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
- 영화로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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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겨울, 멜빌의 영화들

추위가 뼛속으로 스며드는 스산한 날씨..
본격적인 겨울로의 돌입이다
문득 생각나 찾아본 옛 글
연중 딱 이맘때였고.. 이 영화들에 매혹되어,
특히 영화 속 차갑고 음울한 파리에 이끌려
이듬해 1월 여행을 단행했었다
2007년 12월에 본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들

지난 해 12월을 풍요롭게 해 준 것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감상한 일련의 장 피에르 멜빌 영화들이다.
한때 타란티노, 오우삼 등이 창조했던 예술적 폭력물의
가계혈통을 확인하는 통시적 비교 체험과 동시에
스크린 한가득 스며들어 있던 전형적인 파리의 겨울,  
파리의 음울, 파리의 우수에 혼이 사로잡힌 시간들이었다.
이 송년의 특별기획은 또한 학년말 격무를 이겨내는 에너지가 되어 주었다.
업무시간 땡치면 곧장 집으로 향하는 땡순이교사인 내가
시내로 나간다고 하니 무슨 약속 있냐고 궁금해하는 동료들 면전에
미소와 함께 노코멘트 날려주고 표표히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이날의 은밀한 설렘과 기쁨을 누구와 공유할 수 있었을까.
언제부턴가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혹은 쓸데없이 참견당할 라이프스타일은
공유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짜 소중하고 진짜 아끼는 것에 대해선 좀처럼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게시판을 제외하곤.

감상의 순서에 따르면 첫 작품은 [그림자 군단]이라는
전시 프랑스 배경의 레지스탕스 영화였다.
이 작품은 레지스탕스의 애국주의와 영광된 활약상에 대한 영화는 아니다.
그보다는 발각과 도망과 체포와 고문과 죽음을 예감하며,
밀고와 배신과 처단으로 점철되는 그들의 직업적 임무수행 그 자체,
즉 일(job)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이 과정에서
비밀과 의심의 코드를 생체에 새기며 살아야 하는 모든 테러리스트의 실존,
그들의 강박관념, 그들의 용기에 관한 영화였다.
침착하고 고뇌어린 영화로서 저항조직의 요원들은
마치 갱이나 카톨릭의 사제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레지스탕스 대장은 학자이자 베토벤 애호가였다.
섬광처럼 지나간 부분적으로 초현실적이고 시적인 장면들이 있었는가 하면
총격이 있기 전 긴장을 조성하는 방법이나 사각의 아지트 안에
의자 뒤로 손이 묶인 채 밀고자가 처벌당하는 장면 등에서
[저수지의 개들]의 구도와 앵글이 보였다.
소녀시절 극장개봉영화에 대한 동경이 싹트던 무렵
일간지 하단을 큼직하게 장식하던 영화광고들의 이미지 가운데는
코트깃을 세운 냉혹한 프랑스 배우들, 남자이면서 어른이고 중년인 그 배우들,
예컨대 이 영화의 주인공인 리노 벤추라같은 이름과, 또한 진정 그들의
존재감에 맞먹을 여장부 시몬 시뇨레 같은 여배우들의 이름이 박혀있었다.
[그림자 군단]은 영화라는 작은 창과 좁은 통로로 다른 세상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답답하고 촌스럽고 아련한 70년대를 환기시킨다.
차가운 청색 톤의 스크린엔 눈발이 날리거나 자주 비가 오고 있었는데
다 보고 극장을 나설 때 내 가슴에도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림자 군단]을 서곡으로 하여 이어서 본 세 작품은
60년대말 70년대초 멜빌 말년에 제작된, 특별히 알랭 들롱이 등장하는
세 작품 [암흑가의 세 사람] [형사] [사무라이]였다. 이들 중
가장 완전한 작품은 원제가 ‘레드 서클’인 [암흑가의 세 사람]이다.



