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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제발트 여기까지

그동안 읽은 순서대로

현기증 감정들 1990

토성의 고리 1995

아우스터리츠 2001

이민자들 1992

공중전과 문학 1999

캄포 산토 2003

토성의 고리부터의 독후감은

여기저기에다 이미 적었다

오늘은 제발트의 남은 책들에 대한 소감이다

남은 책들의 공통점은 작가가 선정한

역사 속 인물들, 작가들에 대한 평전이라는 점과,

학술적 규격에서 벗어나

제발트 자신만의 시선과 서술형식으로 재조형한,

문학적인 초상화 장르라는 점이다

이러한 형식이 읽는 재미를 돋우며

다루는 인물들을 한층 참신하게 부각시킨다

살아있었으면 이런 인물 열전, 백 개 이백 개 써주었을 텐데

구상도 많이 해 놓았을 텐데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1.

자연을 따라. 기초시 1988

제발트의 초기작인 산문시집으로

세 사람에 대한 시적 초상이라고 할,

일종의 세 폭 제단화이다

첫째는 이민자들의 막스 페르버 편에도 나오는

르네상스시대 독일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둘째는 베링의 캄차카 탐험에 합류했던

18세기 독일의 과학자이고 의사이며 자연연구가였던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

셋째는 제발트의 분신에 해당하는 화자이다

각각의 제명은 아래와 같다

알프스의 눈과 같이

그리고 내가 바다 끝에 가서 머물지라도

어두운 밤이 전진한다

이중에서 나는 슈텔러 이야기가 참 좋았다

슈텔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 때

식물원에서 만난 러시아정교회 대주교

테오판 프로코포비치와의 대화 부분은 이러하다

밤이 내려와 노인은 젊은 형제와

종말의 새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텔러는 노인을 위로하기 위해

자연의 빛을 화제로 삼는다

테오판은 말한다-벗이여, 하지만

모든 것이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법이라네,

생명이 점점 바닥나면서

모든 것이 따라서 쇠퇴한다네,

종種의 증식이란

순전히 환상일 뿐일세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게지,

생명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이 부분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류블로프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화 내용보다 대화 주체들이 자아내는 정경과

감성의 유사성 때문인 듯

안드레이 류블로프는 정교회 수사이자 중세 아이콘 화가였다

영화 어딘가에서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류블로프에게

희랍인 스승 (그러고 보니 테오판과 이름이 비슷한) 데오파네스는

이런 말을 한다 신의 용서와 인간의 고뇌 사이에 살라

탐험대장인 비투스 베링에 대한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슈텔러의 눈에 그는 깊은 슬픔에 잠긴 한 마리 짐승이고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우울의 눈빛을 가진 사령관이었다

무인도에 좌초되어 혹독한 겨울을 보낼 때

죽음을 맞게 되는 베링의 최후에 대한 증언도

사무치게 다가오며..

아아 이것 말고도 좋은 부분이 너무 많다

여행자이고 탐험가였던 슈텔러의 일대기가

드라이한 시적 문체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낭만적 해양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전개되는,

텍스트 전체가 다 좋다

일일이 옮길 수 없고 아무래도 슈텔러 장 전체를

필사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에..

자연을 따라. 기초시의 독서를 기념하며

텍스트에서 소개된 회화와 저서의 이미지를 가져와 본다

제발트의 책은 예외없이 이러한 확장성이 있다

더 알고 싶고 더 찾아보고 싶게 한다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중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하단 패널 그리스도의 매장 확대

게오르크 빌헬름 슈텔러가 남긴

동물학 저서 데 비스티스 마리니스(해양동물집)

검색 중 알게 된

슈텔러의 탐험 여정을 엿볼 수 있을

베링과 함께 한 항해 일기, 1741-1742

제발트가 꿈속에서 뮌헨으로 보러 갔다는

알트도르퍼의 그림 알렉산더 대왕의 전투(1529)

산문집 전원에 머문 날들 1998

원제는 시골 여관, 시골에서의 유숙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요한 페터 헤벨

장 자크 루소

에두아르트 뫼리케

고트프리트 켈러

로베르트 발저

얀 페터 트리프

제발트는, 살짝 변방에 위치한 위 여섯 명의 작가들에게

각별한 애정과 연민을 갖고 이렇듯 유니크한 평전을 썼다

이번에도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이..

