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게시물 수 : 439, 1 / 30 페이지

이 름

김주향

제 목

옌 롄 커 대 장 정

지난 2월

명퇴 후 반포의 한 북카페에서 일하는

대학동기 진희를 만났다

경기고 근무 시절

중등국어교사 문학연수 때 만난 이후 십여 년 만이었다

그날 진희에게서 본인이 낸 시집을 선물 받고

서가에 디스플레이된 중국 작가 옌롄커(1958~)를 추천받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4개월 간 옌롄커의 책들을 읽었다

아래부터 위로 읽은 순서이다

일광유년 1998

해가 죽던 날 2019

사서 2010

풍아송 2008

딩씨 마을의 꿈 2006

작렬지 2013

레닌의 키스 2003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2005

물처럼 단단하게 2001

침묵과 한숨 2014

이렇게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일단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는

작품들의 재미와 흡인력 때문이었지만

독서 의지의 저변에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작용했다

독서는 결국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다

내가 중국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때는

대륙과 홍콩 대만 3중국의 영화를 섭렵하던 밀레니엄 시기였다

홍콩영화의 비장미와 골계미에 미쳐 있었고

후샤오시엔으로 대표되는 대만영화에서 역사와 예술을 발견했고

대륙영화들에선 닫혀 있던 중국의 현실과

힘차고 대담한 미학을 엿볼 수 있었다

북경영화학교출신의 신세대 스타일리스트였던

장 이모우와 첸 카이게의 아름다운 작품들..

그리고 지아장커의 스틸라이프 같은,

변화하는 중국 사회를 소재로 솜씨 좋게 잘 만들어진

비판적 사회물을 보며 활발하게 분석하고 연구하던 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매체가 뚝 끊겼다

우리 생활의 물자들을 중국산이 지배하고

중국인들이 서비스업종에 대거 유입해 공존하게 된 현실과 별개로

정치외교의 창구와 소셜미디어가 모두 꽉 막히고 말았다

더불어 영문 모를, 중국 혐오의 정서가 주변에 만연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이 작가를 알게 되었다

창문이 하나 생겼다고 할까

옌롄커의 책들을 읽으며 내내

머릿속에 골격을 세우고자 애썼던 것은

작품의 밑그림으로 꾸준히 반복되는,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또 제대로는 몰랐던 중국 현대사다

옌롄커 연보를 참조하고

침묵과 한숨에서 작가 자신이 표현한 바에 따라 정리한

중국 현대사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50년대 중국 경제성장을 위한 대약진운동

도농을 가리지 않은 전국적인 강철제련운동

3천만 내지 4천만 인구가 굶어 죽었던 3년 자연재해의 대기근

1968부터 세계전체가 덩달아 광란의 춤을 췄던 10년의 문화대혁명

개혁개방 이후 자본주의의 물결

이러한 밑그림의 토대 위에 옌롄커는

혁명과 자본이 가져온 괴기한 중국의 현실을 그려나간다

특히 자신의 고향인 황허 주변 바러우 산맥의 향촌을 배경으로

혁명기든 개혁개방시기든 유사하게 작동하는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국가권력의 메커니즘과

이로 인한 인민의 고통,

중심 인물에게 나타나는 권력욕의 심리분석과

일그러진 인간성을 다루며

곁들여 속죄의식 및 참회의식을 보탠다

거침없는 스토리텔링

피눈물로 써내려간 듯한 치열한 주제의식

사회주의 리얼리즘 전통에서 비롯되었을,

쓸데없는 멋부림이 없는 쉬운 문장

어둠의 인간사와 대비되는, 혹은 거기에 장단을 맞추거나

때로는 환상풍으로 뒤틀리는

중국의 대지와 산천초목에 대한 호방하고도 감각적인 묘사

이런 것들에 매료되어 질주하듯 읽어나갔다

가장 강렬한 작품은 최초의 독서 일광유년

가장 뛰어난 작품은 사서

가장 예외적인 작품은 풍아송

가장 자극적인 매운맛은 작렬지

혁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가차없이 드러난 작품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물처럼 단단하게

온갖 잡놈들이 주인공인 와중에 그나마 긍정적인 캐릭터는

레닌의 키스 속 마을 지도자 마오즈 할머니였다

잊지 않기 위한 각 작품의 후기

1.

