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 오르간은 ‘악기 중의 악기’ 별명이 무색하지 않다. 오르간은 산업혁명 이전 서양 최고의 테크놀로지였고, 그 안에서 수학.물리.측량술.제련술.기계공학.건축이 융합되었다. 그리고 바흐는 오르간 비르투오소를 넘어, 이 복잡한 악기 구조와 음향에 완전히 통달했던 오르간 감정가이자 컨설턴트였다.
오르간은 일반 악기와 달리, 은유적으로도 특별한 존재였다. 건반은 흔히 이빨로 비유되었으며, 파이프는 목구멍에 비견되었다. 한마디로 오르간은 교회 자체가 몸통인 거대하고 불가해한 유기체였다. 바흐는 오르간을 시험하며 이 녀석이 얼마나 ‘훌륭한 폐’를 가졌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농을 던지곤 했다. 이는 바흐가 오르간이 지닌 유기성을 섬세하게 감지했으며, 일종의 의인화된 생명체같이 인식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오르간의 장엄한 규모, 길고 짧은 파이프들, 여러 스톱-음전으로 다채롭게 혼합 가능한 음색은 신의 무한성을 상기시켰다. 오르가니스트 야코프 아들롱은 40여 개의 오르간 스톱으로 1,201,911,627,775개 음색 조합이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1조가 넘는 현기증 나는 수치의 정확성은 중요하지 않다. 숫자가 표상하는 것은 차라리 영원함과 무궁함이며 그렇기에 신성에 가깝다. 17세기 예수회원이자 박식가 키르허 역시 신의 천지창조를 오르간 연주에 비유했다. 아니 이런 은유조차 필요 없었다. 문맹의 촌부도 교양 있는 귀족도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꼈으리라. 우레 같은 오르간 소리는 곧 신의 목소리 자체라고.
이하 책에 나온 것을 구글에서 찾아본
오르간 이미지 두 개
미하엘 프레토리우스, <음악대전Syntagma Musicum> 중 오르간, 1620
아타나시우스 키르허, <보편음악론Musurgia Universalis> 중, 1650
오르간 연주와 비견된 천지창조
우주의 창조가 거대한 음악적 하모니처럼 이루어졌다는 것을
오르간 형상으로 표현한 도판
저자는 이런 오르간이야말로
명실공히 바흐의 대표 악기였으며
오르가니스트는 바흐의 여러 얼굴 중
가장 강력한 페르소나이자 으뜸가는 정체성이라고 하며
바흐의 음악적 특질로 간주되는 몇몇 키워드가
오르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논하는데
재미있게 읽은 키워드1,2,3을 옮겨 본다
키워드1: 확장과 통합
바흐의 두 유명한 일화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영광의 순간이다. 1720년 바흐는 함부르크의 노대가 라인켄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한다. 그는 <바빌론 강가에서> 코랄 주제로 30분 가까이 즉흥연주를 한다. 라인켄 역시 이 주제로 장대한 코랄 판타지아를 작곡했고, 바흐는 자신의 젊은 시절 우상 라인켄에게 오마주를 바친 셈이다.
두 번째는 징계의 순간이다. 바흐가 아른슈타트 노이에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할 시기다. 교회 측은 바흐가 코랄을 너무 특이하게 변주하고 이상한 선율을 자주 삽입해 회중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불평했다. 바흐의 연주 역시 지나치게 길어서 사람들의 불만을 자아냈다.
두 사건은 상반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서로 관련 없이 느껴진다. 그러나 둘은 의외의 공통된 정보를 지시한다. 코랄 선율 하나를 무려 30분간 풀어내는 즉흥연주 기술, 과감한 변주나 전조, 음정 변화를 통해 코랄이나 주제를 무한대로 확장하는 바흐의 능력 말이다.
데이비드 이어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코랄은 오르간 연주 예술의 본질, 기교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분명 코랄을 위시한 정선율을 변주하고 확대해 일관성 있게 종합하는 기술은 오르가니스트들에게서 특화되었다. 바흐가 공부하고 연구했던 프레스코발디, 프로베르거, 케를, 파헬벨, 피셔, 북스테후데, 라인켄, 브룬스 같은 작곡가들은 대부분 오르가니스트들이었고, 이 예술의 최고 전문가들이었다.
바흐는 특히 라인켄, 북스테후데 같은 북독일 음악가들과 파헬벨로부터 대규모 코랄 판타지아나 프렐류드 모델을 수용한다. 사실상 바흐 스승이었던 게오르크 뵘은 코랄 파르티타와 코랄 프렐류드의 거장이기도 했다. 바흐는 이런 대가들을 통해 코랄이나 동기를 풀어내고 발전시키는 방법을 깨우쳤다. 즉 바흐에게 있어서 ‘확장’ 원리는 상당량 위대한 오르가니스트들에게서 연유했으며, 그는 이런 기예를 더할 나위 없는 경지로 발전시켰다.
