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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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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서울의 낮은 언덕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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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말미의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당시
베르너 헤어초크의 이 책에 영감을 받은 모양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은 바 있다
풍월당에서 나온 <얼음 속을 걷다>
1974년 베르너 헤어초크가..
전후 독일 영화의 정신적 지주인
영화비평가 로테 아이스너가
파리에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기로 한두 시간이면 될 뮌헨-파리 구간을
11월말부터 12월 중순까지 스무 날 남짓
고행하는 수도자처럼 걸어간 기이한 도보여행기로
타르코프스키의 83년작 [향수] 마지막 장면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르는 책이었다
<북쪽거실>의 수니처럼
<서울의 낮은 언덕들>의 주인공도
낭송극 전문배우인 경희이고
경희의 세계 곳곳 도시 중심의 방랑 여행
거기서 만난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결코 평탄하지 않은 자신의 삶 이야기가 그 내용이다
부부교사가 사는 굴뚝방
미스터 노바디
베를린 치유사의 집
유학시절 친구인 반치
여성 저널리스트 등이 나오며
5장에서 여권 확인을 명분으로 쫓아와 숙소까지 난입하는
경찰관 세 명과 좁은 골목의 어둠 속 낮선 남자,
그림자의 혀에 대한 끈적하고 공포스러운 묘사는
안전장치 없이 임시거주지를 교환하는
익명의 여행자 네트워크 개념 카라코룸과 더불어
위험을 담보로 한 자유라는,
여행의 본질을 건드리는 부분으로 기억에 남는다
제목에 명시된 서울은 도통 나오지 않다가
소설 피날레에 이르러서야 언급된다
경희를 엄마로 믿고 있는 듯한
여성 저널리스트의 목소리로 짐작되는 ‘나’가 태어난 날
아버지가 남긴 노트 갈피엔 보랏빛 루핀꽃과 함께
서울의 낮은 언덕 중 하나, 동이 터올 무렵이라는 메모가 있지만
루핀이 피어 있는 서울의 언덕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버지가 루핀의 언덕을 산책한 이른 아침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왔던 낯선 풍경을
나는 영원히 알지 못한다고 한다
배수아의 작품에서 서울이든 어디든 한반도의 구체적인 장소,
한국이라는 특정 국가는 회피되어 왔다
고향과 국가와 결별함으로써 부모와 혈육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회피되어 왔다
평자들에게 어떤,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
이 작가만의 유니크함 중 하나이다
작품의 결미를 장식하는,
경희의 목소리로 녹음되었다고 하는 낭송극 대본
<사오라족 샤먼의 아내>가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노래는
어느 장에선가 경희의 베를린 유학시절 친구이자
중앙아시아 출신으로 짐작되는 반치가 말한 시이기도 했다
배수아 작품 속 낭송극 전문배우들이 선호하는
긴 호흡의 산문시에 해당한다
길지만 옮겨 적으며 소리 내어 읽어 본다
노래의 마지막 대목에서 울기 위해 다시 읽는다 꼼꼼히 읽는다
p.275~278
위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있어 샤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 그의 영이 그의 몸을 떠났다
그의 아내는 천막 중앙의 화덕 곁에 서 있었다
화덕 위 솥에는 물이 펄펄 끓었고