일광유년의 유는 흐를 류이다

평균 수명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하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목구멍병, 즉 목이 막히는 증상으로

하나 둘 죽음을 맞이하는 산싱촌 마을

대대로 마을의 촌장은 이 병의 기원과 예방법을 파헤치며

해결책을 제시한다 현 촌장인 쓰마란은

인근의 수로를 끌어와 물을 바꾸는 방법을 제안하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강제하여 동원하지만

수십 년 노역으로 마침내 준설된 수로에서 발견된 물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오염된 물이었다

역순행하는 소설적 시간에 따르면

현 촌장의 윗세대 촌장은 흙을 갈아엎는 대규모 프로젝트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은 후

마을 사람들을 쥐어짠다 그 과정에서 모자란 인력을 충원하고자

국가기관 간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린 처자를 성상납하는 데 집단이 공모한다

그러나 이것도 해결책은 못 되었다

소설의 시간은 계속 거슬러 올라가 또 그 윗세대 촌장은

사십 세를 못 넘기는 마을 사람들의 수명 연장의 비책으로

대규모 유채밭 조성에 사람들을 동원한다

이것도 답은 아니었다

이 무렵인가 메뚜기떼의 습격으로 흉년이 들고

대기근을 맞아 마을 사람들은 가혹한 굶주림 속에

짐승의 시간을 보낸다

흐르는 세월 속에 어둠의 역사는 순환하는데

인간은 생생하게 가까이 와 있는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영원히 살 것처럼

촌장이 되고 싶어하고 권력을 누리고 싶어하며

애증과 원한에 얽매여 산다

서사에서 플래시백이 나를 감동시키는 경우가 잘 없는데

일광유년에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서술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일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엔딩까지 서사적 긴장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며 인간사에 대한 조망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잊혀지지 않는 두 가지 끔찍한 행위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목돈이 필요할 때마다

대처에 나가 행하던 인육장사와 피부팔이

전자는 여성의 몸팔기를 뜻하며

후자는 불법의료시술을 통해 화상 환자에게

허벅지 등 신체 부위를 뜯어주고 돈을 받는 행위였다

2.

일광유년 이후 옌롄커의 최신작을 읽어보고 싶었다

해가 죽던 날은 한 마을에서

폭염의 한여름,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일어나는

대규모 몽유 사태를 다룬다

몽유란 집단적 마비, 비이성, 히스테리,

일종의 좀비 상태, 불통 상태를 의미하는 것 같다

상부기관도 통제불능이라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는

약탈과 무정부상태의 소용돌이 속에

중심 인물이 집단 몽유를 멈추게 하고자

영원히 계속되는 밤을 끝장내고

떠오를 기미가 없는 해를 연출하기 위해

시신기름으로 가득 채운 연못 위로

거대한 불공이 되어 타오르는 피날레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대속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은유다

구성상 각 장은 하루 낮 하루 밤을 시간대별로 잘라나가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촘촘해지는 분단위의 시간 쪼개기로

극적이고 가파른 클라이막스를 조성한다

소설의 또다른 재미는 힘찬 메인 서사의 곁가지로

작가 옌롄커 자신이 실명으로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1인칭 소년 화자의 시선으로 옆집 사는 작가 옌롄커가 풍자되는

일종의 메타픽션인 셈인데 깨알같은 재미가 있다

p.303
"옌 아저씨, 얘기를 좀 따스하게 들려주실 수는 없나요. 아저씨 소설을 읽으면 항상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거든요. 아저씨 소설은 음기가 너무 강해요. 저는 겨울에 책을 읽으면 그 안에 화로가 있는 것 같고 여름에 읽으면 안에 전기 선풍기가 들어 있는 것 같은 그런 소설이 좋거든요."