나는 영화 전반부에 각자 다른 길에서 출발한 두 주인공, 즉
막 출옥한 코레(알랭 들롱)와 호송열차에서 도주한 보젤(지안 마리아 볼롱테)이
마침내 대면하기까지, 또 대면 후 나누게 되는 정서,
그것을 자아내는 우아한 영화문법에 포로가 되었다.
화면 속은 온통 비와 눈이 오락가락하는 파리 또는, 파리 근교의
늦가을 및 겨울로 가득하고 그 황량한 풍경 안에서
적은 대사와 담배를 문 사나이들의 트렌치코트와 비정한 눈빛과
숙련되고 냉정한 동작들이 환장할 스타일로 마음을 빼앗는다.
훗날 오우삼은 이 코레와 보젤 간에 말없이 형성되는 동지애 내지
인간적인 끌림을 [첩혈쌍웅] 같은 작품에서
중국인다운 호방하고 과장된 멜랑콜리로 처절하게 번안해 낸 바 있다.
국경과 시대를 넘어 대가들의 손에 의해 영화가 영화로 이어지는
이 감동적인 영향을 목격하는 것은 감미롭다. 멜빌 영화 또한  
할리우드의 고전적 필름느와르에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알고 있다.
코레와 보젤 두 사람에다 전직경찰이자 알콜중독으로 폐인이 돼 있는
연금술과 사격술의 달인인 장센(이브 몽탕)이 가세하여
삼인조를 이루는 과정까지가 이 영화의 전반부이다.
여기서 이브 몽탕의 카리스마도 만만치가 않다.
그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마치 전위적인 회화 장면 같다.
강렬하고 모던한 침실 인테리어하며
만취되어 널부러져 있는 그의 침대로 두꺼비, 쥐, 도마뱀 같은
징그러운 파충류 양서류들이 하나씩 기어올라가는 환각과 악몽의 오색 비주얼.
보석강탈 제안을 수락함과 동시에 그는 새삼스럽게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된 사람처럼 알콜과 권태를 떨치고 사격연습에 들어간다.
그리하여 삼각편대의 무게중심이 된다.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이 삼인조가 파리 도심의
방돔 광장의 보석상을 터는 장면의 치밀한 실황중계이다.
많은 이들이 이 범죄 장면의 정교하고 프로페셔널한 연출에 경외감을 표한다.
그러나 이 영화 이후에도 수많은 범죄물과 007풍의 영화들을 통해
이런 범죄 묘사는 진화되어 왔다. 이 영화의 극단적 디테일이
지금의 눈으로 봤을 때 참신하거나 경제적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더군다나 영화 전반부의 우수어린 포스에 압사당한 나로서는
후반부는 그냥 흐름타고 가는 것에 불과했다.
확실한 것은 이 영화가 범죄의 동기나 이유, 수사과정보다는
범죄 그 자체의 디테일을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으며 그 결과
드라마적인 서스펜스가 아니라 순수하게 액션안무에 기초한
독립적이고 건조한 서스펜스를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 오히려 [암흑가의 세 사람]의 진한 향취는 다양한 캐릭터들에서
나오는 것 같다. 범죄자 삼인조 말고도 보젤을 추적하는 마테이 반장과
노련해 보이는 경찰국장까지도,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사는지가 더욱 궁금해지는, 흥미롭고 신비한 인물이다.
깐깐하고 집요한 경찰공무원 마테이 반장은
놀랍게도 딸린 가족 없이 여러 마리 고양이들과 살고 있으며
달랑 한두 장면 등장하는 경찰국장은
누구나 죄를 짓는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타락하게 돼 있다는,
명쾌하고도 심금을 울리는 범죄철학의 소유자이다.
양적으로 최소한, 질적으로 스타일리쉬하게 사용된 이 영화의 음악도 탁월하다.
특히나 살풍경한 야산과 시냇물과 겨울숲을 통과하는 보젤의 도주와
경찰이 맹견들을 풀어 그를 추격하는 장면, 이와 대위적으로 조합되던,
무아지경의 도취 및 붕괴로 치닫는 표현주의적 재즈음향은
마치 그 시퀀스만으로 이루어진 걸작단편을 보는 듯했다.



