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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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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은은하게 미쳐있는 정영문, 그리고 베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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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배수아처럼 정영문도 나와 같은 65년생..인 거 같다
배수아처럼 번역작업도 병행하면서 90년대부터 꾸준히 책을 냈다
남들이 읽거나 말거나 팔리거나 말거나 계속 써 왔다
무어라 설명하고 어떻게 요약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동안 보지 못한 언어 세계에 홀려 주야장천 읽고 있다
이것은 개그인가 랩인가
끝없는 만담
무한히 옆길로 새는 여담
딴소리와 말장난의 향연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진다
작가는 삶에 핵심이 없는 것처럼
소설에도 핵심이 없다면서 ‘하나 마나한 이야기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풀어가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미쳐 돌아가는
의식의 착란 상태에 진입하곤 하는데 이때의 번득임, 이것이 백미다
자신의 글쓰기를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이라고 말하는 그는
본인이 사실주의를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으며
서사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서사에는 이제 나도 흥미가 없다
서사를 원하면 넷플릭스로 가면 그만
오늘날 서사는 세계관이라는 밈 안에서
극도로 단순한 인과관계에 의해 제조되는
저급한 이야기 방식을 가리키는 말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정영문 작가는 사건의 재현이 아닌,
의식과 사고의 재현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야기들이 생각의 궤도에서만 맴돌게 되는데
작가의 견해로 인간은 오로지 생각에‘만’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그런 것 같다
운명에 관여할 것인가 시간에 관여할 것인가
삶에서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
사건도 아니고 현상도 아니고 타인은 더더욱 아니고
심지어 자신의 몸도 행위도 관여는 할지언정 제어할 수 있다고 하기 어렵고
그나마 생각이라는 정신활동에 여지가 있다고 보는 것..
생각 또한 늘 제어가 잘 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제멋대로 널을 뛰고
툭하면 상상에서 망상으로 뻗어가며
대체로 편집과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가 거기서 달아나느라 고통스럽지만..
아무튼,
작가에 따르면
생각 속에서라면 약간의 정신적 자유를 수행할 수 있고
소설은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칭이라는 것
그 와중에 작가는 한국어를 떡 주무르듯 갖고 노는데
근래 나의 선호와 취향이 되어 온 배수아 정지돈 모두 통하고
버지니아 울프나 조르주 페렉의 책들처럼
소리 내어 낭독하는 쾌감이 있다
어마어마한 만연체임에도
문장 단위의 내적 논리가 명료하여 읽는 맛이 개운하다
때로는 한 문단이 단 한 문장으로 되어있기도 한,
쉼표들이 출몰하는 기나긴 문장이 다반사인 글들이지만
최종 서술어를 읽을 때까지, 즉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까지
이리도 하찮은, 하나 마나한 이야기들을 작가가 언제까지
얼마나 더 할 수 있는지, 곡예와 같은 생각의 향방이 어디로 갈지
도무지 알 수 없게 하는 스릴감과, 이야기의 최후가
예상을 엇나갈 때의 허탈한 아이러니에 중독되고 만다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소설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설
이때 언어는 현실과 얼마나 무관한지!
은은하게 미쳐있는, 어쩌면 심각하게 미쳐있을 수도 있는
이 작가의 언어 놀음이, 그 순전한 유희가,
능청스러운 예의바름과 무해한 자유로움이
독자인 내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작가 자신은 서사를 싫어하며
자기가 하는 이야기는 하나 마나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하나 마나한 이야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솜씨로 보면 누구보다도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생각이 든다
간혹 작가의 문체를 흉내내어 따라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기 쉬운
그런 문체를 구사하는데 절대로 근처에도 못 가리라 장담한다
흉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한편 문학작품을 고품격 여행서로 보는 나의 관점에서
정영문의 책들은 여행서 중에서도 최상급,
프리미엄 하이엔드급, 끝판왕이라고 해야겠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밴쿠버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는 텍사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샌프란시스코 여행기, 또는 체류기, 아니
작가의 말대로 표류기라 할 수 있고
다른 책들도 부분적으로 본인이 경험한 여행지, 체류장소에서의
일화들, 이라고 할 것은 없지만 기억의 편린들에 기초를 둔
상상 또는 망상의 총보이며
여행은커녕 삶의 의욕이 제로에 수렴하는 자가
불면과 우울, 무기력 속에 허우적거리다
강물에 떠 있는 나무토막이든 길에서 만난 개 한 마리든
우연히 망막에 맺힌 대상들에 마음이 동하여 이런저런 생각들을 펼치는
일시적 편집증의 인덱스인데..