3.

폐쇄 공간 속 부조리한 악몽의 연속이고

알레고리가 강하여 카프카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붉은색으로 형상화되는 관리자 ‘아이’는 홍위병을,

추방된 지식인들의 강제노동수용소인

위신구 99구라는 세팅은

문화대혁명 시기의 하방下放을 떠올리게 했다

황허 일대에 펼쳐진 일망무제의 황무지며

나무들을 베어낸 땅에 강철제련을 위해 설치한 용광로들을

마치 버즈아이뷰로 조감하는 듯한, 99구의 세상끝 이미지는..

극단적 황량함과 염세주의적 시정을 불러일으키며

읽는 이의 뇌리에 깊숙이 스며든다

그곳은 러시아 문학에서 본 시베리아 유형지 같기도 하고

영화 데어윌비블러드에서 유정들이 놓인

미국 남부 사막 같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근거리에 산업시설과 공단이 있으면서 인간소외가

손끝에 만져질 듯 감각되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붉은 사막이야말로 가장 근접한 이미지라고 생각되었다

사서는 그러한 공간 속에서 밀농사든 제련이든

국가기관이 강제하는 목표달성의 이데올로기 아래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인간군상들의 이야기로서

그 이데올로기가 아무리 강력하고 철저해도

결코 콘트롤할 수 없는 인간성의 어떤 영역들이 존재함을

역사에 대한 허무감으로 쓸쓸하게 증언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금서로 지정한 성서 속의 예수처럼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아이’의 최후는

해가 죽던 날에서 자신을 불태워 살신성인하는 주인공처럼

속죄의식을 드러내는 캐릭터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옌롄커의 작품들 중 최고작이라 생각하며

잊을 수 없는 장면 베스트는

12장 ‘작가’가 자기 신체를 잘라가며 피를 흘려부어

품종이 뛰어난 밀을 강박적으로 재배하는 과정의 묘사였다

집중력과 광기가 실로 어메이징했다

4.

풍아송은 중국 고전 시경의 권위자인 대학교수 양커가

역시 대학교수인 아내와 부총장의 불륜을 목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작품 초반은 지식인을 자처하는 교수들이

학문이 아닌, 인적 관계와 타협으로 권력을 형성하며

승진과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학 내 만연한 비리를 고발하는 텍스트로 보였다

그러다가 중반에 이르면

오히려 선량한 주인공이 부적응자로 몰리며

정신병원에 구금되는 대목을 기점으로 카프카적 분위기를 띤다

그때부터 소설은 방향을 잃은 중국 지식인의 위선과 이중성,

무책임, 무기력, 도피주의, 나아가 정신착란을 다룬다

학문에 헌신하는 평범한 지식인인 것 같았던 주인공 양커는

갈수록 복잡하고 괴기한 정신세계, 군자연하면서 심층에 있어선

잡놈이라 할 수밖에 없는 행태를 보여준다

소설 중후반부는 중국판 무진기행처럼, 나름 학자이고

대학교수로 성공한 그가 고향에 돌아와 벌이는 사건들이다

과거에 자신을 사랑했던 늙어버린 옛 여인을 대하는 주인공의 태도는

애매하고 비겁하며, 그 여인이 보답 받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며

죽어간 후엔 여인이 남긴 딸에게 성적으로 집착한다

주인공은 또한 변화된 고향 마을의 유흥가를 서성이며

젊은 업소여자들에 계속 끌리는데

자기 욕망에 솔직하지도 못하면서

그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존경 받는 지식인인 척한다

그가 보이는 위선과 회피와 기만의 행태는

정신적 붕괴와 착란에 이르고

이야기는 예측 불가능한 결말로 치닫는다

고대시의 잔재가 남아있는 폐허의 유적지를 발견한 후

이곳에 현실에서 좌절한 교수들과 창녀들을 모아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도모하기 위해 날마다 오줌갈기기 대회를 연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에 이르면.. 소설은

섬뜩한 부조리극이랄지 위악적인 풍자극으로 변모해 있다

지금까지 읽은 옌롄커의 작품과 결이 다른 예외적인,

그러나 역시 문제적인 작품이었다

출판 후 학계의 질타와 검열의 포화를 맞으며 옌롄커는

풍아송이 자신의 정신적 자서전이라고 발언했다

내용과 무관한 듯 유관한 각 장 타이틀의 시경 구절들이 참 아름답다

5.