바흐의 이런 특성이 비단 오르간으로만 한정될까? 이것은 바흐가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던 시기뿐 아니라, 그의 일생 전반을 지배하는 요소다. 이는 바흐 생애 마지막 10년간 탐구된 작품에서 심원한 아름다움으로 드러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아리아는 만화경같이 다채로운 30개 변주로 펼쳐지고, 종국에는 다시 아리아로 회귀하며 통합된다. 코랄 변주곡 <높은 하늘에서 나는 왔도다>는 코랄을 타래로 음악에 깃든 비밀을 풀어낸다. ‘왕의 주제’로 펼쳐지는 <음악의 헌정>, 미완이지만 고도의 완결성을 함축한 <푸가의 기법>은 아마도 이런 여정의 마침표이자 정점이 아닐까.
일련의 곡들은 주제나 모티프를 실마리로 펼쳐지고 종합되는 ‘확장’과 ‘통합’ 원리를 나타낸다. 이런 특질이 오르가니스트 바흐와 분리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듯 보인다.
키워드2: 대위와 화성
"만약 다성음악 최고 정점에 도달한 작곡가가 있다면 그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바흐일 것이다. 만약 화성의 숨은 비밀과 뛰어난 예술적 기술을 완벽하게 조화시킨 사람을 찾으라면 그사람도 분명히 우리의 바흐다."
-바흐 추도문에서
추도문이 바흐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첫 부분이다. 여기서 바흐의 다성음악과 화성적 기술은 열렬히 찬양된다. 그리고 인용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저 특성이 오르간과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오르간은 다른 악기와 별개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호흡 또는 보잉에 따라 소리가 지속되는 여타 악기와 달리, 오르간은 소리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 이런 성격은 음을 수직적으로 쌓아 올리거나(화성) 선율들의 수평적 흐름(대위)을 드러내기에 유리했다. 또한 두 손과 두 발로 다수 건반과 페달을 동시에 누를 수 있는 특성은 다성음악과 화성에 최적화된 요소였다. 이런 오르간의 성격을 마테존은 이렇게 정의한다.
"오르간은 작은 믹스처 파이프들로부터 거대한 페달 파이프까지 ‘비교할 수 없는’ 힘과 다양한 음역을 통해 그 동력을 끌어낸다. 그리하여 양손과 양발을 통해, 오르가니스트는 가장 충만한 화성과 가장 풍부한 대위적 텍스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테존, <완전한 카펠마이스터> 중
바흐의 독창성으로 최우선으로 지목된 다성음악과 화성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능력. 이는 마테존이 언급한 오르간의 강점과 거의 일치한다. 사실 그랬다. 바흐는 전무후무한 다성음악, 대위 마스터이자 화성 예술의 지배자였다. 그리고 바흐에게서 대위와 화성이 분리될 수 있을까? 바흐에게 있어 두 요소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직물 같은 것이다. 이는 다분히 오르간적 속성을 내포하며, 바흐 고유성으로 여러 곡에서 그 면모를 드러낸다.
예를 들면 바흐 샤콘느로 통하는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BWV1004 차코나를 떠올려보자. 이 곡은 첫머리부터 쿼드러플 스톱, 트리플 스톱(4/3개 현을 통시에 긋는 주법)이 난무해서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니컬러스 캐년은 바흐의 이런 쿼드러플 스톱을 ‘영광스러운 오르간 같은 화성’이라고 말한다. 바흐는 오르간의 장려한 화음을 바이올린 4현에 이식한 셈이다. 옛 바이올린은 모던 바이올린보다 평평한 브리지에, 기민한 짧은 활로 화음을 아르페지오 처리하지 않고 거의 동시에 그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현악 독주곡에 이런 복잡한 화음을 지속적으로 사용한 것은 예외적이다. 비버 파사칼리아, 이 곡에 강력한 영감을 주었으며 직간접적 모델이 된 베스토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여섯 모음곡>, 동시대 텔레만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판타지아>를 살펴봐도 이렇게 화성/대위적 요소가 조밀하게 맞물린 경우는 드물다.
여기서 바이올린은 오르간을 모방한다. 화성은 오르간의 지속음처럼 머무르며 오스티나토 선율을 떠받치거나 대위적 뼈대를 구성한다. 그리고 캐년의 언급대로, 이런 특질이 오르간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바흐에게 대위와 화성은 자주 오르간적 성향과 함께 나타난다. 작곡가 바흐는 종종 오르가니스트 바흐처럼 사고한다.
