사하지 않고 잘 통제되어 있으며,
저 푸른 해원을 향해 펄럭이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돛, 그 순정함,
꿈꾸는 듯 대양을 가르는 범선의 위용과 디테일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설레고 행복하다. 이런 것들에 비하면
마스트에 올라 각잡고 선 땅딸막한 러셀 크로우를
카메라가 패닝해 들어가는 숏 따위는 외면하고 싶었다.
물론 크로우는 역시 크로우이다.
적어도 그의 연기 카리스마에 관한 한 이번에도
이의제기가 불가능하다는 데서 나는 팬으로서 안도했다.
발음이나 억양까진 모르겠고.. 그럴 듯한 잉글리시맨으로 가공된 그는,
영화가 요구하는 오, 캡틴 마이 캡틴 캐릭터를 정확하게 수행하고 있다.
오래 전 로저 도날드슨의 [바운티]에서 저 시대 영국 해군 의상을
근사하게 소화해 낸 바 있는, 젊은날의 멜 깁슨같은 핸섬한 용모를
그에게서 기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제일 아쉬운 것은
조연진이 약해보였다는 점이다. 상영 시간 140여분에 달하는
거대영화치고 시각적으로 너무 검소했다고 할까.
아동 생도들만으로는 부족하고.. 카리스마 선장을 보좌하는 장교 라인에
비중있는 꽃미남이나 귀염둥이 몇을 배치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끝으로.. 이 영화에서 폴 베터니가
그 특유의 깐깐하고 정감 없는 이미지로 창조해 낸,
생물학자이자 탁월한 외과의인 스티븐 캐릭터는..
나로 하여금 이 영화를 연출한 피터 위어가 오래 전 호주에서 찍은
[갈리폴리]의 어느 나이든 군인을 연상케 했다.
1차대전 중 터키 갈리폴리 반도에 영국군 자격으로 파병된 호주 청년들의
비운의 생을 다룬 이 영화에서 문제의 군인은,
적진에 달려나가는 족족 몰살당하는 부하들을 보면서
무모한 작전명령을 수행해야만 하는, 무력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장교 막사에서 홀로 위스키를 마시며
두 테너의 음성으로 레코드에서 흘러나오는
비제의 진주잡이 아리아 '깊은 사원에서'를 따라부른다.
취해서 흥얼거리는 그의 눈에 밤의 전장은 비로소,
까만 밤하늘 불꽃놀이처럼 찬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한 자, 있어선 안 될 곳에 있어야 하는 자의
절망과 부적응이 그토록 가슴 아프게 나타난 영화장면도 드물 것이다.
[마스터 앤드 커맨더]에서 스티븐이 있어야 할 곳은
전함이 아니라 도서관이었고 전장이 아니라 자연이었다.
바하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배음으로
갈라파고스 섬의 지리상 발견 및 경이로운 생태학습이 펼쳐지던
아름다운 장면들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