옌롄커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큼 알려진 작품인데

이미 읽은 작품들에서 친숙해진 모티프들이 반복되고 있어

단숨에 수월하게 읽혔다

집단 매혈로 인해 에이즈에 점령 당한 마을의 이야기

상부가 주도한 대대적인 매혈 운동의 우두머리였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로 누군가 마을 어귀에 놓아둔

독 묻은 토마토를 먹고 죽은 열두 살 소년이 화자이다

미을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사태에 책임감을 느껴 온 할아버지는

고뇌하다가 결국 아버지, 즉 자기 아들을 응징하게 된다

서문에서 작가는

이 작품이 한 편의 소설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몸부림과 그 몸부림으로 인한 울음이 가득 차 있다,

본인의 이런 울음은 피를 토하는 날카로운 외침이자

문학의 높은 가지에 엎드려 토해내는 잠꼬대다,

한국 독자가 이 작품을 읽기 전 강한 심장을 준비하시길 바라고

새의 몸부림을 느끼고 몸부림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울음과 잠꼬대를 경청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적고 있다

6.

한 도시의 흥망성쇠의 연대기

자례시를 번영하는 대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쿵씨 일가의 둘째 쿵밍량

그에 못지않은 야심가이자 쿵밍량과 천생연분인 팜므파탈 주잉

이것이 과연 인간인지 개돼지인지..

참으로 자극적이고 막장스러운 소설이었다

텍사스의 권력자 가문의 야망과 사랑과 증오와 복수를 다룬

오래된 미드 달라스가 떠올랐다

현재 중국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국가 정체성은

공산당 영도하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로 알고 있다

작가는 이 시장경제, 근본 없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개인의 권력욕과 그것의 승인 체계로서의

국가기관을 비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옌롄커는 자본주의도 비판하고

중국의 근간인 공산체제와 사회주의도 비판하는 작가인가?

아니, 이념과 현실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작가는 (인민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고 해야 옳겠다

앞서 읽은 책들에서도 언제나 그랬다,

세상의 모든 위대한 작가가 그러하듯이..

혹여 우리 한국의 독자가 옌롄커의 작품을 읽으며

작가가 공산체제와 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만큼

피상적이고 천박한 태도는 없을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대상은 주의나 체제라기보다는 자국의 현실이고

진도 차이 강도 차이가 있을망정 본질에 있어 중국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인의 자국 비판을 바라보며 왜 우리가 중국을 비판하는지?

자기네 일은 자기네가 알아서 하겠지

중국을 우습게 볼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 집중하면 된다

다만 만국의 언어 자산인 문학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는,

현실 인식의 예리함, 통찰력, 성찰의 깊이에 영감을 얻을 뿐

그런 의미에서 작렬지의 작가의 말에서

중국의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드러난 부분을 인용해 본다

“오늘날 중국은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방식으로, 가장 짧은 시간 내에 유럽과 미국의 역사 단계를 추월하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규칙과 과정이 목적으로 대체되곤 한다. 어떤 수단이든 빨리만 갈 수 있다면 그 길은 발전과 부귀, 영웅과 승리자로 나아가는 지혜나 계단으로 받아들여지고, 권력과 재력은 암암리에 영혼을 탈바꿈시키려 한다. 이로 인해 14억 인구의 오래된 땅에서 매일 매 순간 발생하는 일들은 놀랍고도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황당하고 복잡하며 무질서하고, 그 모든 미추와 선악, 시비, 실재와 허무, 가치와 무의미가 어떻게 연계되어 발생하고 존재하는지 판단할 수도 분석할 수도 없다. 사물에 대한 인류의 모든 해석이 그곳에서는 황토 고원의 침묵 앞에 선 자석처럼, 강력한 자성과 자장을 가졌음에도 운석이 바다에 가라앉듯 사라진다.”