72년작 [형사]는 멜빌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형사 콜망 역의 알랭 들롱은 [암흑가의 세 사람]에서와 달리
콧수염을 깨끗이 밀고 나온다. 그래서인지 그의 마스크는 충격적으로 공허하다.
나는 그가 콧수염이 있을 때가 훨씬 안전한 이미지였다고 기억한다.  
[형사]는 프랑스 배우의 대명사인 알랭 들롱과
이브 생 로랑의 옷을 입힌 카트린 드뇌브,
클럽쇼와 재즈 등 당시 유행코드를 적절히 활용한 영화이면서
후반부에 헬기에서 열차로 접근, 마약을 강탈하는 범죄 장면은
[암흑가의 세 사람]의 보석강탈 장면과 동일한 원리로 극단적 디테일에 집중한다.
내가 이 영화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오프닝씬이다.
극도로 일기가 불순한 한 지방도시의 해변도로가 스크린을 채운다.
짙은 안개로 한 치 앞이 안 보이고 오직 거센 비바람소리와
사나운 파도소리만 들려오는 가운데 중절모를 쓴 네 명의 갱이
차를 대기시켜 놓고 인적없는 해변가 대형아파트 1층 모퉁이에 위치한
마감 직전의 은행을 털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모든 것이 잿빛인 가운데 이따금 지나가는 차량의 라이트와
빗물진 아스팔트의 마찰음, 오늘날 BNP PARISBAS로 알려진
알파벳으로 ‘파리국립은행’이라고 쓰인 초록의 네온광선,
이런 것이 어우러져 안겨주는 강렬한 느낌을 지우지 못해
집에 와서 영화 제목과 생 장 드몽이라는 이 로케이션지 이름을
구글에 넣어 몇 시간을 검색하며 그 이미지를 찾아보려 애썼다.
결과는, 프랑스의 대서양변 휴양지로 바캉스 시즌에 붐비는 그 도시의
세상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해수욕장의 모습만
몇 장 건질 수 있었을 뿐 그러한 기후와, 그러한 조명과, 그러한 각도와,
그러한 생략과 암시와 효율적 동작의 문법으로 이루어진,
그러한 톤과 아우라의, 바로 '그' 영화장면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유일한 이미지가 사는 집은 오직 그 영화, 그 필름 속인 것이다.  
이런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영화를, 필름을,
영원히 안타깝고 그리운 그 어떤 것으로 여기게 한다.



67년작 [사무라이]는 이번에 본 영화들 중 가장 미니멀한 작품으로
냉혹하고 무표정한 완벽주의 킬러인 제프 코스텔로가 주인공이다.
극도로 침묵어린, 대단히 정적인 화면 속에서
전광석화와 같이 파괴적인 총격전의 설계 및 로케이션 감각은 명품에 값하였고
나는 특히 제프가 총상을 입고 집에 돌아와 한 손으로
자신의 부상당한 팔을 치료하곤 하던 몹시 불편해 보이던 동작이
인상적이었는데 꽤 오랜 시간 할애하여 반복적으로 보여주던
그 장면에서 흰 셔츠 차림의 그 바디라인, 자기자신만이 자기를 돌보고
처치할 수밖에 없는, 고독으로 또아리진 그 육체가 눈에 선하다.
이 영화에서 알랭 들롱의 눈은 다른 어떤 영화에서보다도 더 공허하다.
그 아름다운 눈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다, 그 무엇도 전달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냥 텅 비어있다. 그러기에 그를 보는 우리는 그가 고독한 존재임을 안다.
이 작품에서 알랭 들롱의 고독한 킬러 이미지, 그리고 위증을 하여
그를 살려준 클럽에서 노래부르던 여인과의 관계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이 주윤발과 엽천문이 열연한 오우삼의 킬러, [첩혈쌍웅]을 떠올리게 한다.


감상문에서 보듯이 멜빌 영화와 내가 궁합이 맞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의 작품을 보는 것은 언제나 큰 기쁨을 줄 것을 믿어의심치 않는다.
단지 그를 경외하고 추종한다는 한국의 감독들이 만드는 범죄물들은..
이제 포스터만 봐도, 예고편만 봐도 지겨워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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