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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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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2005년 9월 <신들의 황혼> 공연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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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황혼> 후기
- 2005.10.5 작성
우리가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간다는 것은
일단 작품을 즐기러 가는 것이지만
해당 작품과 내가 만났을 때 무엇이 발생하는가를
알아보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연작 중 하나인
<신들의 황혼>을 보러 간다고 했을 때
<로엔그린>이나 <탄호이저>가 아니라
반드시 <니벨룽의 반지>여야 했던 것은 아니다.
<라인의 황금>이나 <발퀴레>나 <지크프리트>가 아닌
<신들의 황혼>이어야 할 이유는 아주 조금 있었지만
이것마저도 임의적이었다고 하는 편이 옳다.
즐기러 간다지만.. 나는 바그너 음악을 즐겨 온 사람이 아니고
즐기는 법조차 모른다. 그러니 이번 바그너 악극 감상은 범박하게
바그너 음악과 내가 만났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보러 간 것이라 할 수 있겠고.. 이 경우
역사적인 접점을 향해 달려오는 기억들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바그너 음악과 관련한 내 첫 기억은
중학교때 학교에서 단체 관람한 오페라 <탄호이저>이다.
시험이 끝나고서 오페라라는 것을 구경 간 것은
딱 두 번이었는데 <카르멘>과 <탄호이저>였다.
둘 다 끔찍하게 지루했고 <카르멘>보다 <탄호이저>쪽이 더 끔찍했으니..
국내 출연진에 의해 연주되는 중세 기사담이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공연 중 꽤 비중있는 역을 맡은
땅딸막한 테너 가수가 무대에 설치된 계단을 노래하며 뛰어내려오다
미끄러져 방아를 찧었던 가련한 순간만 기억난다.
그리고는 예의 저 중학교때 음악감상노트를 기록하고자
열중했던, KBS 희망음악 프로그램으로 접한 바그너 곡들이다.
클래식 음악을 이렇게 들었던 자의 공통점은
싱글커트된 인기곡만을 기억하고 산다는 점이다.
<로엔그린> 중에서 3막의 전주곡과 혼례의 합창,
<탄호이저> 중에서 순례자의 합창,
<니벨룽의 반지>의 <발퀴레> 중 발퀴레의 기행.. 이런 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얕볼 수만은 없다. 저런 인기곡들과 더불어
방송에선 간혹 <방랑하는 화란인>이니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트리스탄과 이졸데><파르지팔> 같은 작품이 언급되곤 했는데
이같은 기호들이 불러일으킨 심상은 바그너에 대한 미지의 기대와 매혹의
충분한 근원이 되어주었을 법하다.
바그너에 관한 또다른 기억이라면 몇 번 언급했던,
고교때 극장 관람한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와 관련된다.
거기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와 함께 쓰인 <지그프리트의 장송 행진곡>.
영상과 결합된 이 음악의 무시무시한 압도감은
바그너와 관련된 결정적인 체험이 아니었던가 싶다.
다음 기억은 대학교 1학년때이던 84년도이다.
서울대 1학년 인문쪽 교양선택 과목에 <음악의 이해>라는 것이
아직도 있나 모르겠다. 전쟁터나 다름없던 관악캠퍼스 안에서
전쟁을 잊게 만들어 주던 공간으로 나는 저 <음악의 이해>라는
반시대적 수업 현장과 학생회관 1층 음악감상실과
고전음악을 틀어주던 도서관 2열람실이던가 3열람실 들을 기억한다.
도서관 앞 광장 아크로폴리스에서 최루탄이 터지면
학생회관내 음악감상실로 피해들어와 처박혀있곤 했다.
<음악의 이해> 담당교수는 음대 김춘미 교수였다.
대형강의실에서 법대 인문대 사범대생 몇백 명을 모아놓고
진행하던 그녀의 강의보다 그녀의 각선미가 더 훌륭했던 기억이 난다.
그 과목의 중간고사는 음악사의 주요 계기가 된 작품들을
맛보기로 모아놓은 두서너 개의 컴필레이션 테입을 열심히 듣고 와서
감상 시험에 임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 곡목들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것이
소위 라이트모티프라는 것과 관련된 바그너의 저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주곡이었다. 불길한 조성의 곡예를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다 안착하는 그 전주곡의 신비하고 낭만적인 선율을 들으며
나는 장 마레가 나온다는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언젠가 볼 수 있길 꿈꾸었다.