이어서 작가는 이러한 현실 앞에 선 중국 작가의 운명에 대해 말한다

“전 세계가 오늘날 중국에서 날마다 발생하는 기이한 일들에 아연실색할 때, 모든 중국 작가는 그러한 인류 역사의 경험을 초월하는 실재 앞에서 현실에 대한 글쓰기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기력한지를 느꼈다. 세계문학의 모든 유파와 주의, 기교가 중국의 기이한 이야기 앞에서는 거센 탄식을 내뱉을 것이다.
중국의 현실은 새로운 글쓰기를 강요하고 있다.“

7.

소설의 배경인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서우훠 마을은

원시 공산주의의 공동체 이미지를 갖고 있다

평화롭게 살던 고립된 이 마을이 개혁개방의 시대를 맞아

권력과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다

러시아에서 레닌의 유해를 가져와 마을 근처에 기념관을 세움으로써

관광사업을 벌이려는 야심가 류 현장

그는 레닌의 유해를 사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장애인 마을 사람들의 기예를 이용해 공연단을 조직한다

광대노릇을 하다가 망가지고 불행해진 마을 사람들은 결국

호적을 반납하고라도 인민공사의 행정적 관할과 간섭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함으로써 전통적인 자급자족 공동체로

돌아가는 극도로 비현실적인 선택을 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레닌의 키스는 혁명과 자본을 동시에 희화화한다

한편 과거 혁명전사 출신인 마을 지도자 마오즈 할머니의

마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과 속죄의식도 주제의 한 축이 되고 있다

소설 구성상 눈에 띄는 특징 하나는 해설이

각주 기능에 머물지 않고 본문과 대등한 비중으로 교차되며

서사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잇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

각별히 공들여 삽입한 서우훠 마을의 다채로운 방언이라든가

서우훠 마을의 형성 과정에 대한 전설인

화사오포의 화사오 이야기라든가 마을 축제의 생생한 묘사 등에선

정치적 격변이 쉽게 지우거나 말살할 수 없는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한 메시지가 느껴졌다

침묵과 한숨의 어느 장에서 문학은,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기억상실, 국가 관리의 책략과

사회제도가 야기한 역사에 대한 집단적 망각에 저항하여

기억에 수정과 치유를 가하며 기억을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했던

옌롄커의 말을 메모해 둔다

소설 초반에 서우훠 마을 축제의 하이라이트로 소개된,

마을 사람들이 언제나 열광하며 눈물 흘리는,

차오얼이라는 비르투오조의 슬픈 연희가 떠오른다

그녀가 맡은 복합장애 여자 역과 고승이 주고 받는 교창인

일곱 번 돌아보다(중음도)의 텍스트는 심금을 울린다

독후감을 쓰며 이런저런 부분들을 다시 펼쳐 보니

처음 읽을 때 가졌던 마음 이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옌롄커..

이만하면 됐다, 이쯤에서 끝내자 싶다가

혁명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좀 더 정확히 알고 싶어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아래 두 작품까지 읽었다

8.

옌렌커의 문장은 이야기를 운반하는 도구의 의미가 강해서

언어의 세련됨이나 정치함과 같은

테크닉 요소에 주목할 일이 없었는데

여기선 문장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새삼 돋보인다

혁명 사상이 투철한 군대 내 모범병사 우다왕과

사단장 아내와의 불륜이 군영 내에서 이루어지는 내용으로

양조위와 장만옥이 연상되는 표지 그림이 암시하듯

나른한 에로티시즘이 넘실대는.. 프랑스 영화랄지

프랑스령 식민지 동남아 배경의 멜로물 한 편 본 듯한 여운이 남는다

그러나 작품의 속살엔 마라처럼 독성이 강한 메시지가 들어있다

그것은 혁명에 대한 조롱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제목은 마오쩌둥의 유명한 어록 중 하나로

