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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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한강 작품들 후기



시류에 편승하여

한강의 주요작들을 벼락치기하듯 몰아 읽었다

서두른 이유는 말하나마나

노벨상의 권위, 화제성, 파급력에 따른 호기심이었다

노벨상이 무슨 경연대회도 아니고

여기서 수여하는 문학상에 문학성만 반영되는 것도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 주어졌는데

내가 왜 한강을 몰라봤지? 하는 속물적인 마음이 한 편에 있었고

이를테면 내가 많이 좋아하는 배수아는 왜 아닌 거지?

하는 옹졸한 의문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여론에 휘둘리기 전에 작품을 접하고 싶었다

비교적 어렵지 않게 읽혔는데

그만큼 흡인력이 있었다, 모든 작품이 고르게..

스스로에게 한 치의 딴짓을 허락하지 않는, 주제에 대한 천착

한 땀 한 땀 고통이 느껴지는 완벽주의적 문장

이런 글쓰기 후엔 작가가 앓아누워도 이상하지 않으리



읽은 순서대로

소년이 온다


소재가 환기하는 공동체의 아픈 기억과 별개로

평범한 수준의 증언문학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광주 5.18과 이후 정치민주화 과정을 겪지 않은 후세들에겐

분명 교육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평생 6.25에 대한 증언을 멈추지 않았던 박완서의 작품을 통해

6.25를 겪지 않은 우리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었던 것처럼..

또한 한국 현대사와 민주화에 관심 있거나

아우슈비츠와 파시즘 등 국가 폭력을 경험한 해외인에게도

보편적 호소력을 갖는 작품일 듯

후기가 냉정한 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책이 끝나갈 즈음 내가 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희랍어 시간


우리말로 쓰인 장편 순문학에서

만나보지 못한, 훌륭한 연애소설이었다

순문학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지만

대충 장르문학의 반대개념으로

영화에서 아트하우스영화 개념과 비슷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선천적 이유로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가는 수강생 간의 마음의 연결이

명치가 아리도록 예의바르고 애틋하게 펼쳐져

읽는 이를 두근거리게 하는데

순문학이 성을 다룰 때 섹스 묘사가 아닌,

이러한 정통 러브스토리에 집중한 경우를 그간 본 적이 없었기에

그 희귀함에 먼저 놀랐고

러브스토리의 빌드업과 성공적 실현에서 중요한 전제인,

두 인물이 대등하게 결함을 갖고 있는 캐릭터여야 함이

잘 지켜지고 있어 의심을 거두고 빠져들 수 있었으며

아름답게 조형된 남성 캐릭터에 특별한 감동을 받았다

(과거에 말을 했으나 지금은) 말을 하지 못하는 여성이,

어둠 속에서 사고로 안경을 떨어뜨린 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당황해하는 남성의 손바닥에

글자를 써 주며 촉각으로 소통하는 장면들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섬섬옥수 같은 문장이 과해질까, 진부해질까 마음 졸였으나

작가는 끝까지 잘해냈다

배수아였다면 어땠을까..

문장의 숨막히는 단정함을 못 견뎌 언어가 더 해체되었을 테고

연인의 성 정체성에 반전을 주며 힙하게 갔을지도..

순문학에서 소위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어하는 해석자들이라면

작품에 대해 더욱 거창하고 근사한 말도 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조차 심연은커녕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연애소설로 읽은 사람이 나인지라..

희랍어 시간이 매력적인 또 하나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모든 작가들 위의 작가인 보르헤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다

첫 문장부터 보르헤스 인용인데다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 캐릭터는

유전적 이유로 젊은 날부터 시력을 잃어갔던,

그러나 평생 수많은 책을 읽고 기억해 머릿속에 도서관을 차렸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을 지낸 보르헤스를 바로 연상케 한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하루키가 그려낸 주인공도 그러했다

이쪽 세상에서 산간마을 도서관장이자

저 너머 세상에선 해질녘 진녹색 안경을 쓰고

둥근 알의 형태로 보존되어 온 오래된 인류의 꿈을 읽어내는 눈 먼 사서

보르헤스의 그림자와 더불어 드문드문

완전히 생소한 언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쓰던,

희랍어 문장들이 불러일으키는 왠지 모를 그리움과

교양적 분위기도 내 취향이었다



채식주의자


가부장제가 가족의 이름으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

강제성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에 대한

개인적 저항의 한 양식을 보여주는 이야기 같았다

주인공의 대응은 일견 끊임없이 도망치는 수동적 반응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인간에서 인간이 아닌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변환하려는 급진적 운동으로 보였다

카프카적인 느낌도 받았다

2부를 거쳐 3부에 이르면 주인공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사회화된 규범, 즉 정상성을 한참 초월해