바그너에 관해 특기할 만한 최후의 기억은 지금부터 7,8년전쯤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주빈 메타(인가 쿠르트 마주르인가)가 이끄는 비엔나필 내한공연이 있었다.
그날의 하일라이트는 장영주와 비엔나필이 협연하는 무슨 바이올린 협주곡이었지만
프로그램에는 지그프리트의 장송 행진곡도 들어있었다.
장영주가 들어가고.. 이윽고 바그너 음악이 연주되려던 순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꽉 찬 무대에 오케스트라 한 부대가 더 들어서고 있었다.
금관과 타악기 연주자들로 순식간에 두배수 가량 충원된 대극장 무대는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는, 거대하게 팽창된 오케스트라 스펙터클이었고
그렇게 그들은 지그프리트의 장송 행진곡을 연주했다.
압도되어 바닥에 그냥 뻗어버리고 싶었다.
귀를 믿을 수 없었고 눈도 믿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엑스칼리버]에 깔렸던 그 음악이
왜 그리 크고 무서웠는지 결정적인 이유를 알게 되었다.
2005년 9월.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이끄는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오케스트라의 <니벨룽의 반지>.
연작 가운데 <신들의 황혼>이어야만 했던 이유는
그러니까 저 지그프리트의 장송 행진곡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강렬한 농축원액이 어떠한 맥락들로 풀려나가
희석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고 해두자.
악극은 우선.. 책자로 줄거리를 읽을 때 거슬렸던 조잡한 내용들이
대사화되어 있어 견딜 만했다. 문자로 압축되어 있던 산문들이
적어도 공연중엔 시가 되어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 시들을 실어나르는 것은, 캐릭터들의 갈등과 고밀도로 엮여나가는
무거운 불협화음들이었고.. 거기서 내파되고 있는 히스테리와 음울한 격정..
이런 것들이야말로 나는 바그너 음악의 에센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내가 가슴이 아닌 뇌로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율들은 가슴을 파고든다기보다 뇌의 주름을 침투한다.
실로 믿기지 않는 스태미너로 무장한 그 성악들은 어떠했는가.
그것은 다음 시구를 연상케 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이들은 하루 다섯 끼를 먹어줘야 할 뿐 아니라 보약 몇 첩 지어먹고
무대에 서야 마땅한 새로운 종족으로 보였고.. 과연 <신들의 황혼> 대장정에서
최후까지 음성을, 체력을 콘트롤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하겐(로버트 듀발이 연기한 [대부]의 톰 하겐은 이 캐릭터와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것 같지만 늘 서로를 연상시킨다)과
여전사 브륀힐데를 연기한 가수였다.
한편 성악이 날것의 히스테리였다면 기악은 끊임없이
어떤 대결의 구조를 생성해 내는 용광로였다.
그것은 감상자의 긴장의 고삐를 움켜쥔 주체로서
이 기악의 연주에서 비로소 비로소 뇌를 떠나 머리를 떠나
가슴 그 어느 언저리로 육박해 오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기관이 심장이 아니라 허파라 믿고 싶다.
마침내 폭발하는 장송 행진곡.
스케일의 한계를 막 넘어서고 있는 장대한 압박.
참으로 오케스트라가 온힘을 다해 정상에 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고
무대보다도 차라리 움푹 들어간 오케스트라석의 최종 피치를
목격하는 것이야말로 <신들의 황혼>의 최대 장관이었다.
이윽고 찾아온 대단원에선..
모든 대결이 해소되고 그 대결의 구조도 붕괴되고
어디선가 한 줄기 낭만이, 순결한 이념의 선율이 아침햇살처럼 쏟아진다.
저 덧없이 사라져갈 햇살같은 낭만을 맛보기 위해 여지껏 숨차게 뛰어왔구나..
파시즘에 저항하며 청년기를 보낸 세대의 내부에 파시즘이 존재한다는 것은 정설.
원하든 원하지않든 바그너는.. 내 안의 파쇼에 장엄하게 응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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