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
- 영화로 말한다 -

 전체 게시물 수 : 239, 13 / 16 페이지

이 름    김주향
제 목    [어비스]_2000

케이블로 또 본 [어비스]  - 2000. 8. 7 -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 어느 방에 걸려있다는
밀레이의 유명한 그림, '오필리아'라는 작품을
도판으로 본 적 있습니다.
햄릿의 손에 아버지가 살해당한 후 서서히 미쳐간 비련의 오필리아.
들꽃을 손에 쥔 그녀의 익사체가
녹색의 수생식물이 뒤덮인 연못 위에
뗏목처럼, 한 조각 꿈처럼 떠내려 가고 있는 그 그림.


<햄릿>을 영화화한 작품들 안에서
오필리아를 연기했던 헬레나 본햄카터나,
특히 케이트 윈슬렛의 이미지는 늘 이 그림의 이미지에
적절히 녹아들곤 했지만..
어젯밤 케이블에서 [어비스]를 보던 중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란토니오가
(이름, 안 틀리고 제대로 썼는지 봐주세요)
수중익사하는 장면에서(물론 나중에 다시 살아나지요)
돌연 이 오필리아 그림을 연상했다면,
제가 생각해도 정말 너무한다.. 싶지만..
그렇게 연상이 되던 걸 어떡하나..


아아, [어비스]를 통산 몇 번 봤는지 셀 필요는 없겠지요.
그렇게 여러 번 봤어도 저는
잠수함들의 모양 차이를 간파하지 못하며,
이런저런 기계장비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왜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등등을 쫓아가는데 연신 헉헉대며,
이를테면 천신만고 끝에 위기를 넘긴 주인공이
왜 저 아래 심해로 또다시 내려가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매번 따져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뭔가 내가 잘 모르는 기술적 지식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영화의 이런저런 발상들, 예컨대 액체호흡이라든가
심해에서의 타전 같은.. 아이디어들을 신기하게 여기며  
이러한 발상들을 완벽하게 드라마화 해내는 연출력에 경탄할 뿐입니다.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 안에서 전선을 형성하고 그것을 유지시키고
고조시켰다가 해제하는 능력이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지요.
몇 번의 고개가 있습니다..
각 고개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뛰어난 소드라마들이며
고개를 타넘어가는 과정에서의 타이밍 감각은 또 얼마나 우수합니까.

그는 또한 자기 영화의 각본을 직접 쓰는 걸로 압니다.
엔지니어들이 주도하는 드라마,
기술과학과 행동력에 대한 찬미,
이제는 블록버스터 영화들에서 하나의 상투적 장치가 돼 버린
팀 플레이에 대한 유쾌한 묘사,
중고생 감수성의 쉽고 담백하고 선명하고 힘찬 휴머니티..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카메론의 영화에서 여성이 묘사되는 방식도 좋습니다.
이 역시 이제는 상투적 캐릭터 유형이 돼 버린 감이 있지만..
가령 [어비스]에서 주인공 린지는
전통적으로 남자의 영역이라고 생각되어 온 분야에서
남자 못지 않은 전문성을 가지고 활약하며 특히 야전 경험에 있어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소위 대가 센 여성으로 나옵니다.
몇 개 안 되지만 그의 여타 작품에서도 비슷했던 것 같은데..
이런 여성 캐릭터에 좀처럼 작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과 더불어
드라마를 통해 캐릭터에 부여되곤 하는
진실한 감정이라든가 정서적 터치 때문에..
카메론의 여성 캐릭터에서 적출되는 페미니즘은
신뢰할 만하다고 늘 평가하게 됩니다..


아, 실은..
이 감상문을 시작한 이유가 여기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 [어비스]를 보신 분들 누구나가, 예외없이(단언합니다)
기억하시겠지요.. 빙점에 가까운 수중에서 순식간에 익사한 린지를 데리고
버질이 딥코어던가요, 대원들이 있는 아지트로 필사적으로 헤엄쳐 와서
전기충격과 인공호흡으로 살려내기까지의 그 형언할 수 없이 감동적인 장면,
이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 사람 분량의 장비. 아지트까지의 소요시간은 7,8분.
헤엄은 당신이 낫다..
나는 곧 죽는다. 그러나 혈관은 얼어붙어도 기관은 가망있다.
그러니 당신이 날 데려가서 살려내라..
목 위로 차오르는 얼음물의 공포 속에서
최종적으로 여자가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타이타닉]의 수중이별 장면이 과연 이 장면에 미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린지역의 메리 엘리자베스 매스트랜토니오.
이번에 [퍼펙트 스톰]에도 나왔습니다. 거기서 그녀가
조지 클루니와 티격태격하는 고기잡이 어선의 유능한 선장으로 나왔을 때
[어비스]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슷한 캐릭터여서요..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선원들에 대한 추모사를 그렇듯 감동적으로 낭독할 사람이
그녀말고 누가 있었을까요..
그녀를 보면 언제나 용기있고 이지적인 동시에
정감있는 말괄량이가 떠오릅니다.
목소리도 참 좋아서, 그 음성으로 부르는 노래를 듣고 싶지요..

어쨌든..
그 장면으로 되돌아갑니다..
물은 순식간에 그녀를 삼켜버리고 그녀는 얼음이 됩니다.
아마도 이때의 린지를 보며 예의 '오필리아' 그림을 연상했었나 봅니다..
자, 그리고! 에드 해리스가 있습니다.
아내가 익사한 직후부터 펼쳐지는 그의
다급하고 절박하고 필사적인 연기는.. 필설로 불가능한,
오직, 전율일 따름입니다.
그는 거의 이성을 잃고 있지요..
여기서 그는.. 세상 어떤 입맞춤보다, 어떤 포옹보다 강렬한
최고의 러브씬을 보여줍니다.

흔히 '잊지 못할 영화사의 명장면'이라는 말 종종 합니다만..
적어도 영화대중이 써내려가는 명장면 목록에
이 장면을 결코 빼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심해로 한없이 한없이 내려간 버질이
아내의 가이드에 따라 타이핑해 보내오는 전언들과 함께,
너무나도 강력한 감정을 일깨우는..
절대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새 시설 좋은 극장 많이 생기는데
[어비스]를 극장에서 재상영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래된 소망입니다.






59    선생님.. ^^;  김병진   2010/04/29  500
58      [re] 선생님.. ^^;  주향   2010/04/30  549
57    어찌 지내시는지...  아르테미스   2010/04/02  548
56      [re] 최근에 본 영화  주향   2010/04/05  618
55    선생님~!!!  DarkCleric   2010/03/07  509
54      [re] 선생님~!!!  주향   2010/03/10  601
53    2009년의 영화들, 기대와 소망, 나의 베스트 등  김주향   2010/01/11  841
52      [re] 2009년의 영화들, 기대와 소망, 나의 베스트 등  P&T   2010/01/16  543
51    DJUNA님의 [에일리언 2]를 읽고 잡담_2005  김주향   2009/12/28  521
50    [어비스] 또 하나  김주향   2009/12/28  474
49      [re] [어비스] 또 하나  아르테미스   2010/01/02  527
   [어비스]_2000  김주향   2009/12/28  484
47    카메론을 위한 노래_1998(타이타닉이후)  김주향   2009/12/28  541
46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가 보고 싶다_1996(타이타닉이전)  김주향   2009/12/28  515
45    [라스트 왈츠]  김주향   2009/07/27  772

[PREV] [1]..[11][12] 13 [14][15][16]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Suncomso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