그녀는 솥 안에 남편의 약으로 쓸 연두색 새순이 돋은 어린 봄느릅나무의 가지를 넣었다 그것은 그해의 첫 새순으로,
그녀가 언 땅을 헤매서 찾아낸 것이다
뚜껑을 열자 한바탕 김이 피어나며
천막 안이 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눈앞에서 남편이 빛 속에 흰 새를 타고 훨훨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편이 탄 새의 꼬리를 잡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새는 흰 깃털 하나만을 남기고
아득하게 솟구친 구름의 산을 향해 수직으로 상승했다
그녀는 남편의 침상을 돌아보았다 침상에는 그녀 남편의 육신이 여전히 누워 있었다
입을 반쯤 벌린 그는 두 눈을 뜨고 있었으나 더 이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흰머리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의 두 눈은 터진 실핏줄로 시뻘겋게 보였다
구부러진 굵은 정맥이 그의 온몸을 탁한 녹색의 쇠사슬처럼 여러 겹으로 휘감았다
내가 사랑하는 곳이 있다, 하고 그는 지난밤에 말했었다
드높은 나무 위,
바람의 품,
구름 속으로 솟구친 고독한 장소,
절벽의 끝
부글거리며 끓는 물속에 흰 새의 깃털이 떠 있었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말 탄 사람들이 천막 밖을 지나쳐 달려갔다
그들은 반달 모양의 칼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이 칼을 한 번씩 휘두를 때마다 달빛이 조각난 채 그녀의 눈앞에 흩어졌다
술병과 거울이 깨졌다
늑대들이 울었다
북풍이 휘몰아쳤다 숫양이 검은 피를 쏟았고 여인의 가슴에서 검은 젖이 흘러나왔다
화덕의 불이 꺼졌다
샤먼의 아내는 풍성한 검은 머릿단을 가슴께에 늘어뜨리고 흰 이마가 달처럼 둥근 열여덟 살이었다
세계수의 아버지여, 나도 그를 따라가게 해주세요, 흰 새를 보내주세요, 하고 샤먼의 아내가 외쳤다
그러자 물속의 깃털이 날개를 편 새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가 이렇게 말했다
너는 오래 생각하면 안 된다, 땅이 갈라졌으니 암석의 틈새는 곧 아물 것이고
두터운 이끼가 입구의 균열을 감추어버릴 것이다
지금 당장 그 새를 올라타야만 이미 명부로 떠난 죽은 이를 뒤따라갈 수 있다
너는 오래 생각하면 안 된다, 하늘이 갈라졌으나
누구도 모르는 찰나 빛이 그 자리를 채울 것이다
너는 오래 생각하면 안 된다, 죽은 이는 그 어떤 살아 있는 사람도 따라잡을 수 없게 빠른 속도로 간다
너는 오래 생각하면 안 된다, 뒤돌아보지도 말고 너울너울 춤추며 가라
그의 기억이 그와 함께 간다
그 자신이 그와 함께 멀어진다
그는 오직 가고 있다, 무엇으로든 멈추어지지 않는 발걸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다......
p.293~305
새를 타고 날아간 샤먼의 아내가 도착한 곳은 적갈색 바위 땅 황무지 한가운데, 커다란 강가의 작은 오두막집 앞이었다 납작한 돌로 벽을 세우고 강물에 떠내려온 넝마와 나뭇가지를 지붕으로 얹은 오두막집은
허리를 굽히고 들어서야 할 만큼 낮았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가 수천 개의 돌들이 동시에 높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요란하게 천지에 진동했다
강물은 밝은 회색 빛깔이었다 암석이 쌓인 강바닥에 급류가 부딪혀 흐를 때마다 분노한 물거품이 샤먼의 아내를 덮칠 듯이 높게 일곤 했다
강에는 배도 사공도 없었으며
짙은 녹색의 구름으로 덮인 무섭게 낮은 하늘에는
해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풀 한 포기 없는 늙음의 땅이었다
샤먼의 아내는 본능적으로,
강 건너편으로 가야만 망자인 남편을 만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산처럼 높고 사나운 물살의 강물을 어찌 건넌단 말인가, 마음을 짓누르는 음울한 바윗덩이들이 아귀처럼 소용돌이치는 강물에 어떻게 몸을 담근단 말인가
그때 오두막집에서 한 인간의 형상이 걸어 나왔다......
