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음악
- 음악 취향의 압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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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토마스 만의 음악 선생님





<파우스트 박사>를 읽다가
토마스 만의 문학 및 예술론을
작가 자신의 말로 접하고 싶어,
특히 바그너에 대한 그의 견해는 어땠는지 궁금해 찾아낸
<문학과 예술의 지평>


이 책은 토마스 만 생전의
강연록 및 에세이 들을 가려 뽑은 선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아도르노와 음악소설 <파우스트 박사>’라는 글을 통해
옳거니.. 피아니스트 손열음씨가 언급했다는
토마스 만의 음악 선생님이 다름 아닌
테오도르 아도르노였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음악을 소설에서 다루기 위해서는 외부 조언자의 도움, 전문가적인 동시에 내 문학의 의도를 잘 알아서 함께 착상을 나눌 수 있는 선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조력자, 상담자, 이 일에 협력할 선생을 나는 발견하였다.-전문성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그의 능력이나 그의 정신적 신분을 보더라도 그는 참으로 적임자였다.’

음악소설로서 <파우스트 박사>의 백미는
제8장에서 다루고 있는,
아드리안 레버퀸의 스승인 벤델 크레추마어의
음악 강연 부분이 아닐 수 없는데 여기 서술된
크레추마어의 강연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왜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작품 111번에서 제3악장을 쓰지 않았는가?
베토벤과 푸가
음악과 시각(視覺)
음악의 기본요소(음악과 그 기본 요소 또는 음악적 기본 요소)

아아 이거 소설 전개 무시하고 시리즈로 가도 참 괜찮았을 텐데..
그래서 방대한 음악 평론집이 되어도 좋았을 텐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음악적 분석이 시도되는
이 부분이 바로..
당시 나치 독일을 피해 1943년 무렵 LA에 거주하던
만과 아도르노의 식탁에서의 친밀한 대화를 통해
다듬어지고 수정되고 확대된 부분인 것이다
소설 속 아드리안 레버퀸의 스승 벤델 크레추마어는 곧
토마스 만의 음악 선생님 아도르노였던 것

백미 중 백미는 역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작품번호 111 아리에타 악장 에피소드
이 곡의 특별한 아름다움과 음악사적 위대함,
이 곡이 주는 감동과 위안의 비밀에
이렇듯 어마어마한 집중력과 미친 디테일과
사랑으로 다가간 언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아도르노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열정적인 베토벤 비평
이 부분 필사를 해보았다
너무 길어 미련한가 싶었지만
25분 가량 되는 베토벤 최후의 이 피아노 소나타를
여러 연주자의 연주로 틀어놓고
특히 아리에타 악장을 반복해 들으며
음악과 문장을 비교해 가며 해볼 만한 일이었다
예술의 외, 외피는 마, 마침내, 내던져 버렸습니다
예, 예술은 언제나 예, 예술의 외피를 던져 버립니다
크레추마어의 열변이 귀에 쟁쟁하다





