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상의 발견
- 여행의 기록 -

 전체 게시물 수 : 295, 1 / 20 페이지

이 름    김주향
제 목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읽고

3월부터
요양(療養)과 탕치(湯治) 모티프에 이끌려
헤르만 헤세의 <요양객>을 먼저 읽고
이 책에 들어갔다
열린책들 번역으로 읽었다

1924년작
작가 나이 49세 때 발표되었다
집필 기간 중 1차세계대전이 있었다

머리말에 이런 문장들이 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할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세밀하고 철저하게
-이야기가 고통을 준다는 악평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것만이 정말로 재미있다는 견해가 옳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독서를 마치고 보니 정말 그랬다
너무나 재미있는 이야기의 연속인데
이 이야기가 실로 세밀하고 철저하며
그 세밀함과 철저함이 곧 재미의 본질인 작품으로
그런 면에서 토마스 만은 능수능란한 이야깃꾼이었다
그런데 그가 보여주는 사고의 폭이 얼마나 방대한지
문학이란, 소설이란 그냥 이야기가 아니라 새삼
치열한 인간의식의 구조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렬한 인물은 세템브리니였다
이 사람만 나오면 흥미진진해지곤 했다
조형적인 언변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이탈리아 지식인이며 시민적 계몽주의자인 그의
문/사/철을 넘나드는 웅변은 엄청난 흡인력으로
주인공 한스뿐만 아니라 독자를 사로잡는다
세템브리니의 이성과 진보에 대한 무한 낙관이
따분해질 무렵 카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이자
예수회 회원인 나프타가 나타난다
그는 세템브리니의 빈틈을 치고 들어오며
역설적 반격에 나서는 캐릭터로 선과 악을 뒤집고
천동설을 옹호하고 자연과학을 경멸하는데
이건 이거대로 설득력이 있다 특히 테러와
태형 고문 사형 화장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몹시 자극적이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의 끝없는 사상 논쟁은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파국으로 치닫게 되지만
두 사람이, 한스가 이곳 베르크호프 요양원에서
받게 되는 소위 '연금술적 밀봉교육'의
양극단에 위치한 멘토임은 분명하다

세템브리니와 나프타만큼 인상적인 주요인물은
베르크호프 요양원 원장인 '인체의 군주' 베렌스다
그의 첫인상은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 나오는
소록도 병원장과 유사했지만 권력자라기보다
비즈니스맨에 가까워 보였다 베렌스는
카리스마적 존재이면서 복잡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스킬은 의지의 관철보다는
가스라이팅에 가깝다.. 알레고리로 접근하기에는
여기 인물들은 피와 살을 가진 개인으로서
복합적인 정체성과 생생한 현실감이 두드러진다
베렌스가 그린 쇼샤 부인의 초상화를 보러 간 한스는
그에게서 생리학 유기화학 해부학 우울증 강의를 듣게 된다
그중 압권은 지방질 피지선 림프액의 작동에 관한 피부조직학
이 모든 의학적 내용이 믿을 수 없이 수려하고
매혹적인 문체로 서술된다 이에 영감을 얻어
한스가 독자적으로 심취하게 되는 생명론, 그리고
식물학 천문학 부분까지 포함해 뭐랄까, 눈앞에
언어로 디자인된 시네마스코프적 장관이 펼쳐지는 느낌이었다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더치 상인,
관능과 욕망에 충실한 압도적 존재 민헤어 페퍼코른이
한참 떠들어대는 약리학과 독물학,
그리고 한스가 매료되는 축음기로 듣는 음악까지
이 전방위적 분야들에 대한 토마스 만의 박람강기와 매니악한 접근,
미친 디테일로 이야기에 긴장의 고삐가 풀릴 틈이 없으며
소설 막바지에 요양원 부원장인 크로코브스키가 주최하는
교령술 또한 영매 유령 흑마술과 같은 오컬트적 요소로
이야기적 재미에 방점을 찍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창백한 말>이나 <예고살인>이 떠오르는 오싹한 장면들이 있었다
크라임 스릴러로 넘어가기 좋은 대목도 있었다
민헤어 페퍼코른의 죽음의 진상이 혹시나
두 연인 즉 한스와 쇼샤 부인의 계략에 의한 독살인가
하는 상상을 과연 나만 했을까?
물론 페퍼코른의 죽음은 살인이 아닌 자살, 자체폭발이었다