여행서로는 전무후무 독보적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프롤로그.. 사무라이.. 어떤 작위의..를 읽고 나면 놀랍게도
밴쿠버 텍사스 샌프란시스코 다녀온 느낌 생생하고
이에 비하면 사려 깊은 정보와 열렬한 감정들로 넘쳐나는
세상의 많은 여행기들은 노잼이라 차마 읽을 수가 없다
작가의 최신작에서 출발해 거슬러 올라가다가
흥미가 깊어지면 데뷔작 또는 최초의 화제작을 찾아 읽고
거기서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경우 나머지를 닥치는 대로 읽는다, 는
내 나름의 독서 습성에 따라
읽은 순서는 다음과 같다
정영문 작가가 베케트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고 나서
강렬한 동기부여가 되어 읽은 베케트의 두 작품을 포함한다
프롤로그 에필로그(2022)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2018)
어떤 작위의 세계(2011)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두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1952)
한 나절이면 읽는다
이어서
베케트를 세상에 알린 고도는 몰로이에 비하면 미숙하다,
몰로이는 여행이라기보다 유랑의 이야기다, 라고 한
정영문씨의 말에 꽂혀 읽은
몰로이(1951)
언어 실험과 아방가르드 문학에 제법 단련이 되어간다며
자신을 믿었었는데 여기서 붕괴될 뻔했다
이해되지 않는 분량이 30프로 이상인 작품이어야
비로소 재미를 느낀다고 큰소리쳤던 내게
몰로이는 그 기준선을 넘어버린다
언어가 지시하는 대상과 형체를 끊임없이 지연시키고 유보하는,
정신분열자의 독백같은 소설이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하고 몇 초 생각하다가
번역의 문제겠거니 편리한 핑계를 대며 수백 개의 고개를 넘었다
그 와중에 잊혀지지 않는 장면 하나는 소재부터 기괴한
주인공이 돌멩이를 빠는 행위이다
츄파춥스같은 막대사탕 빨아먹듯 돌을 빠는 것은
주인공의 취미행동 같은 것인데 경우의 수를 따져
양쪽 주머니에서 이렇게 저렇게 돌들을 옮겨가며
돌빨기에 몰두하는 장면은 어떤 극한의 강박에 관한 메타포 같았다
굳이 몰로이를 거쳐야만 했던 이유는
작가 자신이 베케트와 몰로이를 틈틈이 언급했을 뿐 아니라
몰로이와 관계가 있다고 들은 정영문의 아래 두 작품을 읽기 위해서였다
달에 홀린 광대(2004)
바셀린 붓다(2010)
과연
두 작품 모두 몰로이 2부를 연상케 하는 부자관계의 패러디가 나오고
몰로이에서 스쳐 갔던 소재나 모티프가 언뜻언뜻 등장하며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지 않고 옆길로 새는 패턴도 비슷하다
그러나 정영문씨의 작품 스타일은 그만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네 작품을 사다놓고 잠시 휴식 중이다
오리무중에 이르다(2017)
겨우 존재하는 인간(1997)
하품(1999)
목신의 어떤 오후(2008)
쟁여놓으니 편안하고
자고 나서 눈뜨면 읽어야지 하는 생각부터 든다
독서..
좋게 말하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지만 활자중독이기도 하겠다
*
베케트 작품들을 읽고 난 여운 속에
로베르 팽제의 파사칼리아가 자꾸 떠오른다
고요So calm. 회색so gray.
이 두 어구를 비롯해 특정 어구, 특정 문장이 계속 반복되며
최면을 거는.. 소설이라 해야할지 시적 산문이라 해야할지..
프랑스 어디로 짐작되는 시골 전원을 배경으로
똥무더기 위에 엎드린 시체가 있다는 문장을 모티프로 한
바리에이션의 층을 쌓으며
방향을 알 수 없이 맴도는 범죄 미스테리가 전개된다
트리오라는 제목으로 파사칼리아 외
두 편이 묶여 있는 영문번역본으로 읽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음악적 흐름이
베케트와 비슷했던 것이 기억난다 힘을 받아
수록되어 있는 나머지 두 작품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정영문의 책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좋았을까
처음 읽은 프롤로그 에필로그와
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의
나른한 충격을 오래 잊지 못할 듯하다
정영문..
작가로서 사람으로서 너무나 궁금한 인물이다
김혜리나 신형철 같은 뛰어난 인터뷰어가
심층 인터뷰 한번 해주면 좋으련만
유튜브에 남아있는 인터뷰들은 너무 오래전이고
퀄리티도 좋지 않다
정영문 월드의 일부가 된 기념으로
여간해서 몰입이 되지 않던 바셀린 붓다의 앞부분에서
아름다운 인상을 남기며 독서를 이어가게 해주었던 구절을 기록해 둔다
작가는 어느 시점에 (촘스키로 짐작되는) 한 언어철학자가 말한
유명한,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라는 문장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히게 되는데 그즈음 미국 시인 존 홀랜더의 시
‘코일처럼 말린 알리자린’의 다음 구절들이
한동안 작가 자신의 일상을 지배하게 했다고 한다
신기하게 깊은, 진홍색 생각들의 선잠:
답답한 비리디언(청록색 안료 또는 그 빛) 속에서, 숨이 찬
무색의 초록색 관념들이 사납게 잠을 잔다
어느 책이었는지 모르지만 다음 문장도 마음에 새겨졌다
우울과 절망과 권태야말로 지력의 핵심이다
끝으로
작가가 그나마 거부감 없이 듣는다는 음악이면서
본인의 책 제목이기도 한 그 음악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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