이하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제8장에서 발췌

그의 강연 주제는 무엇이었던가? 이를테면 그는 ‘왜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작품 111번에서 제3악장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꼬박 한 시간이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분명히 논할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주제가 복지 회관에 게시되거나 카이저스아셰른 <철도신문> 광고에 게재되었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대중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분명히 사람들은 왜 작품 111번이 두 악장만으로 이루어졌는지 알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강연에 참석해 설명을 들었던 우리는 비록 문제의 소나타를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더없이 흡족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로 그런 강연을 통해 우리는 그 작품을 알게 되었고, 그것도 아주 정확히 알게 되었다. 크레추마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소형 피아노로(그랜드 피아노의 사용은 허락되지 않았다.) 비록 잡음이 섞이긴 했지만 훌륭하게 그 곡을 들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곡을 들려주는 사이사이에 그 작품에 담긴 정신을, 그리고 다른 두 작품과 함께 그 작품을 작곡하던 당시의 상황을 아주 박진감 있게 분석해 설명했으며, 제1악장에 대응되는 제3악장을 왜 생략했는가에 대한 베토벤의 해명을 신랄한 위트로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베토벤은 조수가 그런 질문을 하자 시간이 없어서 아예 제2악장을 좀 길게 늘렸노라고 태연하게 답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없다니! 게다가 ‘태연하게’ 그런 말까지 했다니. 그런 식의 답변이 질문자에 대한 경멸을 담고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정당한 경멸이었다. 이제 연사는 1820년경 베토벤의 처지를 얘기해 주었다. 당시 베토벤의 청각은 걷잡을 수 없는 소모성 질환 때문에 이미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젠 자기 작품을 지휘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그 무렵 이 유명한 작곡가는 작곡을 전혀 할 수 없게 되었고, 창작력이 고갈되어 대작을 쓸 수 없어서 만년의 하이든처럼 스코틀랜드 풍의 가곡이나 쓰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연사는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된 이유는 베토벤의 이름이 붙은 유명한 작품이 이삼 년 전부터는 전혀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뫼틀링에서 여름을 보내고 빈으로 돌아온 늦가을에 베토벤은 단 한 번도 악보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단숨에 세 개의 피아노곡을 써냈고. 자신의 정신 상태가 멀쩡하다고 안심시키기 위해 후원자인 브룬스비크 백작에게 그런 사실을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크레추마어는 바로 그 소나타 다단조에 관해 말했는데, 사실 그 작품은 자체로 완결되고 정신적 균형이 갖춰진 작품이라 보기 어려우며, 당시의 비평가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풀기 어려운 하나의 미학적 수수께끼가 되었다고 했다. 크레추마어의 말에 따르면, 존경하는 음악가가 완숙기에 이르러 심포니와 피아노 소나타와 클래식 현악 사중주를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렸지만, 그의 친구들과 숭배자들은 그런 경지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시기의 작품들에서 사람들은 분해되고 소외되어 낯설고 무시무시한 것 속으로 고양되는 과정에 직면하여 이 극단적인 초월 현상 앞에서 우울한 심정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들은 베토벤이 과거에 추구했던 경향이 퇴화하고 지나친 심사숙고와 과도한 엄밀성 및 음악적 과학성이 나타난다고 보았던 것인데, 그런 요소들이 때로는 이 소나타의 제2부를 이루는 기괴한 변주곡에 포함된 아리에타 주제 같은 아주 단순한 소재에까지도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갖가지 리듬이 대비되면서 펼쳐지는 온갖 운명과 숱한 세계를 헤쳐 나가면서 제2악장의 주제가 점점 확대되어 마침내는 그 자체를 벗어나, 피안이나 추상 세계라 할 수도 있을 아득한 높이로 사라진다고 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토벤의 예술 세계 또한 실제 이상으로 확대되어,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인간의 눈앞에서, 그럭저럭 살 만한 전통적인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순전히 개인적인 영역 혹은 절대성 속에 고통스럽게 고립되어 있는, 청각의 사멸로 말미암아 감각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는 자아의 세계로 고양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인 세계에 홀로 존재하는 군주인 그에게 가장 호의적인 동시대인들조차 오직 낯선 전율밖에 느끼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그 소름 끼치는 고지(告知)를 그저 순간적으로만 그리고 예외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크레추마어는 거기까지는 괜찮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괜찮다는 말은 아니었고, 단서를 덧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음악의 다성적(多聲的) 객관성과 대립되는 무제한적 주관성과 급진적인 화음의 표현 욕구를 그저 개성의 문제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화음의 주관성과 다성적인 객관성은 명심해서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균형과 대립이 이 경우에는 후기의 걸작들과 달리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 베토벤은 만년보다는 중기에 훨씬 더 주관적이었지만, 그렇다고 ‘사적’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중기의 베토벤은 당시 음악계에 널리 퍼져 있던 일체의 관습적이고 형식적인 허식을 개인적인 표현과 주관적인 역동성으로 용해하고자 하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작품 다섯 편을 놓고 보면, 만년에 그가 관습에 대해 취한 태도는 형식 언어의 독특한 섬뜩함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딴판으로 훨씬 온건하고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주관적인 것에 의해 아무런 변화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관습적인 요소들이 후기 작품에 자주 무미건조하게, 마치 기진맥진한 것처럼 자포자기의 상태로 나타나는데, 그런데도 그것이 어떤 개인적인 모험보다 더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런 형식 속에서 주관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은 일종의 새로운 관계를, 죽음에 의해 결정되는 어떤 관계를 맺게 된 것이라고 크레추마어는 말했다.