괴기한 신화적 캐릭터로 변모해 버린다

난감한 것은 2부 몽고반점인데

가족관계의 의미와 도덕적 기준을 이미 던져버린,

활발한 정체성 이행을 통과 중인, 즉 메타모르포젠 상태인 주인공에게

형부처제 관계는 이슈랄 것도 없다

상대도 푸른칠을 하고 나무가 되어주기만 한다면

이미 나무가 된 나와 뒤엉키는 것쯤이야 자연의 순리일 뿐

반면 형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사건과 심리는 복잡하다

일단 형부가 주인공에게 요구하는 행위에 강제성이 없으니

폭력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예술의 이름으로 가하는 신체 및 정신의 착취로 느껴진다

신경 쓰이는 것은 예술적 환상을 실현하려는 예술가적 의지와

교묘하게 섞여 시너지를 내는 형부의 욕정이다

이 욕정에 불을 당기는 것은 당연히 형부처제 관계라는 금기이고

이 욕정은 육체의 신속한 해소와 주인공을 향한 성적 대상화를 합리화한다

형부 시점의 서술에, 특히 성욕과 섹스 묘사에 아이러니가 작동하기를,

작가의 일정한 관여를 나는 바랐던 것 같다

그래야 주제가 살아나니까.. 단편이니까 더욱..

그러나 아이러니는 고사하고 서술의 톤이 순진무구할 정도로

진지하고 스트레이트했다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섹스 묘사였다

혹은 남성 중심적 섹스라면 으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묘사였다

남성 시점의 설정이니 당연한 건가?

아무튼 남성 작가가 썼다면 요새같으면 욕을 한 사발로 잡수셨을..

나는 이 부분이 미숙했다고 생각한다

형부, 곧 남자에게,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면죄부를 줘 버린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한계를 여러 모로 넘어서려는 시도였던 듯

발표 당시와 맨부커 수상 당시까지도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을 텐데

시간이 꽤 흐른 지금 소설의 발상이나 설계는 다소 낡아보인다

이 작품을 읽으며 떠오른

레드핫칠리페퍼스의 음반 이미지

꽃무늬 컬러가 레드 아닌 그린이나 블루면 더 좋았을 걸

블러드 슈가 섹스 매직과 마더스 밀크

둘 다 명반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의 최신작이자 최고작에 이르렀다

소년이 온다의 수준을 훌쩍 넘은 증언문학으로

물샐 틈 없이 타이트한 완성도가 인상적이었다

4.3이라는 끔찍한 역사적 사건의 진실에,

공동체가 겪은 고통에, 남다른 감수성으로 천착해 들어가는 작품으로

사료 조사 부분의 집요하고도 건조한 서술에선

로베르토 볼라뇨가 최후작 <2666>에서

수백 건에 이르는 충격적인 멕시코 여성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수사 자료와 검시보고서를 기록해 나가던

믿을 수 없이 초연한 정신력이 느껴졌고

제주 출신 영화작가인 친구와 친구 어머니에 대한 접근에

한국적인 마술적 리얼리즘을 도입한 것도 강렬했다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섞고

피아졸라의 탱고를 입혀 독재 시대 아르헨티나의 아픈 정치사를 그린

80년대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영화 [남쪽]이 그러했던 것처럼..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것은 주인공이,

고통스러운 과거의 숨겨진 단서들이 내장된 친구의 집,

그 장소로 악천후 속에 찾아들어가는 천로역정 순례길을

제주 중산간의 독특한 자연과 지형, 바람과 폭설의 묘사와

아름답게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관광객으로 타지인으로 들락거리며 한두 번씩 경험했을 법한

중산간에서 만난 바람 소리와 폭우, 혹은 폭설..

도열한 검은 나무들로 띠를 두른 오름들.. 우묵한 동굴들..

인적이 드문 산중 외진 곳에서 비를 맞으며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네 노인이라든가..

고지대에서 내려다 본 해안과 저녁놀..

그렇게 펼쳐진 시야 안에서 벌어졌을

학살과 연행, 피신과 공포,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한의 역사

작별하지 않는다는 십여 년 전에 보았던,

역시 제주 4.3을 다룬 영화 [지슬]과 함께

우리도 잘 몰랐던, 알려고 하지 않았던,

제주의 황량한 아름다움 아래 묻혀있는 그 역사에

조금 더 깊숙이 다가가게 해 준다



끝으로

흰


앞의 네 작품에 몰두하느라 기운을 다 써 버렸나

문장들의 감성 수치가 높아 힘들었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책 하나하나 소중히 아껴읽기가 아닌

몰아읽기, 벼락치기의 부작용이기도 하겠다



한강 작가의 최고작은 작별하지 않는다였으며

개인적인 베스트는 희랍어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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