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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름 |
김주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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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1996년 빈 필 공연 후기_[엑스칼리버]와 [지옥의 묵시록]의 바그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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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와 [지옥의 묵시록]의 바그너
-1996.10.14 작성, 하이텔 영화동호회 시네마천국에 올린 글
어제 빈 필 공연에 갔었습니다. 장영주와의 협연이 준비된 익숙한
레퍼토리의 1부에 기대를 걸고, 바그너 음악만으로 이루어진 2부에
대해선 잘 모르니까 학습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갔더랬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1부보다 2부에서 더 큰 감명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부분에 대하여 한 마디 할까 합니다. 물론 영화와
관계된 얘깁니다.
2부에서 연주된 작품은 바그너의 악극 '니벨룽겐의 반지' 마지막 파
트인 '신들의 황혼'에서 발췌된 곡들이었습니다. 이 '니벨룽겐의 반지'
라는 악극은 우리네 판소리 한 마당 정도 되는가 봅니다. 며칠에 걸
쳐 축제처럼 장시간 연주되는 대규모 편성의 음악이라고 하죠. 악극
의 줄거리는 읽어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체의 극
히 일부만을 단편적으로 들어오면서 그저 바그너 음악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 품어 왔던 것 같습니다. 이제 비로소 이 거대한 산맥을 향해
등정을 시작해야겠다는 의지가 불끈불끈 샘솟는군요.
제가 얘기하려는 곡은 연주된 세 곡 가운데 두번 째 곡 '지그프리
드의 장송 행진곡'과, 나중에 앵콜곡으로 따로 연주된 '발퀴레의 기행'
입니다.
지그프리드의 장송 행진곡.
바로 존 부어맨 감독의 [엑스칼리버]에 나왔던 음악입니다. 그 동안
이 곡이 이 영화에 나왔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칼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만이 이 영화에 대한 기억에 결합돼 있었
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뭔가 불길한 예고편과도 같은 타악의 두드림과 낮
고 무거운 현의 웅얼거림에서 시작하여 곧 웅대한 관현악의 폭발로
이어지는 이 곡의 도입부를 듣는 순간, [엑스칼리버]란 영화를 지배하
고 있었던 사운드의 핵심이 바로 이거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기억
해 냈습니다. 이 곡이야말로 [엑스칼리버]를 떠올릴 때마다 꼭 붙어
따라오던 이미지들, 그러니까 어둡고 무시무시하고 신비에 싸여 있는
서양 중세의 전설 분위기, 예언과 마법, 전쟁과 음모, 배반과 복수, 질
투와 애욕 따위가 뒤섞이며 질풍노도같이 몰아치는 서사시적인 분위
기를 명쾌하게 요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음악과 함께 나이젤 테리의 어진 모습, 표독스러운 헬렌 미렌, 마법
사 멀린 역의 니콜 윌리엄슨이 기억났습니다. 그러나 랜슬롯과 기네
비아의 얼굴은 전혀...깜깜...
발퀴레의 기행.
빈 필하모닉은 놀라운 스케일로 연주를 마쳤습니다. 곡이 끝났는지
몰라 애매한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너나할 것 없는 감동이 보이지 않
게 전해져 우뢰가 되어갔고 드디어 앵콜곡으로 '발퀴레의 기행'을 끌
어내기에 이릅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마다 [지옥의 묵시록]의 폭격 장면과 로버트 듀
발의 광기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날
개 달린 말을 타고 전사자의 영혼을 발할라 성으로 나른다는 발퀴레
들의 그로테스크한 비행 이미지에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은 헬기들의
이미지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초현실적으로 겹쳐 떠오르는데 이런
증상 저만 그런 건 아닐 걸요. 이 곡이 끝나자마자 클라이막스에 도
달한 한 청중의 외마디 탄성이 터져 나오고 엄청난 갈채가 이어졌습
니다.
오늘 집에 와서 옛날, 제가 고등학교 다닐 적에 [엑스칼리버]를 본
직후 명동에서 산 수입 레코드 한 장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골동
품이 되다시피 한 음반입니다. 안 들은 지 10년은 된 것 같습니다.
제목은 Classics from Excalibur and other great films.
[엑스칼리버]에 삽입된 곡으로 네 곡이 소개되고 있네요.
1.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중 지그프리드의 장송 행진곡
2.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1막의 전주곡
3. 바그너의 파르지팔 중 1막의 전주곡
4.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 도입부
그리고 음반의 끝에 '발퀴레의 기행'이 실려 있습니다.
1번은 아서와 그의 아버지 우서왕의 테마로, 2번은 랜슬롯과 기네
비아의 로맨틱한 만남에, 3번은 퍼시벌의 성배 찾기에 동반되는 곡이
라고 설명되어 있네요. 그리고 4번은 전쟁터로 진군할 때 사용된 곡
인데 아주 귀에 익은 곡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도어스]에서 발 킬머
가 벌거벗고 섹스를 하고 자해를 하고 피를 마시며 난장판을 벌이는
장면에도 이 곡이 나왔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음악은 트레버 존스였습니다. 이 사람이 구체적으로 무
슨무슨 영화의 음악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 이름이 나온 영화
마다 음악들은 다 괜찮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바그너 곡들은 모두 아
드리안 볼트 경 지휘의 런던 필 연주이고 오르프 것은 앙드레 프레빈
지휘의 런던 심포니와 코러스 연주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엑스칼리버]와 [지옥의 묵시록]이 바그너의 대곡
들을 사용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다른 선택은 애초부터 있을
수 없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다른 음악으로 대체된 그 영화, 그 장
면들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영화나 바그너 음악 모두에
서 어떤 파시즘적인 광기 같은 것을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네요.
공연을 감상하면서 될 수 있으면 저는 영화를 연상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자유로운 감상과 해석의 여지를 즐기고 싶어서요. 근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영화가 너무 간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그런 사실이 꼭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바그너 음악으
로 촉발된 영화에 대한 기억이 역으로 산맥과도 같던, 대양과도 같던
바그너의 음악 세계로 친숙하게 이끄는 기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우리의 영원한 테마인 영화로
수렴시켜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가끔은 영화가, 영화음악이 더
넓고 더 깊은 음악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 풍부하고 다
양한 음악의 세계를 학습시킨다는 것.
영화는 음악을 도구로 이용하지만 그 음악들은 몰래몰래 자기의 영
토를 확장해 갑니다. 그러다가 은밀히 우리의 손을 잡고 독자적인 자
기의 대륙을 향해 먼 여행을 떠나도록 유혹하는 것입니다.
[커미트먼트]나 [블루스 브라더스]가 아니었으면 제가 소울의 매력
을 어찌 알았겠으며 [아마데우스]가 아니었으면 모짜르트의 어두운
곡들을 찾아서 들어보기나 했겠습니까. [도어스]란 영화가 아니었으면
도어스와 짐 모리슨에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퐁
네프의 연인]의 시작 부분에 매혹됨 없이 코다이라는 작곡가의 이름
과 그의 첼로곡을 들어보기나 했겠습니까. [바이올린 플레이어]가 아
니었으면 일찍이 바하의 샤콘느가 존재의 바닥을 응시하는 한없는 슬
픔을 간직한 곡임을 무슨 수로 알았겠습니까. [씨클로]에 나온 노래가
좋아 라디오헤드란 밴드의 음악을 찾아 듣다가 'the bends'라는 멋진
앨범을 발견하게 된 이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고정된 취향으로 감정을 가두는 행위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
인가요. 오직 여행과 모험만이 앞에 펼쳐져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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