죽음이라는 말이 나오자 크레추마어는 격하게 말을 더듬었다. 첫 철자에 꼼짝없이 걸려든 그의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은 채 마치 기관총 소리 같은 발음을 연발했으며, 그와 동시에 턱 전체가 마구 떨렸다. 그러다가 이윽고 혀가 안정을 되찾아 모음을 발음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모음을 듣고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단어를 알아듣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연사를 도와주려는 흔쾌한 심정으로 아직 그의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말을 가로채어 그에게 큰 소리로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아 보였다. 그는 스스로 해내야 했고, 또 해냈다. 그는 설명하기를, 위대함과 죽음이 만나는 곳에서 관습에 치우친 객관성이 생겨나며, 그 객관성은 그 우월함에 있어서 가장 오만한 주관주의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정점에 도달한 전통을 이미 극복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은 바로 그 객관성 속에서 스스로를 그 자신 이상으로 확장시키고, 그리하여 위대하고 신비한 신화적 세계, 집단적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과연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묻지 않았고, 우리 역시 그것을 자문해 본 적은 없다. 우선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특정 작품, 즉 피아노 소나타 111번을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 비추어 고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피아노에 다가가 앉더니 악보도 보지 않고 제1악장과 매우 인상적인 제2악장까지 전곡을 연주해 주면서, 중간 중간에 큰 소리로 주석을 달기도 하고, 음악적 기법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노래까지 불러 주었다. 그 모든 것이 때로는 매혹적으로 때로는 재미있는 볼거리로 보이기도 했으며, 몇 안 되는 청중들은 줄곧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는 아주 힘찬 탄주법(彈奏法)을 구사해서 강음부(强音部)에서는 특히 세게 쳤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삽입하는 설명을 청중이 알아듣게 하려면 고함을 질러야 했으며, 연주하는 내용을 다시 강조하기 위해 목청을 높여야 했다. 두 손이 연주하는 것을 입으로 따라 했던 것이다. 격렬하게 상승하는 제1악장의 첫 악센트 부분을 연주할 때는 ‘딩딩-뎅뎅-땅땅’ 하는 소리를 냈고, 아름다운 멜로디의 악절을 고음의 가성(假性)으로 따라 부르기도 했다. 그 덕분에 마치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언뜻 부드러운 햇살이 내비치듯 간혹 작품의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졌다. 마침내 그는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잠시 쉬다가 “이제 나옵니다.”라고 말하면서 변주곡 악장, 즉 ‘아다지오 몰토 셈플리체 에 칸타빌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과연 아리에타 주제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목가적이고 천진난만한 느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온갖 모험과 운명을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열여섯 소절로 구성된 그 주제곡의 모티프는 처절한 절규를 연상케 하는 전반부 마지막 부분으로 집약될 수 있었다. 그 곡은 단 세 개의 음표, 즉 팔분음표와 십육분음표와 사분음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이 음절이 나뉘어져 있었다. “푸른 하늘”, “사랑의 번민”, “아-안녕” 혹은 “모-옥초지”, 그것이 전부였다. 이 부드러운 표현, 음울한 형식과 더불어 리듬과 선율의 대위법이 계속 이어졌다. 거장이 축복과 동시에 저주를 내리고 냉기와 열기, 차분함과 황홀경이 수정처럼 투명하게 하나로 융화되는 영역, 즉 너무나 밝은 세계와 칠흑 같은 암흑의 세계로 내던졌다 들어올렸다 하는 그 모든 것을 사람들은 광대하고 놀랍다거나 생소할 만큼 웅대하다고 일컬을 것이다. 그런 곡조에는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거니와, 그런 곡에는 원래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크레추마어는 그처럼 인상적인 변화 과정을 들려주면서, 게다가 아주 격렬하게 “딤다다!” 하고 건반을 두드리면서 노래까지 불렀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도 큰 소리로 “연이은 전음(顫音)입니다!”라고 외쳤다.