아니 기어 나왔다
그것은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이 머리와 몸통만으로 이루어진 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산돼지처럼 추하고 고목처럼 늙고 쥐처럼 교활해 보였다
그는 자신을 아바갈이라고 소개했다 아바갈은 대대로 방울과 가면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가 만든 가면은 특히 영험한 곰과 무쇠 구름과 흙의 폭풍과 비와 구리거울의 가면이었으며
누구든지 그 가면을 쓰면 곧 곰과 무쇠 구름과 흙의 폭풍과 비와 구리거울이 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마법사로 여겼다
그렇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시절 그는 죽은 망령들의 데스마스크로 가면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가면으로 망령들을 이 세상으로 다시 불러올 수 있었으리라
그러던 어느 날 신들린 채로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그는 팔다리를 모두 잃고 불구가 되었다고 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강물은 어느 날 갑자기 모두 말라버리고
거짓말처럼 붉은 돌바닥이 드러나게 되는데 그것이 언제일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아바갈이 말했다
나는 이런 괴물이 되었지만, 그리하여 그 어떤 여인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어떤 여인도 사랑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면으로 망령을 불러오는 재능만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고 아바갈이 이어서 말했다
그들은 함께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누우면 남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좁은 오두막 안
돌벽 틈새로 들어온 녹빛깔의 무거운 광선이 그들 사이의 공간에 투명한 격자를 만들었다
오두막의 모든 벽에는 아바갈이 만든 가면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올빼미의 가면, 독수리의 가면, 곰의 가면, 늑대의 가면, 숫염소의 가면들이었다
아바갈이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그리고 나는 망령들이 내게 속삭이는 말은 인간의 언어로 다시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인간 중의 그 어느 누구도 내 말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답니다
그렇지만 나는 원해요 그 말을 나에게 들려줘요, 하고 샤먼의 아내가 간청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이 오두막에서 살게 됩니다, 하고 아바갈은 흙바닥에 누운 채 샤먼의 아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이 오두막에서 살게 됩니다
당신은 내 손이 되고 발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내 침대, 내 잠자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의 사이에 여섯 명의 아이를 낳게 됩니다
첫째 아이는 눈먼 장님으로 태어날 것이고 둘째 아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로, 셋째 아이는 두 팔이 없는 채로 태어나며 넷째 아이는 두 다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섯째 아이는 온몸이 종기로 덮인 문둥이로 태어나게 되겠지요 여섯째 아이는 건강한 여자아이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아이를 자신의 눈동자마냥 사랑하게 되겠지요 그리하여 어느 날, 대지에 붉은 번개가 치고 산들이 불꽃에 휩싸여 터지고 강물이 솟구치며 뜨겁게 말라버리는 날,
당신은 내 집을 떠나게 되는데,
당신은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문지방을 넘게 되는데,
그때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당신은 치마폭에 그 아이를 숨겨가지고 이 집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비참 속에 남겨두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저주를 내리게 되는 거지요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가지는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 나에게 저주를 내리지 말아주세요, 하고 샤먼의 아내가 외쳤다
나는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망령의 속삭임을 그대로 당신에게 옮겨 말하는 것뿐이지요, 하고 아바갈이 대답했다
그날로 그들은 여인과 남자로 함께 살게 되었다
아바갈의 말대로 그들은 연이어서 여섯 명의 아이를 낳았다
첫째 아이는 눈먼 장님이었고 둘째 아이는 벙어리이자 귀머거리였으며 셋째 아이는 두 팔이, 넷째 아이는 두 다리가 없었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날 때 샤먼의 아내는 자신이 낳은 것이 꿈틀대는 구더기 주머니인지 살아 있는 아기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아기의 온몸을 덮은 종기 위에 달라붙어 진물을 빨아먹은 파리 유충들을 손으로 걷어내 보아야만 했다