온갖 재료를 넣고 끓인 마녀의 비밀스프,
그것이 펄펄 끓고 있는 뜨거운 팟같은
이 책의 이 같은 교양수업은 19세기말 20세기초
유럽의 정신세계에 대한 고찰일 것이다
그런데 수많은 웅변과 발화들이 누구 입을 통해 나오든
서술자는 대상에 거리를 유지하며 때로는 코믹하게 바라본다
그는 누구 편일까? 모르겠다..
아마도 서술자=작가의 이러한 태도를
아이러니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메시지가 응축되어 있다고들 하는
문제의 설산 채프터에서 한스의 각성,
즉 ‘인간은 선과 사랑을 위해 결코 죽음에다
자기 사고의 지배권을 내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 또한
혼미한 정신 및 의식의 탈락 속에 나타난
일시적인 비전이어서 좀처럼 명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다음 채프터에서 한스는 이 각성의 순간을 잊어버리고
다시금 일상에 파묻힌다 그리고 요양원에 병균처럼 퍼져가는
끔찍한 무감각, 속출하는 히스테리, 과도한 흥분상태에
그 자신 스며든다 이는 전쟁의 전조증상이다
서사의 최종 향방이 전쟁터라는 사실도 아이러니다
병과 죽음의 상징인 요양원과 대립해
건강과 삶을 상징했던 평지가 1차세계대전 발발로
전쟁터가 되어버렸고.. 한스 카스토르프는
'수평생활자'로 7년간 빈둥거리던 윗동네 생활을 뒤로하고
그제서야 이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든다
그러므로 <마의 산>을 성장소설로 읽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작가가 어디선가 말한 바대로 성장소설이나
독일 교양소설의 전통을 패러디한 소설로 보이며
소설 전체에 일관된 서술자 시선의 아이러니는
토마스 만의 모던함, 즉 문학인으로서의 레벨이
몇 차원 높음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작품을 주로 지적 유희물로 읽은 것 같다
한스가 받는 교양수업을 곁에서 함께 청강하는
체험형 독서였다고도 하겠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교양수업 클래스 중에서 나는
병과 건강, 죽음이라는 테마에 가장 관심이 갔는데
누구의 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었다
-병은 인간을 더욱 육체적으로, 그것도 완전히 육체로 만든다
-병이란 우둔함과 양립하기에 고상한 것도 극히 존경할 만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병은 굴욕을 의미합니다 인간이라는 이념을 훼손하는 고통스러운 굴욕
-이곳 공기는 강렬한 특성이 있습니다 온몸의 신진대사를 촉진하지만, 몸에 단백질이 붙게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질병을 고치는 힘도 지니고 있지만, 처음에는 일단 그 병을 강하게 촉진하고, 또 전반적으로 유기체를 자극하고 앙양하여 말하자면 병을 화려하게 폭발시킨다는 것입니다

기념엽서가 될 만한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한스 카스토르프가 쇼샤 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을 택하겠다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비유된 사육제의 밤
인간 신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신문물이자
의학적 발명인 뢴트겐 사진을 모티프로 펼치는
이 해부학적 사랑의 고백은 변태적인 낭만성으로 가득하다
광란의 사육제라는 타이밍은
평상시 맨정신으론 시도할 수 없었을 고백이라는 것이며
프랑스어로 발화되는 고백이란 점은
정상적인 독일적 자아로는 감히 쏟아낼 수 없을
격정이었다는 의미겠다 나는 여기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기나긴 대사들과 무한선율이 떠올랐다
훗날 프리스턴 대학에서 만이 강의한 <마의 산> 강연록
(토마스 만, 문학과 예술의 지평, 세창미디어)을 보면
만은 자신을 음악적인 유형의 작가로 분류하면서
이 작품의 창작이 작곡의 원리와 유사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과연 <마의 산>은 한 편의 장엄한 교향시 같기도 하고
또 만이 그토록 좋아했던 바그너의 작품들을 언뜻언뜻 연상케 한다
몇몇 낭만적이면서 비극적인 모티프들, 과장된 웅변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떠올리게 하며 한스 카스토르프의
연금술적 밀봉교육에 의한 (성장이라기보다) 상승은
성배를 찾으러 가는 순진한 바보 파르지팔의 일대기를 연상케 하며
작품 전체는 수많은 라이트모티프의 직조로 이루어진
신들의 황혼 스타일로도 보였다

