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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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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Provence Fever_옛 여행기_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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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4(완결) - 1999. 8. 24 -
다음 날 나는 진군하는 병사처럼 보무도 당당히 엑상프로방스로 향
했다. 우리집에서 여의도 가는 정도의 거리. 아름다운 도시였다. 이곳
에 대한 마음의 지도는 너무나 생생하고 애정이 깊었던 터라, 내내
행복한 기시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플라스드골 광장의 시원한 분수며,
거기서 이어지는 미라보 거리의 플라타너스 궁륭, 이쯤일 텐데, 하고
눈길을 던지니 마술처럼 거기 서 있던 까페 되가르송.. 그 초록의 도
시, 초록의 거리, 초록의 까페. 무슨 정묘한 시나리오처럼, 꿈꾸어 오
던 대로 거기에 앉아 초록의 박하수를 마시고 있는 나 자신이 믿어지
지 않아, 여행이 막바지에 이른 그때서야 비로소 최초로 나를 사진찍
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쳤다. '가르송' 한 명에게 부탁하여 내 사진
을 찍었다. 아, 서울에 와서 뽑아놓은 그 사진은 얼마나 보잘 것 없던
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서 찍은 사진
도 그거보단 낫다. 그러나 내 마음에 인화된 사진만은..
엑스의 북쪽, 세잔의 아틀리에까지 걸어가는 길. 지도를 보고 한 시
간여 헤매어 올라간 언덕에 아틀리에가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
엔 세잔의 유품들만이 쓸쓸히 굴러다니고 있었다. 비밀의 화원을 닮
은, 야생의 작은 뜰에서 몸을 쉬며 들었던 바람 소리만이 귀에 남아
있다.
생트빅투아르산은 엑스에 오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안
타깝게도 걸어서는 못갈 거리였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오후 한 나절
이 소요되는 '세잔의 발자취를 따라서' 라는 제목의 투어에 참가할 수
있었다. 세잔이 머물렀던 자스드부팡, 엑스 근교의 검은성과 르톨로네
길을 따라 생트빅투아르를 원경에서 근경으로 잡아들어가는 훌륭한
세잔 투어였다. 그것은 시각적 탐험 이상이었다. 세잔이 생트빅투아르
를 그린 위치와 각도들을 그대로 체험하며 산으로 한 발 한 발 가까
이 가는 길은 참으로, 산이 아니라 창작의 비의적 지대에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언뜻 눈 비비고 바라본 산은, 창조시 신의 악력이 저랬으
리라 믿어지는, 강한 지질변화의 현장이 순간 정지되어 억만 년을 견
뎌온 듯한, 장엄한 석회암의 습곡이었다.
엑스에서의 마지막 순례는 성 요한 성당이었다. 떠나기 전의 여행
기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시리즈에서 다짐하였듯이 나는, 이렌느
야곱이 벵상 페레의 구애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녁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달려간 그 성당을 잊지 않고 찾았다. 까르디날로
에 접어들어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니 네 마리 돌고래의 샘이 나를 반
겨주었다. [구름 저 편에]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성당에서 불리던 성가
를 제외하면 음악이라곤 없는 영화였다. 적막함 속에 오직 샘의 소리
만이 들려오던 영화였다. 이 샘이 그 샘이었으리라.
샘을 지나자 새로운 골목길 왼편에 까르디날 호텔이 나타났고 정면
에 성당이 있었다. 해질녘, 그 안에선 예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믿어
지지 않았다. 영화의 그 짧디 짧은 에피소드에서 영상으로 추적했던
길이 내 눈 앞에 고스란히, 상상과의 오차 없이, 정말 상상 속의 크기
그대로 상상 속의 색채로 존재하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
다도 안토니오니와 벤더스의 시선이 머물고 그들이 뷰파인더로 바라
본 바로 그 세상에 내가 와있다는 사실이 감격적이었다.
난 말코비치가 까르디날 호텔에서 나와 망연히 서 있던 장면을 생
각해 내었다. 그 호텔 안엔 정말 세잔의 모작이 걸려있을까. 잔느 모
로같은 초로의 귀부인이 한가하게 책갈피를 넘기고 있을까. 바보같이
호텔 앞에 서서 그런 상상을 했다. 들어가보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
다. 그때 별안간 호텔에서 한 청년이 뛰어나왔다. 그는 생트빅투아르
가 그려진 흰 티를 입고 있었다. 다음에 엑스에 오면 반드시 이 호텔
에 머물러 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엑스에서 마르세유로 돌아온 저녁, 부이야베스를 먹었다. 호텔에선
미라마르라는, 구항에서 가장 유명한 부이야베스 전문요리점을 소개
해 주었다. 그러나 돈많은 관광객들로 떠들썩할 뿐더러 웨이터들이
유독 거만해 보이는 그곳을 지나쳐 손님이 별로 없는 식당으로 들어
갔다. 9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써머타임이 시행되고 있다지만 황혼이
내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테라스가 아닌 식당 안으로 들어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멀리 사프란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을 뒤로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의 성모상이 보였다.
부이야베스는 우리네 해물탕과 비슷한 요리다. 생선을 푹 삶아 각
종 향료로 비린 맛을 없앤 스프가 먼저 나온다. 그러면 르이유라는
매콤한 소스를 빵에 발라 스프에 적셔 먹는다. 다 먹고 나면 감자와
함께 부드럽게 삶아진 생선 모듬이 나온다. 대구인지 붕장어인지 이
름 모를 다채로운 흰살생선들과 홍합이 눈에 띈다. 해물탕을 혼자 먹
으러 식당에 오는 사람 없듯이 부이야베스 또한 혼자 먹는 요리가 아
니다. 일행이 함께 와서 담소를 나누며 분홍빛 와인을 곁들여 먹는
요리이다. 꿋꿋하게 생선살을 발라먹는 내 모양은 꽤나 청승맞았을
것이다.