여섯 번째 아이는 건강하고 어여쁜 딸이었다 샤먼의 아내는 예전에 아바갈이 말했던 저주가 떠올라서, 그에게 과연 그 저주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당신이 나를 떠난다면 대신 이 아이가 자라서 나와 결혼하게 될 겁니다, 하고 아바갈이 대답했다
그래서 내 손이 되고 내 발이 되며 내 침대, 내 잠자리가 될 겁니다
그리고 장님이자 벙어리, 귀머거리에 팔다리가 없고 문둥병에 걸린 내 아이들을 낳게 되겠지요
그건 이 어리고 어여쁜 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운명이 아닌가요, 하고 샤먼의 아내는 충격으로 소리쳤다 생각해 보니, 나 자신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저 아이처럼 어리고 어여쁜 젊은 여인이긴 했군요 하지만 내가 이 아이를 데리고 가버리면 어차피 당신은 아이에게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기억의 깊은 심연에서 홀연히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겁니다, 하고 아바갈이 말했다
샤먼의 아내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고,
그러자 그가 사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아비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미의 곁에서 달아나버렸던 육신의 아비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바갈이 말했다 이제 이해할 수 있겠지요
당신이 이미 그 아이를 데리고 떠나버렸으므로, 이렇듯 내가 그 아이를 여인으로 취하게 되었을 겁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굉음이 다가오며
천지가 흔들리고 불붙은 돌덩이들이 지상으로 후드득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대지에 붉은 번개가 치고 산들이 불꽃에 휩싸여 터지고 강물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더니 뜨겁게 말라버렸다
순식간에 드러난 강바닥은 창끝처럼 날카로운 바위들이 굴러다니는 끝없는 마른 땅으로 변했다
아바갈의 오두막이 무너져 내렸다
땅바닥에 누운 아바갈의 몸 위로 바윗덩이들이 떨어졌다
그는 돌 더미에 파묻혀 죽어가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몸통과 얼굴이 너덜너덜한 피투성이가 되었다 어두운 피와 오물이 그들의 얼굴을 덮었고 그것은 그들의 존재가 이제 삭제되리라는 암시처럼 보였다
그래서 샤먼의 아내는 지금이 약속된 떠남의 시간인 것을 알았다
계시의 말이 행하는 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너울너울 춤추며 아바갈의 집을 떠날 때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했다
날카로운 바위가 산을 이룬 마른 강을 건너 반대편 땅에 이른 순간 샤먼의 아내는 커다란 곰과 마주쳤다 곰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샤먼의 아내를 쓰러뜨리고 그녀의 육신을 산산이 씹어 집어삼켰다
그리고 부드러운 살점과 체액을 제외한 찌꺼기를 뱉어놓았다
그렇게 재형성된 샤먼의 아내는 무섭게 늙은 노파로 변했다
자궁이 퇴화하여 사라졌고 뱃가죽과 젖가슴은 참혹할 정도로 탄력 없이 축 늘어졌다 피부는 악취가 났고 얼굴은 시체처럼 퀭하며 머리칼이 빠졌다
죽어라 흉한 짐승아
샤먼의 아내는 자기 자신의 투시물을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으나 자신이 무엇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붉은 언덕 뒤편에서 아이들이 나타나 그녀에게 돌을 던졌다
장님이면서 벙어리이자 귀머거리, 두 팔과 다리가 없는 아이들, 온몸이 종기로 뒤덮인 아이들이었다
샤먼의 아내는 다리를 절면서 달아났다
아이들이 던진 돌이 그녀의 등짝에 맞자 흐물하물하게 낡은 살가죽이 죽 찢어졌다 죽어라 늙은 짐승아 아이들이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입을 모아 합창으로 외쳤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맑은 종소리처럼 쟁강쟁강 울렸다
샤먼의 아내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몇 달 동안이나 붉은 황야를 걸어갔다
눈앞에 돌을 쌓아 만든 우물이 나타나 다가가면 그것은 피가 고인 웅덩이였고
먼 탑 위에 빵 무더기가 보여 달려가면 그것은 조장(鳥葬)의 잔해들로,
거무스름한 얼룩이 덮인 부서진 뼈들의 더미였다 먼 지평선에 가로놓인 산들의 모양이 희미하게 나타났다가
샤먼의 아내가 가까이 다가가면 지워지듯 사라져버리기를 반복했다
황야는 밤도 낮도 없었고 해도 달도 뜨지 않았다
황야는 동굴과 절벽, 돌의 언덕과 부서진 신들의 석상, 마른 강바닥과 버려진 가시덤불 정원의 형태로
끝없이 이어지기만 했다
한번은 황야 한가운데서 갑자기 나타난 한 노파와 마주쳤다
샤먼의 아내는 노파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파가 대답했다 나는 처음에는 아바갈의 아내였는데, 마을의 샤먼을 사랑했기 때문에 불구자 남편인 아바갈을 굶겨 죽이고 샤먼의 집으로 가서 그의 다섯 번째 아내가 되었다오
우리는 많이 사랑했지요 하지만 오래 사랑하지는 못했답니다
