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부터 해서 [일식] [붉은 사막] [여행자] [자브리스키 포인트]까지
안토니오니의 주요작을 이번 방학에 훑었다.
영화에 한참 미쳐 있던 90년대에 비디오로 본 [욕망]과
안토니오니 말년에 빔 벤더스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구름 저편에]를 예전에 보았으나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안토니오니의 혁신적 영화들은 이번에 본
저 일련의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형태로든 소감을 기록해 놓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지만 점점 글을 못 쓰겠다. 글이 아예 써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써놓은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은 지루하고 답답하다.
문장보다 이미지들이 나을 것 같아 찾아 헤매 보지만 저작권 문제 때문인지
요새는 이미지들을 자유롭게 가져다 쓸 수 있는 여건도 안 된다.
시간이 더 가기 전 어서어서 기억에 담아두고 싶은 것들을 챙겨보자.
각각 7,8분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일식]과 [여행자]의 파이널 시퀀스이다.
각각 경이로운 생략의 미학, 경이로운 카메라워킹을 통해
영화의 주제와 의미를 집약시킨 명장면들이다.
해석을 염두에 두고 보면 더욱 집중하게 되지만
그저 생각 없이 보고만 있어도 순수한 필름으로서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제작된 지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지금 화면을 대하고 있는 이 순간
시간을 초월해 영화사의 중요한 순간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는
흥분과 감격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장면들이다.
1962년작 [일식(L'Eclisse)] 마지막 장면
[일식]은 전작 [정사]의 스타일이 완성형에 도달한, 좀더 양식화된 작품으로
정물화 혹은 차가운 추상화같은 현대 도시의 이미지들과
증권거래소의 아수라장을 대비시키며 팽팽한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저 마지막 장면은 두 주인공이 만나기로 했으나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는,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사라져 버린 적막한 저녁의 시공간이다.
1975년작 [여행자(The Passenger)] 마지막 장면
안토니오니 작품에서 로케이션을 빼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여행자]는 안토니오니의 비범한 로케이션 감각이 정점에 이른 작품이다.
오프닝 시퀀스가 아프리카 사막에서 이루어지고
뮌헨과 런던이 살짝 나오지만 이 영화의 주 로케이션은 스페인으로서
그 범위는 가우디에서부터 안달루시아의 땅끝까지 아우른다.
카메라가 철창살을 뚫고 나아가는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은 정확히 마지막에서 세 번째 씬.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완전한 도피, 완전한 탈주를 꿈꾸던 잭 니콜슨의 영혼은
그렇게 이세상이라는 감옥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
호텔방 밖으로 나온 카메라는 이어서 서서히 팬하면서 한가로운 오후의 공터,
건너편 투우장 건물과 하늘, 일상적으로 오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거쳐
다시금 호텔 건물과 주인공이 누워있던 객실을 밖에서 들여다 보는 각도에 놓이는데
이때 우리는 주인공의 영혼이, 방금 빠져나온 자신의 육신을,
또 이제 막 죽은 자신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오래도록 같이 산 여인과
아는 사람이라고 증언하는 인생 최후 잠깐의 시기를 함께한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해질녘 허름한 길모퉁이 호텔 배경으로 카탈란 민요 Canço del Lladre라는 곡이
기타로 연주되며 영화가 마무리되는 이 영화의 엔드 타이틀 씬도 너무 좋아,
화질이 떨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 부분까지 담긴 영상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