“장식구와 카덴차입니다! 아직도 관습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것을 들으셨지요? 자, 이, 이제 어, 언어에서, 미, 미사여구가 여, 영영 사라지는 게 아니고 오히려 미사여구에서 주, 주관적인 자제심의 외피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술의 외, 외피는 마, 마침내, 내던져 버렸습니다. 예, 예술은 언제나 예, 예술의 외피를 던져 버립니다. 딤다다! 자, 들어 보세요. 이 부분에서는 푸가만큼이나 무거운 멜로디가 어, 얼마나 우세한가 말입니다! 그것이 정적(靜的)으로 됩니다. 단조로워져요. 라 음이 두 번 세 번 차례로 이런 화음이 나옵니다. 딤다다! 자, 주의해서 들어 보십시오. 여기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너무나 복잡한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사이사이 끼어드는 고함 소리까지 함께 듣기란 무척 힘들었다. 우리 모두는 바짝 긴장해서 몸을 웅크린 채 양손을 무릎 위에 모아 쥐고, 크레추마어의 두 손과 입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알아들으려고 애썼다. 이 악장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은 베이스와 소프라노 사이의 커다란 간격, 그리고 피아노를 치는 왼손과 오른손 사이의 넓은 간격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극한적인 상황이 닥쳐오자, 그 빈약한 모티브는 외롭고 쓸쓸하게 아찔한 심연 위에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곡의 그러한 진행 과정은 아득하게 숭고한 느낌을 불러일으켰고, 이어서 과연 곡이 어떻게 전개될까 하는 조바심와 불안한 놀라움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런 느낌이 가라앉는 사이에 비통함과 고집, 집착과 도도함을 떠올리게 하는 선율이 이어졌고, 그러다가 다시 전혀 뜻밖에도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감동이 생겨났다. 온갖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그 모티프가 작별을 고하면서 완전한 작별의 신호와 인사로 바뀌었고, 이어서 ‘라-사-사’ 음 모티프에 가벼운 변화가 일어났다. 즉, 멜로디가 조금 확장되었던 것이다. 다 음이 울린 후에 라가 오고, 그 뒤에 올림 다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푸르-은 하늘” 혹은 “모-옥초지”가 아니라 “오-그대 푸른 하늘이여!”, “푸르-은 목초지”, 혹은 “안녕-영원히”와 같은 식으로 음절이 나뉘어진다. 이 덧붙은 올림 다 음은 너무나 감동적인 위안을 주면서도 부드러운 애조를 띠었다. 마치 고통스럽고도 사랑스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뺨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고, 또한 고요하고 그윽한 작별의 시선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 모티프는 끔찍스럽게 이리저리 혹사한 곡의 구성을 넘치는 인간성으로 축복해 주면서 청중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 영원한 작별의 인사는 눈물겹도록 청중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마치 “이제 고통을 이-잊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작별이었다. “저희 안에 계신 하느님은-위대하셨으니”, “모든 것은-한낱 꿈에 불과하였네”, “부드러운 마음으로-내게 머물러 주오.” 이윽고 곡이 뚝 끊겼다. 빠르고 날카로운 셋잇단음표가 무리 없는 결미(結尾)를 향해 치닫는데, 다른 많은 작품들도 그렇게 끝낼 수 있을 듯했다.

그러고서도 크레추마어는 피아노에서 몸을 돌려 연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향해, 우리와 똑같은 자세로 몸을 앞으로 굽히고는 두 손을 무릎 사이에 얹은 채로 그대로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으며, 왜 베토벤이 작품 111번에 제3악장을 쓰지 않았는가 하는 주제의 강연을 몇 마디로 끝맺었다. 이곡을 실제로 들어 보면 그 의문이 풀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나타’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다단조로 된 이 소나타 작품만이 아니라 한 장르나 전통적인 예술 형식으로서의 소나타 일반을 가리킨다고 했다. 소나타라는 양식 자체가 이 곡에서 끝났으며, 자신의 운명을 다했고 목적지에 다다랐으며, 그 이상으로는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폐지되고 해체되었으며 작별을 고했다는 것이다. 올림 다 멜로디의 힘을 받은 ‘라-사-사’로 이어지는 모티프의 작별 인사는 또한 이런 의미에서의 작별이었으며, 그것은 그 작품만큼이나 위대한 작별, 소나타로부터의 작별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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