헤벨과 (많이 들어본 그) 루소가 재미있었고

무엇보다도 발저에 대한 글이 감명 깊었다

이 게시판 로베르트 발저 게시물에 인용한 바 있다

아래는 전원에 머문 날들의 목차이다

하늘에 혜성이 떠 있네
-라인 지방 가정의 벗의 명예를 기리기 위한 달력 기고문

이 호수가 바다였다면
-생피에르섬을 방문하고

무엇이 슬픈지 나도 모른다
-뫼리케를 위한 소박한 추모

죽음은 다가오고 시간은 지나간다
-고트프리트 켈러에 대한 주석

고독한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를 기억하며

낮과 밤처럼
-얀 페터 트리프의 그림에 관하여

3.
끝으로

아리아 다 카포처럼

다시 돌아온

내가 최초로 읽은 제발트의 책

현기증 감정들 1990

처음 읽을 땐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끌린다, 정도였지만

제발트라는 작가에 대해 좀 알고 다시 들여다보니 수월하다

이 책엔 네 개의 이야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 벨, 또는 사랑에 대한 기묘한 사실은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마리 앙리 벨의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 외국에서는

제발트의 이탈리아 여행기로 여기에

1913년 요양차 이탈리아로 여행한 카프카의 행적이 반영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인 K 박사의 리바 온천 여행의

K는 카프카이겠다

네 번째 이야기인 귀향은

제발트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책 어딘가에서 제발트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들,

그렇지만 동일한 기운의 영향 아래 일어났다고 보이는 사건들의

은밀한 교류에 대해 썼다고 밝힌다

옮긴이 배수아는 이 이야기들이 별개인 듯 보이지만

하나의 우주 안에 있는 네 개의 별자리라고 표현한다

현기증 감정들은 스탕달-이탈리아-카프카-제발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되어 있는 책이었다

밑줄 친 부분 위주로 다시 살펴보며 깜짝 놀란 것은

제발트의 이탈리아 여행기에 서술된 베니스 인근

베로나 및 파도바에 대한 대목에서였다

제발트가 베로나에 올 때마다 자주 들렀다는

주스티 정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정원의 삼나무 아래 돌벤치에 누워 오후 시간을 보내며

행복감을 느낀다 가을날 대기에 가득한 회양목의 향기를 마시고

이백 년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 분명한

사이프러스나무들의 영원히 지속되는 초록빛을 보며

영국 카운티의 한 묘지에 있는 주목을 떠올린다

그는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에 설치된 조그만 분수에서

얼굴과 손을 씻고 마지막으로

정원 안쪽에 한 번 더 시선을 준 후 출구로 나온다

이 이야기와 함께 책에는

주스티 정원 사진 한 장과 입장권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2005년 여름 내가 베로나에 갔을 적에 들른

그곳 사진들을 꺼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안내서에서 보고 마음에 들어 찾아간 Giardino Giusti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배합된 르네상스 양식의

그 아름답고 이상적인 정원

또 하나

제발트는 베니스에서 파도바로 떠나

글로만 접했던 엔리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가서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본다

p.83~84
내가 읽은 글에 따르면 화가 조토가 그린 그곳 프레스코 작품의 색채는 세월이 흘러도 결코 시들지 않는 생명력을 지녔고, 지금 봐도 여전히 독창적인 선명함이 그림 안에 영구히 붙잡혀 있는 인물들의 모든 움직임, 모든 표정을 지배한다고 했다 한낮이 채 되기도 전부터 도시를 뜨겁게 데우며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를 피해 예배당 내부로 들어가서 천장에서 바닥까지 닿는 높이의, 연이어진 네 점의 벽화를 실제로 마주했을 때 나를 가장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영원한 슬픔의 현장을 떠다니는 천사들이 거의 칠백 년 동안 그치지 않고 토해내고 있는 소리 없는 애통의 울부짖음이었다 천사들의 울부짖음이 실내의 적막을 뒤흔들며 그대로 귀에 울려오는 듯했다 천사들은 너무 크나큰 슬픔을 견디느라 양 눈썹이 거의 서로 붙을 만큼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의 두 눈이 아예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베로나산 안료의 초록빛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저 흰색 날개가 우리 인간이 상상해낸 것 중 가장 놀라운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천사들이 비극적인 현장을 방문하였도다

지난 4월 베니스 여행에서

내가 굳이 파도바에 간 것은,

그곳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가서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본 것은,

무의식적으로 제발트의 저 대목에 영향을 받아서였을지도..

그렇다면 이 또한 제발트가 말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서로 무관하게 일어난 사건들,

그렇지만 동일한 기운의 영향 아래 일어났다고 보이는 사건들의

은밀한 교류의 사례가 아닐는지..

제발트가 말하는 조토의 천사들은

바로 아래 그림들 속에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앞에서

천사들이 칠백 년 동안 그치지 않고 토해내고 있는

소리 없는 애통의 울부짖음이 이 그림들 속에 있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

천사들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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