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음악
- 음악 취향의 압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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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주향
제 목    브람스,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2007.1.17)

브람스,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2007.1.17


2007년 1월 9일(화) 저녁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의 <브람스 스페셜 - 관현악 시리즈 I> 소감이다.


먼저, 이날 공연에서 서울시향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레오니다스 카바코스라는 연주자가 나는 인상적이었다.
잘 생기기도 했지만(연주는 내가 잘 모른다, 잘 했겠지 뭐),
또 소위 유망주라 불리는 젊은이가 아니고 나이가 좀 든 사람이어서 그랬겠지만..
보통 세계적이라고들 하는 피아노나 바이올린 영재 및 스타들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마마보이 마마걸 이미지(어휴, 저 공주들, 왕자들)와 동떨어진
매우 자주적으로 보이는 섹시가이였기 때문이다.
천식이 있는지 연주도중 다소 호흡이 힘들어 보이는,
무뚝뚝하고 시니컬한 인상의 미남이었는데 그 무뚝뚝함이 혹시
연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카바코스는 연주 후반
정명훈씨의 지휘안무를 능가하는 매너로 무대를 장악했고
바이올린을 무슨 신주단지마냥 애지중지하는 게 아니라
공구상자에서 꺼낸 대패나 톱 다루듯이 가볍게 들었다 놓는 동작하며
연주와 연주 사이에 대담하게도 빤히 객석을 쳐다보는
무심하고 아름다운 눈으로, 특히 나같은 여성관객들을 매료시켰던 것 같다.
독주자를 바라보는 오케스트라 여성단원들의 눈에도 하아트가 반짝반짝~
카바코스는 앵콜곡으로 타레가의 기타곡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신통방통하게 연주하고 들어갔고, 쉬는 시간에 객석은 죄다
저 사람 어느 나라 사람이야, 하면서 책자를 훑어보기 바쁜 눈치였다.



이날 공연의 주 메뉴는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이 교향곡을 어려서부터 수차례 들었지만
정확하게 선율을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4악장뿐이다.
언제나 나는 부분적으로만 귀에 익은 1, 2, 3악장의
풍부한 악상들의 바다를 이리저리 헤엄치기는 한다,
오로지 애타게 4악장을 기다리면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정명훈씨의 서울시향은
나뿐 아니라 누구나에게 하일라이트일
이 4악장에 대한 기대는 적어도 충족시켜 주었다.
모든 긴장이 해소되고,
방황하던 관념들이 일제히 하나로 수렴되고 있는 듯한,
마치 오랜 단련을 거쳐 살아남은 정신의 앙상한 가지만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이 4악장의 선율은, 정말 위대하다.
이 부분을 들을 때면 나는 늘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라는 시구가 떠오르고
또.. 어떤 장면 하나가 떠오르는데..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때였다.
노량진이던가 상도동이던가 동작구쪽 어느 산꼭대기 선배 하숙집에서
당시로서는 꽤 불온한 사회과학도서들을 늘어놓고
서클 합숙이라는 걸 하던 어느 추운 겨울이었다.
그 궁상맞고 비좁은 하꼬방에 예닐곱 명이 구겨앉아
밤드리 토론하다 술마시다 잠든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누군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이 브람스 1번 4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일찍 일어나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또한 그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친구와 나는 반갑게, 그러나 절대 소리쳐 말해선 안 될
비밀을 공유하는 심정으로 조용히 함께 속삭였다, 브람스다, 하고.

이후 그 친구와 나는 이런 쪽의 대화를 더 나눠보지는 못했다.
이런 부르주아적인 취미생활 따위는 내놓고 할 수도 없고
또 아는 척도 할 수 없는 학내 분위기였으며 그럴 시간도 기회도 여유도 없었다.
이를테면 그로부터 두어 달 후 나는 가두시위에 나갔다가 붙들려
영등포 유치장에서 일주일 가량 구류를 살았던 것인데..
3월 29일에 잡혀들어갔다가 4월 7일에 나와 첫 등교를 한 날,
학생회관 라운지에서 서클 친구들, 선배들의 고생했네 어쩌네 하는 인사를 받던 중
그 친구가 다가오더니.. 잘못된 기억이 아니라면.. 나를 안아줬던 기억도 이제사 난다.
악수를 하거나 어깨를 툭툭 친 게 아니라 진짜, 진짜로 포옹을 해 준 것이다.
그 동작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또 당시 우리네 교우관계를 규정하던
원리인 동지적 애정을 그애답게 다정다감하게 표현한 것일 뿐이어서
남들도 나도 얼굴을 붉히지 않았다.
다만 세월이 지난 지금 생각할 때 그 장면은 살짝 감미롭다.

브람스 교향곡 1번 4악장의 위대한 선율을
매우 이상한 시공간적 상황에서 공유했던 경제학과 84였던 그 친구..
눈에 선하지만 지금 뭐하나 하는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체로 뻔하기 때문이다. 386세대라는 것만큼 세상에 뻔한 게 있던가?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드는 독서량하며 박학다식함에다
당시 일본쪽에서 건너온 막스주의 문건을 독해하느라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던 교양인 일어강독능력하며
선배들을 능가하던 토론실력하며.. 있는 집 자식같아 보이는
도련님풍의 외모만 빼면(?!) 모든 것이 완전하여 주변사람들을 좌절케 했던 그 친구.
그 친구는 이때껏 내가 만나본 중 제일 똑똑한 남자 베스트 3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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