키워드3: 역동성과 모빌리티
이어슬리가 바흐와 오르간 페달의 관계를 보는 시점은 독특하다. 그는 바흐 어린 시절이 ‘걷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고아가 된 열 살 바흐는 큰형에게 몸을 의탁하기 위해 아이제나흐로부터 오르도르프까지 40킬로를 걸었다. 1700년에는 성 미카엘 학교 입학을 위해 북독일 뤼네부르크까지 300킬로를 걷는다.
뤼네부르크에서 게오르크 뵘과 공부하던 바흐는 라인켄의 연주를 듣기 위해 80킬로 거리 함부르크를 여러 번 걸어서 방문했을 것이다. 북스테후데를 만나기 위한 뤼베크 여행에서는 왕복 8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도보로 이동한다. 즉 바흐는 ‘걷기’를 통해 북독일 오르간 유산과 화려한 페달링 전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에게 걷기란 단순한 소요가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정이었다. 이런 경험은 종종 바흐의 역동적인 페달링으로 나타나고, 다른 작품에서는 곡 전반에 힘과 활력을 부여하는 베이스 라인으로도 나타난다.
이렇듯 바흐 페달링은 단순히 저음부를 추가하는 것과 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는 실제 걷기와 마찬가지로 완발과 오른발을 움직여 선율을 자아내는 것이었고, 곧 역동성과 모빌리티와 연결되었다. 그것은 깨달음을 위한 긴 도보 여행으로, 오르가니스트의 발을 통해 몸소 느끼고 체득한 것이었으며, 이는 은유적, 종교적 의미를 함축한 베이스 파트로도 자주 연계된다.
[이 부분 주석: 혹자는 바흐 아른슈타트-뤼베크 여행을 독일의 전통적인 유랑 수련Wanderschaft 관점에서 보기도 한다. Wanderschaft는 중세 길드 시스템에서 기원했으며, 길드 수련생이 장인으로 승급한 후 기술 발전을 위해 일정 기간 걸어서 여행을 다니며 여러 곳에서 일하고 배우는 과정을 이른다. 이 ‘유랑 수련’의 특징은 ‘도보 여행’이 원칙으로, 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함이었다. 800킬로가 넘는 거리를 도보로 이동했던 젊은 바흐의 뤼베크 여행을 Wanderschaft 관점에서 보는 시각은, 바흐가 북스테후데의 오르간 연주와 저녁음악회Abendmusiken를 통해 오르가니스트와 음악가로서 정진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일례로 아스페런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BWV869 프렐류드에 대해 놀라운 해석을 들려준다. 아스페런에게 이 곡 왼손 파트는 코렐리를 연상케 하는 워킹 베이스walking bass다. 여기에 깊숙한 뜻이 더해진다. 오른손 선율이 <마태 수난곡>의 듀엣 ‘이렇게 나의 예수님이 붙들리셨도다’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스페런에게 이는 단순한 건반곡이 아니다. 여기서 왼손이 묘사하는 베이스 선율은 수난을 향해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걸음이다. 바흐의 베이스 라인은 종종 역동성과 그에 상응하는 상징성을 함축한다. 바흐에게 있어 걷기란 곧 오르간 페달을 내딛는 것이었다. 이는 유동적인 힘과 의미를 지닌 베이스 선율로, 나아가 작품을 이끄는 동인과 추진력으로도 드러난다.
바흐가 페달 솔로 파트가 강조된 오르간 곡을 유난히 많이 작곡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바흐의 가장 초기 작품 중 하나로 지목되는 <프렐류드와 푸가 C장조>BWV531 오프닝 페달 솔로는 청년 바흐의 혈기와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토카타와 푸가 F장조>BWV540는 페달 포인트로 강조되는 오프닝 후, 1차 페달 솔로가 26마디, 2차 페달 솔로 역시 32마디에 걸쳐서 장려하게 펼쳐진다.
<페달 연습>BWV598은 페달만을 위한 연습곡으로 바흐가 아닌 에마누엘 바흐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좋은 오르가니스트의 필수 조건으로 능숙한 오르간 페달링을 꼽았을 법한 바흐의 신조가 깃든 사례임은 분명하다. <페달 연습>을 통해, 동시대인이 바흐가 발에 날개가 달린 것 같이 오르간 페달 위를 날아다녔고, 다른 이가 손으로 치는 것보다 바흐가 발로 치는 연주가 더 뛰어났다고 했던 진술을 실감할 수도 있다. 이런 기술은 북스테후데나 게오르크 뵘, 브룬스 같은 음악 선배에게서 기원한 것이지만, 바흐의 페달링은 이들 대비 훨씬 고도화되어 있고 역동적이어서 유례를 찾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