사랑이 끝나버린 후 나는 예상했던 대로 소가 되었지요
그래서 이렇게 늙고 살이 닳아버릴 때까지 밭에서 쟁기를 끌어야만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닳아서 형체조차 남지 않게 되었으니 아무도, 심지어 나조차도,
내가 누구인지 묻지 않게 되었지요
그리고 노파는 연기가 되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 샤먼의 아내가 누워 있는 위로 거대한 흰 새가 불그스름한 하늘을 가리며 허공을 천천히 날아갔고 샤먼의 아내는 그 새의 배에 적혀 있는 글자들을 읽을 수 있었다
기뻐하라 여인이여,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니,
너의 닳아버린 육신과 너의 사무친 고통에 화답을 하여,
너는 네 남편이 다시 살아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살아나 예전처럼 세상에서의 삶을 계속하게 되겠지만
그는 너를 모를 것이고,
너를 결코 기억하지 못할 것이고,
너는 노파가 되겠지만
그는 시간을 거슬러 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 되돌아갈 것이니,
너를 결코 알아보지 못하고,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흰 새의 복장을 한 무녀가 춤추는 가운데,
네가 그를 너의 아랫도리로 삼켰다가 다시 꺼내놓았고,
너의 벌거벗은 가랑이 사이 피와 음부를 통과한 덕분에
자신이 빛으로 살아났음을 알지 못할 것이고,
너는 아바갈의 집으로 돌아가 잃어버린 살과 피인 네 딸이 아바갈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것을 보게 되겠지만,
네 남편은 다른 여인을 아내로 얻어 천수를 누리리라
그렇다면 내 고통은 다 무엇인가 하고 샤먼의 아내는 죽지 않는 몸뚱어리로 생각했다
남편의 죽음 자리를 마주한 나는
한 번도 머뭇거리지 않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모든 육신이 필연적으로 시신의 모양과 냄새를 풍기게 되는 이 강 건너편으로 왔는데,
오직 남편을 죽음으로부터 되돌리기를 원했는데, 그것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를 찾아가는 길 내내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내가 앉아 있는 바위였고,
내 몸의 머리이자 배였으며,
밤하늘의 별이자 빗방울이고,
새벽의 광장이며,
광장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남자의 석상,
멀리 지평선을 지나가는 기차,
천장이 없는 조장용 붉은 탑,
언젠가 나를 공격했던 야생 고양이이며
어떤 특정한 순간에는 아바갈이기조차 했다
그는 나의 영원한 남편이며 나의 선조, 나의 샤먼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부활한 자이고, 나는 그로부터 잘려 나가야 한다
형체 없는 이 아픔이여 지금 내 고통은 남편의 죽음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욱 참혹하니,
나는 밤새도록 앓는다
나는 생애 내내 앓는다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있을 줄을 나는 예전에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
누구인가, 나를 이토록 가혹하게 벌하는 자여
내가 죽고 난 후 내 육신의 모든 살점은 수미산 조장(鳥葬) 바위에서 하늘의 참매들에게 모두 바쳐지리라
그러니 지금은 내게서 이 운명을 거두어달라
그러자 다시 두 번째 흰 새가 날아와 하늘을 가리며 그녀에게 두 번째 계시의 말을 전했다
딸이여,
이 세상의 모든 일은 결국 너로 인하여 일어나고 너로 인하여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네가 그렇게 할 수 있고 또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 애통하고 또 기뻐하여라
지금 이 순간 네가 눈을 뜨면 너는 꿈에서 빠져나오리라
너는 아픔을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작별이 완성된다
너는 꿈의 현상에서 깨어나며, 동시에 너는 또 하나의 꿈으로 들어가게 되리라
아바갈의 생과 작별하며,
아바갈의 생이 너에게 남긴 육체와 작별하며,
아바갈이 너에게 가한 것을 망각하며,
너는 더 이상 아바갈의 자식이자 여자가 아니게 되고,
그렇게 너는 아바갈을 잊으니,
아바갈과의 작별로 인해 다시 아바갈을 만나고,
아바갈을 떠났음으로 인해 아바갈의 여인으로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바갈을 보면서 너는 더 이상 고통의 의미를 묻지 않으리라
네가 타고 있는 영원한 순환의 바퀴에서 떨어져 나온 남편은 죽음의 영토에 머문다
사람들은 정령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천막의 문이 아닌 벽을 찢어
산 자들이 넘지 못하는 문지방을 만든다 그곳으로 시신을 실어낸다
문지방 안에서 너는 운다
그의 몸은 아득한 세계수의 꼭대기에 놓이고,
그의 고요한 눈길은 자신을 거두어줄 허공의 참매들에게 향한다
그는 목소리 없이 말하리라
‘젊은 시절, 나는 젊음이 좋았다
내가 노쇠하자, 비로소 나는 노쇠함도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죽었을 때, 나는 죽음 역시 좋았노라’
사물은 눈에 보이던 본래의 자리로, 망자는 참매에게, 인간은 아바갈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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