욕망과 격정의 언어 속에 아이러니로 사용되었다

9.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쌍둥이로 볼 수 있는 작품으로

좀 더 세부전술이 뛰어난 장편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시기를 배경으로 혁명이라는 광증,

혁명병이라고 할 어떤 허위의식을 고찰하고 있다

봄날 들판의 토끼들같이 성욕에 눈먼 젊은 커플에게

스스로 혁명을 한다는 자의식은 섹스와 시너지를 내고

섹스는 혁명을 한다는 자의식을 고양시킨다

혁명 아드레날린은 최음제가 되고

성욕은 혁명적 자의식 발현의 도화선이 된다

요컨대 억압된 성적 욕망이 사회적 야망과 뒤엉키는 이야기다

믿을 수 없는 화자인 1인칭 주인공은 후반으로 갈수록

혁명을 구실로 사적 이득을 취하는 잡놈으로

불륜에 살인까지 저지르는 범죄자이자 과대망상환자임이 드러난다

혁명과 사랑(성)은 통제불능의 도취이며

일종의 정신적 광증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것 같다

실은 이런 점이 혁명의 속성이기도 할 것이다

혁명의 이상은 아름답지만 혁명의 실상은 어글리하다

그렇다고 혁명을 통과해 온 역사가 무의미한 것만도 아닐 것이다

그냥.. 역사는 참 잔인할 따름이다

이 책엔 주인공이 조직한 촌 단위 혁명 세력이

봉건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마을의 상징인 사당을 유린하는

충격적인 패륜 장면이 나오는데 중국의 근대화 과정 역시

이렇듯 지독히 어글리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라고 크게 다를까..

근대화라는 것도 하나의 처절한 전쟁이었던 것

작가의 유소년기 학습의 교과서였을 혁명기 마오의 언설과 어록들,

개개인에게 주입된 국가적 사상과 정치적 수사, 선전선동의 언어들이

주인공 커플의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욕망과 감정이 오가는 대화에

어마어마하게 인용되고 자유자재로 변주되고 있는 작품이다

10.

옌롄커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는 처음이었다

2014년 경 이런저런 해외대학에서의 강연 기록 및

국제문학상 수상연설문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황하를 건너고 바러우 산맥을 넘듯

분량도 만만치 않은 그의 여러 책들을 읽은 후

작가의 육성을 접하며 독서를 정리하기에 적절한 책이었다

총 12장 가운데 인상적인 텍스트는 아래와 같다

2장 국가의 기억상실과 문학의 기억

5장 금서와 쟁론에 대한 몇 가지 견해

6장 문학에 대한 나의 반성문

8장 두려움과 배반은 평생 나와 동행할 것이다


439	호박과 함께하는 어떤	김주향	2025/07/05	15

438	25년 6월 부산 3박4일	김주향	2025/07/01	22

437	여름 음식	김주향	2025/06/22	26

436	여름학기 진행중	김주향	2025/06/22	25

	옌 롄 커 대 장 정	김주향	2025/06/05	41

434	토트넘 2025 유로파리그 우승 기념	김주향	2025/05/27	25

433	25년 봄학기 종강	김주향	2025/05/16	28

432	제발트 여기까지	김주향	2025/05/11	31

431	25년 4월 베니스_마무리	김주향	2025/04/25	36

430	25년 4월 베니스_등꽃 향기	김주향	2025/04/25	33

429	25년 4월 베니스_테아트로 페니체 정샘 공연	김주향	2025/04/25	31

428	25년 4월 베니스_파도바 투어	김주향	2025/04/25	33

427	25년 4월 베니스_주데카 섬과 레덴토레 교회	김주향	2025/04/24	33

426	25년 4월 베니스_출발과 도착, 숙소	김주향	2025/04/24	34

425	목련	김주향	2025/04/10	32


1 [2][3][4][5][6][7][8][9][10]..[30]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