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노트
- 영화로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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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김주향
제 목    [호수의 랑슬로] 2013.2.27

아더왕 전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을 꾸준히 보아오면서 나는 단 한번도
란슬로트와 기네비어의 사랑이 로맨틱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언제나 아더왕이 란슬로트보다 더 멋있고 영웅적이며 카리스마틱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아더왕은 불멸의 1인자이고 란슬로트는 숙명적으로 2인자이기 때문이다.
란슬로트가 아무리 절세미남에 무훈이 뛰어난 기사도의 화신이라 할지라도
아더왕의 존재감이 서사를 지배하는 한 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절세미남에 달콤한 섹시남일수록 란슬로트 캐릭터는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아더왕에게 충성의 서약을 한 내 눈에 란슬로트는 주군의 아내를 탐한 배반자이고
그만큼 자신에 대한 엄격함에 있어 기준선 미달인 허약한 놈이고
기네비어는.. 뭐 한 마디로 bitch이다.
로맨스 구조에서 주인공 남녀는 각각 한 명이어야 한다.
남자는 최고의 남자여야 하고 여자는 최고의 여자여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최고의 남녀가 첫눈에 사랑에 빠져야 한다.
남성캐릭터에 대한 주의력이 아더왕과 란슬로트로 양분돼 버리면
로맨스의 집중도는 벌써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요컨대 내게 아더왕 이야기는 그 자체가 로맨틱한 서사이지 그 서사의 한 요소인
란슬로트와 기네비어의 스캔들이 로맨틱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먼 발치서 신비하게 느껴지던 로베르 브레송의 1974년작 [호수의 랑슬로]를 보았다.
음악연주 스타일로 말하면 고악기로 이루어진 소편성 시대연주에 비할,
아더왕 전설의 이, 극도로 드라이하고 간결하고 검박하고 조촐한 버전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이제껏 보지 못한 가장 로맨틱한 란슬로트를 만났다.


[호수의 랑슬로]는 어떤 영화인가.
웅장하고 화려한 성은커녕 무슨 시골 수도원 쪽방 기도실보다 못한 세트에..
은빛 갑옷과 투구로 치장한 용맹스럽고 멋진 기사들이 아니라
저 혼자 입고 벗지도 못할 정도로 무겁고 답답한 양철덩어리에 갇혀
깡통로봇처럼 덜그럭거리며 돌아다니는 우스꽝스러운 기사들하며..
특히나 갑옷이 보호해주지 못하는 신체부위의 클로즈업, 예컨대
레깅스 차림이 그대로 드러나 한없이 연약해 보이던 기사들의 종아리와 발뒤꿈치하며..
이른 아침 먹고살기 위해 샐러리맨들이 양복 차려입고 집을 나서 출근길에 오르듯
말 위에 안장이 얹혀지면 기사들이 시종의 도움으로 투구를 쓰고 말에 오르는
무척이나 사무적인 출정 장면하며.. 그러나 막상 제대로 된 전투장면 하나 없이
컴컴한 숲에서, 매복해 있던 반역자들의 기습에
갑옷과 투구에 가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를 익명의 존재로,
댕강 잘린 모가지에서 분수처럼 콸콸 피를 뿜으며 고꾸라져
마치 한 마리 갑각류처럼 최후를 맞는 멋대가리라곤 없는 그들의 죽음하며..
영화의 주제가 모든 영웅적 기사담의 탈신화화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판타지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파격적’인 중세가 펼쳐지는 가운데
배우들은 감독의 지시에 따라 뻣뻣하게 움직이며 국어책을 읽는 그런 영화다.
[잔다르크의 재판]도 그러했고 [무셰트]도 그러했다, 본질을 얘기함에 있어
영화적 치장들의 무용론, 브레송 영화들에서 발견되는 미학의 전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비관습적이고 무미건조한 영화에서 격렬한 감정이 느껴지다니..
아더왕 이야기 중에서도 캐멀롯의 몰락기에 내용이 한정되어 있는 이 영화에서
아더왕은 엑스트라에 불과하고 기네비어는 유혹적이지만 대상화되어 있는 반면,
드라마의 중심은 전적으로, 성배 찾기에 실패하고 돌아온 지친 기사 란슬로트가
기네비어와의 관계 속에서 갈등하는, 그의 깊은 시름과 고뇌에 맞춰져 있다.
화면 전경에 십자가가 놓여있고 후경의 란슬로트가 그것을 한참 바라볼 때
전경의 포커스가 차차 흐려지면서 십자가 윤곽이 희미해지던 장면이 생각난다.
아더왕보다 더 늙어보이는 아저씨에다 거웨인같은 어린 기사에게 무한숭배의 대상인
이 야전사령관풍의 란슬로트가 나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로맨틱했다.


이미지 출처_http://blog.daum.net/doldu/11371951

프랑스 영화에선 중세기사나 교회성직자나 레지스탕스나
어찌하여 모두가 이렇게 한결같은 이미지들인지..


[호수의 랑슬로]는 대체로 정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괴팍하면서도 역동적인 마상창시합 장면을 담고 있다.
시합을 알리는 나팔소리의 반복, 매 경기 말탄기사의 질주와 동작을 화면에 담되
허리선 아래로 제한하는 변태적 촬영각도, 출전기사들의 액션엔 야박하면서
시합을 바라보는 관중석 리액션과 말에서 굴러떨어지는 패자의 몸뚱이는
꼬박꼬박 챙겨주던.. 참으로 브레송만의 독특한 사운드와 비주얼 구성,
리듬감 있는 편집으로 이루어진 이 장면, 영화를 본 사람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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