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
- 영화로 말한다 -

 전체 게시물 수 : 224, 10 / 15 페이지

이 름    김주향
제 목    [시벨의 일요일]_2002.2.2
[시벨의 일요일]

-가혹한 감상자와 영화와의 결별 -

고교시절 텔레비전 영화로 본 [시벨의 일요일]은
독일계 배우가 연기하는 외로운 청년과 어린 소녀 간의
사랑이라는.. 기묘한 내용 줄기와 더불어
겨울, 얼음, 햇빛 반사, 하얀 입김, 놀이공원, 교회 첨탑, 파국.. 과 같은
차갑고 시적인 영상 파편들로.. 오랜 세월 남아있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흐른 지금
재감상 직후의 느낌이란..
이 작품, 어쩔 수 없이 낡은 필름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시벨의 일요일]은
내게 그 어떤 열광도, 향수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그 까닭이.. 이를테면
이번 방영이 영어더빙버전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프랑스 영화에 영어더빙이라니, 이게 웬말, 이런 거 말이다.
어, 하지만 오래 전 이 작품을 감상하던 그 시절에도 역시
이 작품은 불어버전이 아니긴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니까 그 당시에도 이 작품은 한국어 더빙 아니었던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번에 이 작품이 불어로 방영되었다면
혹 옛 시절의 호감이 되살아났을지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니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더빙 형태에 대한 의혹이라든가 문제제기의 저변에는 결국
이런 종류의 소위 '프랑스적인 영화'에 대한
감상자의 복잡다단한 사연들이 투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한 영화의 수용시기와 수용환경에 대한 분석, 내지 영화 세대론 등에 의해
보다 정밀하게 조망될 수 있지 싶다..
연령차이가 심한 청년과 소녀의 사랑이라는 설정이
그 당시엔 얼마나 신선한 설정으로 받아들여졌던가..
더군다나 이 영화에서 그려진 연애는
그러한 설정에서 기대되는 상식적인 정서,
곧 불륜스러운 끈끈함 따위와 동떨어진
뭐랄까, 무공해청정지역으로 다가오지 않았던가..
보기 드물게 함축적이며 생략적이며 상징적인 영화언어들까지..

적어도 그 당시엔 이런 요소들이
색다른 매력과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며..
한 마디로 [시벨의 일요일]은..
당시 할리우드 영화들이 채워주던 만족감 이상의 어떤 것들을
소위 '프랑스 영화'를 통해 섭취하던 영화애호가들에겐,
당장 자신의 교양 목록으로 접수해 버릴 만한 요건을
보기좋게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이 작품을 소위 '내 인생의 영화'류로 기억하고 있는
그 시절 명화극장 세대인 영화애호가들의 그룹엔
'나'도 위치해 있었다..
이번의 재감상 직전까지는 말이다..

어느덧 그 신선했던 설정은
그러한 영화에서의 설정, 혹은 문예물에서의 설정이
이제 더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설정을 다루는 시각이 위선적이고 비겁하다는 느낌으로 인해
더이상 신선하지 않다..
재감상 직전에 나는
그 옛날 영화 속 시벨의 얼굴이 정확히 떠오르지 않았었다..
대충 뽀네트 정도의 어린 소녀로까지 연령대를 낮춰 잡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영화 속의 그녀는 꽤 성숙해 있었고
결정적으로 오버하고 있었다..

그래, 확실히.. 그 천박한 영어더빙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에서 시벨에게 드리워진 후광은 상당히 의심스럽다..

반면 하디 크루거가 연기한 피에르는 꽤 믿을 만했다.
어쩌면 이 작품을 향한 가장 솔직하고 너그러운 시선은..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한 젊은이의 정신분열, 쯤으로
바라봐 주는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적이었다고 기억되던 영화언어마저도..
만개한 영화시대를 통과하며
이런저런 불어권 영화의 마스터피스들을
꾸준히 학습해 온, 거기다가
80년대 누벨이마주 시절의 이미지 폭발을
거의 실시간 현장에서 생생히 목도해 온 사람들에겐..
그저 그런.. 시시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여전히 아름답지만.. 싱싱함이 소멸해 버린 그 이미지들.

그렇다면 남은 건 오직 향수뿐인데..
아는가..
가혹한 감상자는 향수 따위에 연연해하지 않는다.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어쩌구 목록에서
과감히 지워버려도 좋겠다, 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영화 하나 없어도 목록은 차고 넘치며
시시각각 업데이트되고 있는 중이다..

실은 이 작품이 재방영된다는 소식을 듣고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기대와 흥분으로 몇몇 학생들에게 추천까지 했었다.
감상 직후 그 추천이 무색해지고 말았지만.
그나마 지금 와서..
추천을 취소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작품에 나타난 상징어들이
막 자라나는 입문기 영화애호가들에게
초보적인 학습 자료로서는
그리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이다..


다 쓴 후 돌아본 이 감상문은 어쩐지..
내 정신에 오랜 세월 들러붙어 온
소위 '프랑스적인 것들'과의,
인위적인, 몹시 인위적인 결별 의지로.. 읽힌다.  







89    알랭 레네의 영화 두 편_2002.2.2  김주향   2012/09/21  339
   [시벨의 일요일]_2002.2.2  김주향   2012/09/21  419
87    [도둑들]  김주향   2012/08/09  342
86    [다크 나이트] 2008.8.27 게시물  김주향   2012/08/09  311
85    [다크 나이트 라이즈]  김주향   2012/08/07  379
84    근래 본 영화들  김주향   2012/07/25  489
83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 (Fast Five)] (2011)  P&T   2011/05/08  318
82    [메카닉]  주향   2011/02/26  448
81    [데스레이스] (2008.10.27 게시물)  김주향   2011/02/21  367
8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2008.3.9 게시물)  김주향   2011/02/21  382
79    게시판을 다시 열며  김주향   2011/02/21  421
78      [re] 잽싸게 덧글을 달며^^  whereto   2011/02/22  386
77    선생님 잘 계세요?ㅎㅎ  김연성   2010/11/11  383
76      [re] 선생님 잘 계세요?ㅎㅎ  주향   2010/11/12  427
75    Time to write  whereto   2010/08/13  481

[1][2][3][4][5][6][7][8][9] 10 ..[15] [NEXT]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Suncomsof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