엑상프로방스 여행과 달리 다음 날의 니스행은 순탄치가 않았다.
세 시간 넘게 열차로 툴롱, 생라파엘, 칸, 앙티브의 해안을 거쳐가는
열차 여행은 괜찮았다. 니스의 바다는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바다가
딱 둘로 갈라져 자갈모래에 이르는 앞쪽은 파워에이드 타이들 버스트
의 색상처럼 채도가 높은 옥빛이었으며,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뒤쪽은
잉크를 풀어놓은 듯한 재기드 아이스의 색상이었다.
이 조용한 여행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이다.
시미에 지구의 고급주택가에 위치한 미술관에 들렀다가 니스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발을 헛디뎌 넘어진 것이다. 미술관 정원에 피어난 라
벤더의 보랏빛 물결에 마음을 빼앗긴 탓인지, 예쁜 집들을 구경하느
라 정신이 팔렸던 탓인지 원인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내가 원래부터
잘 넘어지는 사람이어서일 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나는 잘 넘어졌다.
그 긴긴 역사가 있다..
어쨌든 그 바람에 왼쪽 무릎이 까지고 오른쪽 발목이 삐었다. 재수
없게도 두어 달 전 결근까지 하며 치료했던, 주의를 요하는 부위였다.
발이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시간이 갈수록 통증이 심해졌다. 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비참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나는 한 천사를 만나게 된다. 건널목에서 우
연히 눈이 마주친 한 아줌마가 생긋 미소지어 보였다. 그녀가 영어를
내가 하는 만큼 할 줄 안다는 사실에 힘입어, 다급한 나는 도움을 청
했다. 그날 그 아줌마는 불운한 여행자를 위해 약국을 찾아주고, 약사
에게 사연을 설명해 주고 소독약과 연고, 압박붕대와 진통제 들로 다
친 발과 무릎을 치료할 때까지 무려 30분 이상을 함께 해주었다. 그
럴 줄 알았다. 오래 전부터 상상해 온 대로, 과연 천사는 소녀의 얼굴
을 하고 있지 않았다. 천사는 아줌마였다.
마르세유로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비로소 나는 평화를 되찾았다.
열차는 오렌지빛 석양을 통과하고 있었다. 넘어질 때 충격으로 청바
지 무르팍이 가로로 북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청바지 일부러 사서
입는 판에 모양새도 제법 그럴 듯하게 예술적으로 찢겨 있었다. 나답
지 않게(?) 불량해 보였다. 웃음이 나왔다.
여행의 마지막날은 온전히, 지중해에 헌정되었다. 마르세유 구항에
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 이프 섬을 일주하는 것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한낮에 출발하여 해안선을 따라 '깔랑크'라고 하는 천연절벽을
왕복하는 유람선에 올랐다. 절벽 하나하나, 섬 하나하나에 이름이 붙
여져 있었다. 불어로 방송되는 안내말을 알아듣지 못하건만 섭섭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수학여행을 가거나 답사를 가서도 선생님이나 가
이드의 설명을 잘 안 듣는 사람이다. 듣는 척하면서 오히려 귀를 막
는다. 유적지의 안내문들은 더더욱 안 읽는다.
두 시에서 여섯 시까지 지중해의 태양이 내 위에 있었다. 이마가
깨질 것 같았다. 깔랑크마다 피서객들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선 희디흰 절벽 아래 인적없는 모래톱이 나타났다. 그곳에 파라
솔을 펴고 무사태평으로 드러누워 아리아를 듣고 싶었다. 포르코 로
소처럼. 지중해변 어딘가에 이런 자세로 누워 음악을 듣는 그의 모습
이 불현듯 떠올랐다.
저녁에 돌아와서 몸을 씻고 한숨 잤다. 느즈막히 일어나 호텔 안의
식당으로 갔다. 매일, 아침 식사를 하던 이 식당의 이름은 '올리브레'
였다. 날씨도 좋고 휴일이라 다들 밖으로 나갔는지 손님은 나 한 사
람밖에 없었다. 시원한 과일을 먹고 싶었던 나는 멜리멜론이라는 것
을 주문했다. 멜론의 푸른 뚜껑이 열려 나왔다. 성곽처럼 오목볼록하
게 도려진 과일의 안쪽은 마치 동굴 같았다. 주황색 멜론의 속살이
낮에 본 깔랑크들처럼 절벽을 이루고 있었다. 떠먹기 좋게 동글동글
한 모양으로 멜론의 살을 떠서 빨간 수박 살과 함께 섞어 놓은 환상
의 과일특급이었다. 과일 위에는 민트 잎파리가 몇 개 얹혀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정신없이 퍼 먹었다. 화채로 뜬 멜론 살과 수박 살은 물
론, 멜론의 절벽까지 삭삭 긁어 먹고 마지막엔 멜론 동굴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 온종일 바알갛게 익었던 몸이 서서히 식어갔다.
귀국길의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로 가기 위해 마르세유 비행장에서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기다리는 동안, 새로운 항공로를 꿈꾸었다. 그
길은 주로, 마르세유에서 불과 한두 시간이면 가는 북아프리카, 튀니
지와 알제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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