고전의 가치 중 하나는 세계에 대한,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에 대한
더 높은 조망, 더 넓은 시야를 갖게 해준다는 점일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만의 '시간'에 대한 강의는 대체로 복잡하고 깐깐한,
그래서 알 듯 말 듯한 철학적 내용들이었는데
소설의 템포를 조절하는 음악적 기능을 한다고 느꼈다
한 문장을 골랐다
-영원한 것 속에 앞뒤가, 무한한 것 속에 좌우가 있을 수 있을까
계절과 날씨와 풍경의 묘사들은 또 어떤가
중심서사에서 비껴난 대수롭지 않은 문장들이
어찌 이리 아름답고 서정적인지..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같은 묘사들의 풍부한 분량이었다
덕분에 요양원의 이상 열기에 침식되어 가는 두개골과 폐 속으로
신선한 공기가 즉각 투입되어 활력이 돌고
나도 모를 병소가 치유되는 것만 같았다
무수히 밑줄을 그었지만 다 인용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
예컨대 이런 것이다
-하지는 한 해의 정오이자 절정이며 이때부터 내리막길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청동색 가문비나무
-이 지역의 위대한 계절인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식당의 중심화제였다
독후감을 마무리하는 와중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인간사 소우주인 요양원이 들어앉은 알프스 고산지대 이미지
그곳의 자연을 내가 마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뤼겐의 백악절벽이라든가 안개 위의 방랑자 같은 앵글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영화로 만든다면 최종 컷은
카메라를 조금만 더 아래로 대지에 가까이 가져가
한스가 그 어디메 골짜기에서 발견한 자기만의 명상 장소,
이름하여 ‘술래잡기’를 하던 장소로 하련다
해빙기가 되면 그곳에 피어난다는,
톱풀꽃 방울꽃 끈끈이패랭이꽃 삼색제비꽃 데이지 앵초 솔다넬라
이런 들꽃들이 무심히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면 좋겠다

끝으로
요양원에 들여온 ‘최신 독일 정신’의 상징
‘폴리힘니아’ 축음기를 통해 듣는
한스 카스토르프의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했다
토마스 만은 훗날 그의 또다른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베피소 32번 아리에타 악장의 아름다움에 대해
그토록 열변을 토한 것처럼 여기서도 한스의 마음을 빌어
아래 음악들에 대해 세심하고 다정한 분석을 펼친다
이 가운데 보리수는 이 소설 피날레에서 한스가 뛰어든
총탄과 화염이 빗발치는 전쟁터의 배경음악으로 선택되었다

베르디의 아이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비제의 카르멘(꽃노래)
구노의 파우스트(발렌틴의 기도)
슈베르트의 가곡 보리수







295    9월 그림 계속  김주향   2023/09/22  11
294    9월 그림  김주향   2023/09/14  21
293    하루키 신간의 가을  김주향   2023/09/14  20
292    이삿짐을 풀며  김주향   2023/08/20  30
291    8월의 그림들  김주향   2023/08/10  22
290    여름꽃 그리기  김주향   2023/07/27  26
289    카라바조  김주향   2023/07/22  21
288    7월 그림  김주향   2023/07/15  32
287    물감 수채화 준비  김주향   2023/07/07  28
286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고  김주향   2023/07/01  25
285    풍월당 식물들  김주향   2023/06/25  25
284    6월 꽃그림  김주향   2023/06/18  30
283    꽃의 위로  김주향   2023/06/18  26
282    라벤나의 모자이크  김주향   2023/06/18  21
281    초여름 그림  김주향   2023/06/09  22

1 [2][3][4][5][6][7][8][9][10]..[20] [NEXT]

   
Copyright 1999-2023 Zeroboard / skin by Suncomso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